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2. 미술
  • 4) 공예
  • (1) 도자공예

(1) 도자공예

 16세기 전반은 조선 성리학의 발달에 따른 유교문화가 사회전반에 깊이 영향을 주어 鄕約의 보급과 書院의 성립 등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陶瓷에 있어 粉靑瓷는 官御用의 瓷器에서 민간용의 자기로 바뀌어 線刻, 剝地粉靑瓷와 鐵畵분청자(<사진 1>)의 15세기 후반의 양상이 계속 이어지면서 이들 분청자에 사용되었던 귀얄기법과 粉粧기법의 분청자가 주류를 이루면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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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철화분청자
<사진 1> 철화분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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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발굴조사된 光州의 忠孝洞窯‘址의 퇴적층 조사에 의하면,0871)崔熙淳,<光州無等山金谷窯址發掘調査>(≪業績報告書≫서울, 東亞文化硏究委員會, 1964), 57∼60쪽.
金英娞,<朝鮮朝 印花粉靑의 編年的考察-光州金谷里窯址出土品을 중심으로->(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80).
印花분청자에서 귀얄분청자로, 귀얄분청자에서 백자로 변해가고 있는 모습을 퇴적층의 층위에 의해 알 수 있었으며 인화분청자가 쇠퇴기에 들어서면서 잡물이 섞이고 氣孔이 많은 粗質의 자기로 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胎土는 귀얄분청자의 초기엔 대접, 접시 등 모두 쇠퇴기의 인화분청자의 器形과 굽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귀얄분청자는 선각, 박지, 철화분청자에 기본적으로 쓰이는 분장기법으로 귀얄이란 도구를 사용하여 백토를 칠한 후 다른 문양이 시문되지 않고 귀얄의 백토 붓자국만 남는 특징을 보여준다. 대개 분청자의 막그릇에 많이 보이며 백자와 함께 발견되는 예가 많고 거의 전국적으로 출토되며 대접의 경우 포개어 구운 것이 보통이다.

 1501년의<粉靑瓷귀얄弘治14年銘墓誌>와 1536년의<粉靑瓷귀얄鐵畵嘉靖 15年銘墓誌>, 1540년의<粉靑瓷粉粧嘉靖19年銘墓誌>등의 편년자료를 들 수 있다.0872)姜敬淑,≪韓國陶磁史≫(粉靑沙器編年資料, 1989, 一志社), 318∼321쪽.

 따라서 분청자는 크게 象嵌, 인화분청자 중심에서 귀얄, 분장분청자 중심으로 전화되어 갔으며 호남의 선각, 박지분청자와 충남의 철화분청자가 지방적인 특색을 보이면서 상감, 인화분청자의 뒤를 잇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점차 백자화되어 갔음을 전국의 분청자요지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화분청자의 요지에서는 거의 백자를 발견하지 못하는데 귀얄분청자의 요지에서는 白瓷片을 발견하는 곳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器形의 변화를 보아서도 인화분청자에서 귀얄분청자로 다시 백자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전반에 백자의 발달은 더욱 촉진되며 양질의 백자, 청화백자의 제작이 15세기 후반을 이어 더욱 발전해 갔다. 廣州에 설치된 分院으로는 武甲里 분원의 뒤를 이어 鶴東里, 新垈里, 陶水里, 牛山里, 樊川里 등의 지역에서 활발하게 제작활동을 벌여 갔다. 이들 요지에서는 공통적으로 ‘天’ ‘地’ ‘玄’ ‘黃’ 銘의 백자접시, 대접, 사발들과 朝鮮靑瓷, 약간의 靑畵白瓷전접시片, 가는 모래받침의 순백자들이 匣鉢片들과 함께 발견되고 있다. 특히 ‘天’ ‘地’ ‘玄’ ‘黃’ 銘의 요지군은 1470년대에서 1550년대까지의 제작시기를 갖는 것으로 추정되며, 1986년 발굴조사된 廣州 樊川里窯址에서 출토된<1554年銘白瓷陰刻墓誌片>으로 하한을 뒷받침할 수 있다.0873)梨大博物館,≪廣州朝鮮白瓷窯址發掘調査報告-樊川里 6號, 仙東里 2號≫(1986).

