•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2. 미술
  • 3) 조각

3) 조각

 미술사에서 중기라 할 수 있는 시기는 4분기법(初期·中期·後期·末期)으로 분류할 때 1500년경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마무리된 1636년경까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5분기법으로 나눌 때는 조선조 前半期의 후기, 또는 조선조 제2기라 말하기도 한다.

 불교를 극심하게 탄압했던 연산군이 퇴위당하고 중종이 재위에 오른 해가 1506년이니 대개 이 시기를 전후해서 미술은 한 번의 변모를 겪게 된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연산군 당시에 명나라의 미술이 조선에 영향력을 다소 미치고 있는데, 이런 새로운 양식과의 교류접촉과 신흥하던 조선의 미의식이 조화되어 새로운 조선의 미술이 형성되고 있었다.0865)文明大,<朝鮮前期 彫刻의 硏究>(≪梨花史學硏究≫13·14, 1993).
―――,<세종시대의 조각>(≪세종시대 미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6), 86∼121쪽.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 경주 祇林寺乾漆觀音菩薩像(1501년)이다(<사진 1>). 나무 골조에 종이와 천을 덧대고 옷칠을 하여 완성되는 乾漆像들은 고려 때부터 유행했는데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조 제2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나무 대좌에 쓰여진 먹글씨에 의해서 1501년작으로 판명된 이 보살상은 나무대좌에 오른쪽 다리를 내린 半跏像이다. 높은 투각 보관, 다소 풍만한 얼굴, 단아한 이목구비, 표면을 밋밋하게 처리했지만 풍만한 체구, 두터워지는 옷과 굵지만 유려한 옷주름, 정교한 목걸이와 띠매듭, 재치있게 처리한 손발 등에서 당시의 뛰어난 솜씨로 만든 보살조각상임을 알 수 있다.

확대보기
<사진 1> 기림사건칠관음보살상(1501년)
<사진 1> 기림사건칠관음보살상(1501년)
팝업창 닫기

 기림사의 대적광전의 塑造毘盧遮那三身佛像도 이 즈음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法身 비로자나불과 報身격인 약사불상, 化身격인 아미타불상(<사진 2>) 등 삼신 불상은 手印만 다를 뿐 동일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0866)文明大,<毘盧遮那三身佛圖像의 形式과 祇林寺三身佛像 및 佛畵의 연구>(≪佛敎文化≫15, 1998), 77∼100쪽. 높은 육계, 길고 풍만한 얼굴, 장대한 상체, 건장하고 당당한 체구, 가슴의 양감은 없으나 불쑥 나온 배, 넓고 장대한 결가부좌의 다리, 그리고 두껍고 힘찬 通肩衣, 왼쪽 팔굽 상단의 Ω자 옷주름 등의 표현에서 같은 기림사의 1501년 건칠보살상 등 16세기 불상 양식들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양식은 1482년작 天柱寺木佛坐像이 더 당당하고 건장한 면으로 진전되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본존불이 짓고 있는 지권인은 왼손 주먹 위에

확대보기
<사진 2>소조아미타불상
<사진 2>소조아미타불상
팝업창 닫기

 오른손을 겹쳐 오른손 검지를 구부린 특징있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 등 이 불상의 작가는 재치와 능력을 구비한 佛師였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본존 복장 속에 봉안되었다가 도굴 미수에 그친 服藏物은 고려와 조선 초기의 많은 寫經과 판경의 경전들로써 이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 작은 小像들도 눈에 띈다. 正德 10년 銘(1515)이 있는 地藏菩薩像(개인소장)은 자연 岩盤形의 대좌 위에 안온하게 앉아 있는 단독 소상이다(<사진 3>). 앞으로 머리를 약간 숙인 채 미소를 띄고 있는 얼굴은 내면의 법열이 잘 형상화되어 있는데 무위사극락전 아미타불 협시의 지장보살상과 대비되고 있다.0867)柳麻里,<조선시대 조각>(≪韓國美術史≫, 藝術院, 1984). 머리에 쓴 두건의 모양이나 단아한 신체의 세련미에서는 다소 떨어지겠지만 구제보살로서의 감화력은 이 보살이 더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평판적인 상체나 낮고 넓은 하체 등은 입체적인 양감이 떨어지고 생동감이 약화되었으며 수평적인 승각기 표현과 활력이 사라진 옷주름 등에서 작은 석조각의 일면을 알 수 있다.