 이 시기의 백자편년자료로는 1501년의 白瓷胎缸, 1505년의<白瓷貞壽阿只氏胎缸>, 1528년의<白瓷崇壽阿只氏胎缸>, 1516년의<白瓷李頻墓誌>와 明器들, 1538년의<白瓷朴成樑陰刻墓誌>, 그리고 1508년의<白瓷靑畵淑儀文氏墓誌>등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白瓷靑畵梅鳥紋壺와 甁, 白瓷靑畵雲龍紋甁(<사진 2>), 白瓷飯盒, 白瓷甁, 盞, 대접, 항아리의 뛰어난 백자의 수많은 작품들이 이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1550년대의 광주 번천리 5호요지에서 발견된<白瓷靑畵梅鳥紋전접시편>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들은 가는 모래받침을 받쳐 구운 굽다리에 대접이나 접시의 경우 口部가 넓게 벌어졌고 內底에 넓은 圓刻이 깎여 있으며 釉色은 淡靑白色으로 器形은 풍만한 量感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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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백자청화운용문병
<사진 2>백자청화운용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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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컨대 16세기 전반의 백자는 본격적인 조선 중기의 백자, 청화백자의 세계를 보여준 시기였다. 16세기 전반의 도자는 귀얄, 분장분청자와 백자, 청화백자가 중심을 이루며 분청자의 귀얄, 분장화가 촉진되어 백자화되어 가며, 백자의 세계는 보다 확산되어 官御用 백자제작의 중심지로 광주지방에 설치된 분원이 그 중심 역할을 하였다.

 16세기 후반의 분청자요지에서는 드물게 귀얄분청자, 분장분청자와 함께 백자가 주로 발견되는데 분장분청자와 백자는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器形과 釉色에 있어 닮아가고 있다. 이 시기의 粗質白瓷로 昌原 頭洞里, 河東 白蓮里窯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막사발로, 그 당시 일본에서 茶盌으로 쓰여진 고려다완을 대표하는 井戶다완도 이러한 연질의 조질백자의 한 예이다. 이러한 정호다완계의 조질백자는 요지에서는 분장분청자와 함께 발견되고 있으며 일본에 남아 있는 문헌자료로도 1570년, 1580년대의 도자로 추정되고 있어 주목된다.

 16세기 후반의 백자편년자료로는 1553년의<金以礪白瓷墓誌>, 1554년의 광주 번천리 5호요지 출토의<白瓷陰刻墓誌>, 1559년<韓紀白瓷陰刻墓誌>, 1568년의<白瓷靑畵淑儀尹氏墓誌>, 1569년의<全城君墓誌>와 白瓷壺, 1577년<白瓷鐵畵宗室女李氏墓誌>, 1578년의<白瓷鐵畵鄭大年墓誌>, 1583년의<白瓷鐵畵申世霖墓誌>, 1589년의<白瓷靑畵韓宗冑墓誌>그리고 萬曆年製(1573∼1615)<白瓷靑畵草花七寶紋明器一括>등을 들 수 있다.0874)尹龍二,≪韓國陶瓷史硏究≫(朝鮮陶瓷史年表, 文藝出版社, 1993).