확대보기
<사진 3> 정덕 10년명 석지장보살상
<사진 3> 정덕 10년명 석지장보살상
팝업창 닫기

 이런 특징은 이보다 3년 앞선 1516년작 實相寺瑞眞菴 16나한석상에서부터 보이고 있다. 16나한상 가운데 지장보살상과 흡사한 두건 쓴 나한상은 얼굴에 미소를 담뿍 띄고 있어서 자연스럽고 생기찬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표정과 함께 짧은 상체나 낮은 무릎, 양감없는 평판적 체구 등은 당대 작은 석조각의 한 경향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암반형 석대좌를 신체와 함께 만든 것도 이런 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나한상들은 대개 한국식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데 간결하고 힘있는 각법으로 활기를 띄게 하고 있다. 유일하게 명문을 남긴 나한상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이 범상으로 노선사의 표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대좌 밑에 돌아가면서 10자의 명문(正德十一年化主 敬熙)을 새기고 있다.

 이런 양식은 기본적으로 16세기에 걸쳐 계속 조성되었다고 생각되지만 현재 많은 예는 알려져 있지 못한 편이다. 洪城 高山寺의 목불상도 이 계통으로 보이지만 복장물만 조사된 채 이동되어 행방이 묘연하다. 복장 조성기에 1543년작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造像經의 법식대로 복장물을 넣고 있다.0868)文明大,<高麗·朝鮮時代의 彫刻>(≪韓國美術史의 現況≫, 藝耕, 1992), 221쪽.

 그러나 莞島 觀音寺의 목보살상의 예는 이 당시의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복장기에 의하여 1569년에 조성되었다는 것이 확인된 이 보살상은 아미타불의 협시상인 관음이나 대세지보살로 생각되는데 오른 다리를 세운 반가좌 변형자세의 보살상이다.

 얼굴은 둥글면서도 단정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미소가 약간 남아 있어서 아직도 평판화가 덜 진전된 16세기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상체도 짧고 양감이 부족하여 평판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체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굵은 다리, 투박한 손, 두터워진 천의, 왼 팔굽의 Ω형 옷주름, 간결한 옷주름 등은 무위사목삼존상 등 초기 불상 특징이 어느 정도 남아 있으면서도 새로운 조선조 양식이 정착되어 가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전쟁 기간에는 불사들이 한결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작품들은 거의 남아 있지 못한 편이다.

 그러나 임란이 끝나면서부터 불사들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이와 함께 불상들도 점차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1628년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되는 수종사석탑내 金銅佛像群은 이런 경향을 알려주는 귀중한 작품들이다(<사진 4>). 정상계주와 중앙계주가 표현된 높다란 육계, 팽만감과 볼륨감이 풍부한 얼굴과 얼굴 가득 미소띈 童顔, 짧고 통통한 상체, 낮고 작은 무릎, 그래서 어린이 같은 신체 비례, 그리고 두꺼워진 통견의 등은 16세기 전반기의 돌로 만든 小像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활력이 넘치는 것 같다. 貞懿大王大妃가 주조했다는 銘文으로 이들 수십 구의 작은 금동상들이 임란 직후에 왕실에서 발원, 시주하여 수종사탑을 열고 15세기 후반기에 이어 다시 봉안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0869)林玲愛,<朝鮮時代 佛敎彫刻>(≪韓國佛敎美術大典-佛敎彫刻≫, 한국색채문화사, 1994).