 이들 편년자료를 살펴보면, 1550년대에 白瓷陰刻墓誌들과 1560년, 70년, 80년대에 철화백자, 청화백자의 제작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554년 전후의 광주 번천리 5호요지 출토의 백자 중에서 기형으로는 접시, 대접, 甁, 盒, 馬上杯, 祭器, 壺, 盞 등의 백자와 백자철화희준 그리고 백자청화매화문전접시편이 있다. 이들은 모래받침과 태토빚음받침으로 받쳐 구워졌으며 유색은 회백색, 담청백색의 백자들로 오목굽, 죽절굽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白瓷鐵畵線紋희준, 백자제기 등이 존재하며 철화기법이 사용되고 있는 점과 여백이 있는 청화백자의 매화문전접시 등으로 보아 현존하는 여백이 있는 청화백자의 梅鳥紋甁, 壺 등이 1550년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569년 전성군묘지에서 伴出된 白瓷有蓋壺의 경우 蓮峰形의 꼭지있는 두껑과 안으로 숙여 세워진 口部와 어깨에서 팽창되었다가 좁혀져 세워진 底部의 항아리의 형태는 현존하는 白瓷靑畵梅鳥紋壺(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이 시기를 전후해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0875)鄭良謨,<李朝陶磁の編年>(≪世界陶磁全集≫19 - 李朝 - 東京, 小學館, 1980). 또한 1589년의 廣川君墓誌와 함께 출토된 백자유개호의 예를 통해 현존하는 많은 명기들의 예가 이 시기를 전후로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萬歷年製 白瓷靑畵草花七寶紋明器들(<사진 3>)(호암미술관 소장)의 盒, 托盞, 注子, 壺, 전접시 등도 1580년대의 시기로 추정되고 있어 이처럼 깔끔하고 간결한 초화문과 칠보문 등이 이 시기에 유행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요지로는 廣州 일대의 昆池岩里, 悅美里, 大雙嶺里, 觀音里의 ‘左’ ‘右’ ‘別’ 銘이 출토되는 곳으로 양질의 백자와 그 주변에서 오목굽과 죽절굽의 백자가 출토되고 있다. 현존하는<白瓷靑畵松竹人物紋壺>(이화여대박물관 소장),<白瓷靑畵葡萄紋전접시>,<白瓷鐵畵線紋甁>,<白瓷鐵畵人物紋明器>(호암미술관 소장)의 예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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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백자청화초화칠보문명기
<사진 3>백자청화초화칠보문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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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16세기 후반은 철화백자의 등장과 청화백자의 제작, 분청자의 소멸과 井戶茶盌 등의 조질백자의 제작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17세기 전반은 임진왜란의 막대한 피해를 채 복구하기도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어려움의 시기를 반영하듯 백자 제작도 활발하지 못해 분원조차도 窯場을 쉬기까지 하는 어려움이 있었으며 특히 청화백자의 제작이 靑畵顔料를 구하지 못해 현재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으며 대용으로 鐵砂顔料를 사용하여 제작한 철화백자의 제작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편년자료로는 1609년의<백자사리함>, 1626년의<백자접시형胎誌>와<白瓷仁興君第一女胎壺>, 1627년의<백자접시형태지>와<白瓷仁興君第二小主阿只氏胎壺>, 1632년의<白瓷仁興君第三小主접시>등의 자료와 廣州 일대의 요지에서 발견되는 간지명으로 17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된 요지들을 들 수 있다.

 17세기 전반 백자의 특색을 광주의 요지를 중심으로 알아보면,0876)尹龍二,<朝鮮時代分院의 成立과 變遷에 관한 硏究>(1)(2)(≪考古美術≫149, 151, 韓國美術史學會, 1981). 임란 이후에 처음 설치되는 가마는 1598년에서 1605년경으로 추정되는 亭支里요지로, 출토되는 백자편들은 짙은 회백색의 백자들이 태토빛음눈받침과 굵은 모래를 받친 오목굽의 접시, 盌, 鉢片이 발견되며 드물게 철화백자편이 발견된다. 또한 ‘左’ ‘右’ 銘이 쓰여진 백자의 접시, 대접편이 발견되고 있어 16세기 후반의 백자 器皿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나 임란으로 인한 어려운 생활을 반영하듯 어두운 회색, 회백색의 백자로 거칠게 구워진 모습이다.

 이러한 정지리요지를 이은 가마터로는 炭筏里요지로 ‘丙午’ ‘丁未’ ‘戊申’ ‘己酉’ ‘庚戌’ ‘辛亥’의 간지명이 있는 백자접시, 대접편이 발견되며 유색은 정지리처럼 회백색으로 태토빚음눈받침과 굵은 모래받침 그리고 가는 모래받침의 안으로 숙여진 굽다리의 백자가 제작된 곳이다.<王子仁興君第一女白瓷접시形胎誌>의 굽다리에 ‘丙午右’ 銘이 이 요지 발견의 ‘병오’ 명 접시편과 유색, 굽다리, 字體 등이 똑같아 1606년 탄벌리요지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같이 발견되는 간지명으로 보아 약 1606년부터 1611년 전후로 제작활동의 시기를 알 수 있다. 淡灰靑色의 백자가 주류를 이루면서 처음으로 간지명이 쓰여졌음과 1609년의 백자사리함도 이 요지의 것으로 모래받침으로 구워져 있다.