확대보기
<사진 4>수종사 금동비로자나불상(1628년)
<사진 4>수종사 금동비로자나불상(1628년)
팝업창 닫기

 이 불상보다 4년 앞서 조성된 佳山寺木佛坐像도 본질적으로는 유사한 양식을 보여준다. 큼직한 머리, 짧은 상체 등 童體的 신체비례는 수종사금동불상이나 16세기 불상의 특징과 비슷하며, 갸름하면서도 양감있는 얼굴과 덜 평판화된 체구, 앞으로 숙인 상체도 동일한 수법이다. 그러나 정상계주가 없고 이목구비가 너무 작고 단정해서 파격적인 미소가 없으며, 무릎이 큼직한 것 등은 달라진 모습이다.

 이러한 동체적인 불상과는 다른 계통의 불상들도 여전히 조성되고 있다. 1630년에 조성되었다는 명문(崇禎 3년)이 새겨진 관악산 磨崖彌勒佛坐像은 얼굴이 길고 통통하며, 상체도 늘씬하게 길어 앞서의 불상들과는 다른 인상을 주고 있다(<사진 5>). 3/4 측면관의 이 불상은 머리 부분은 부조로 새겼지만 신체는 線刻으로 새기고 있어서 선각마애불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선묘의 필선은 유려한 편이지만 해이된 면도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숙이고 어깨를 움추리고 있는 점 등은 당시의 특징이 보이고 있다.

확대보기
<사진 5>관악산 마애미륵존상(1630년)
<사진 5>관악산 마애미륵존상(1630년)
팝업창 닫기

 이러한 장대한 불상계통은 대형 불상에서도 보이고 있다. 無量寺塑造阿彌陀三尊佛像은 1633년에 흙으로 조성한 거대한 소조불상인데 얼굴도 대형이지만 체구도 장대한 편이다(<사진 6>). 나발로 덮혀 있는 머리는 육계의 표현이 거의 없지만 정상계주와 중앙계주가 큼직하며, 얼굴은 方形이면서 박력이 넘치는 듯 근엄하게 보인다. 장대한 체구는 건장하게 보이지만 양감은 없으며, 결가부좌한 좌상의 무릎은 유난히 넓고 큼직한 편이다. 下品中生印을 짓고 있는 두 손은 역시 유난히 큼직하며, 통견한 두꺼운 법의는 平行階段式 굵은 주름을 표현하고 있고, 가슴의 내의 상단을 평행적이면서 꽃 모양 주름을 짓고 있다. 좌우의 관음과 세지보살상도 본존아미타불상과 함께 건장하고 근엄한 모습이며, 두꺼운 법의도 본존상과 흡사하지만 머리에 쓴 화려한 보관이나 원만한 얼굴은 다소 다른 면을 보여준다0870)홍사준,<무량사 5층석탑 해체와 조립>(≪考古美術≫117, 1973).

확대보기
<사진 6> 무량사 소조불상(1633년)
<사진 6> 무량사 소조불상(1633년)
팝업창 닫기

 이러한 불상자체의 양식적 특징과 함께 불상을 장엄케 하는 거대한 佛壇과 天蓋의 등장은 크게 주목된다. 특히 거대한 불단이 불전에 배치되어 이 위에 불상을 안치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 명확한 증거가 없다. 15세기 말 내지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이 불단 위에 배치되는 예도 있어서 일단 16세기에 등장해서 조선 후기에 보편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단은 흔히 須彌壇이라고도 부르지만 대체적으로 나무로 된 네모난 方形壇을 설치하고 이 위에 삼존상이나 三佛五菩薩 등을 배치하는데 이들 상은 모두 각자의 대좌를 갖고 있다. 불단은 후불벽을 배경으로 그 전면에 걸쳐 배치하며, 불단 3면은 각기 공간을 구획하거나 구획 안에 十長生 등 각종 동식물을 부조하여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거대하고 화려하며 위엄있는 불단 위에 다시 대좌를 안치하고 그 위에 불상을 봉안함으로써 불상은 범접할 수 없는 높은 佛世界에 안주하는 지고의 존재, 즉 절대자로서 군림하게 된다. 본존과 예배자는 절대군주와 臣民과 마찬가지의 신분격차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게 하고 있으며 이것은 조선조의 정치상과 부합되는 중대한 변모라 생각된다.

<文明大>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