 1613년부터 1617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활동을 한 鶴東里요지 출토 백자편들도 회백색이 짙은 백자로 주변 요에서는 오목굽의 백자접시, 사발편들이 발견되고 있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20년대의 胎항아리와 胎誌石으로 왕자 인흥군의 제1녀와 제2小主 예의 1626년, 1627년으로 추정되는 ‘丙寅右’ 銘과 ‘丁卯左’ 銘이 있다. 이 두 개의 태항아리와 접시형 지석은 담청회백색의 백자로 항아리의 몸체는 초기에 비해 낮아지고 둥글게 벌어졌으며 두껑은 접시형을 이루었고 굵은 모래를 깔아 제작하여 이 시기의 태항아리와 접시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다음의 1631년부터 1636년까지는 ‘辛未’ ‘癸酉’ ‘丙□’ 銘의 간지가 출토되는 祥林里요지를 들 수 있다. 이 가마터로부터 수집되는 백자는 접시, 대접, 항아리, 제기, 지석편들로 철화의 운문, 글씨 그리고 백자태토의 청자가 함께 발견되고 있다. 담청의 회백자와 회청색 백자가 가는 모래받침으로 제작되었으며, 항아리는 예각의 口緣을 지닌 둥근 모습이었고 띠문이 있는 제기와 햇무리굽의 사발편이 발견되고 있다.

 1640년에서 1649년까지 10년간 제작활동을 하였던 仙東里요지에서는 ‘庚辰’ ‘辛巳’ ‘壬午’ ‘癸未’ ‘甲申’ ‘乙酉’ ‘丙戌’ ‘丁亥’ ‘戊子’ ‘己丑’ 銘의 백자편이 발견되었다.

 출토되는 백자는 사발, 접시를 비롯하여 전접시, 병, 합, 장군, 제기, 明器, 항아리, 扁甁, 대접 등의 다양한 백자편들과 철화의 雲龍, 竹, 梅花, 葡萄, ‘祭’銘의 글자, 지석편의 백자들과 백자태토의 청자접시, 사발, 제기 등이 함께 발견된다. 회백색과 담청색을 띤 백자가 가는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워졌으며 햇무리굽의 사발편도 발견된다. 청화로는 ‘祭’ 명과 원이 그려진 접시편이 출토되어 이 시기의 청화백자에 대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주변의 요지에서는 오목한 굽에 짙은 회백자로 굵은 모래받침에 받쳐 구운 막사발과 접시가 함께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17세기 전반은 담청회백색, 회백색의 백자가 주로 제작되어, 철화의 운용문, 초문, 매죽문이 그려진 항아리, 병과 지석, 그리고 명기류 들이 제작되었으며 ‘祭’ 명이 쓰여진 접시류가 등장하고 있고, 햇무리굽의 사발과 오목굽의 보편적인 모습 그리고 띠문이 있는 簠 등의 제기가 등장한다. 또한 드물게 1640년대의 청화백자가 등장하며 백자태토의 청자가 계속 제작되어 중기 도자의 특색인 회백자에 철화문양 중심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常沙器라고 불리는 굵은 모래받침의 막백자의 제작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져 생활용의 자기로 널리 쓰이게 된다.

 현존하는<白瓷鐵畵雲龍紋항아리>(<사진 4>)와<白瓷鐵畵詩銘竹紋항아리>(이화여대박물관 소장)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백자로서 오목굽의 회백자가 전국적으로 널리 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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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백자철화운용문항아리
<사진 4>백자철화운용문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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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후반의 도자는 백자의 전국적인 확산과 사용 그리고 회백색의 백자에서 乳白色의 백자로 바뀌어 가며 둥근 달항아리의 제작과 철화기법으로 자유롭게 운용문, 초문, 매죽문 등이 시문된 철화백자의 발전과 초화문의 간결한 청화백자의 등장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의 편년자료로는 1656년의<白瓷胎항아리>와 1677년의<白瓷鐵畵詩銘전접시>, 1671년의<白瓷鐵畵韓應寅誌石>, 1696년의<白瓷靑畵金希禹誌石>등과 廣州 일대의 요지 출토 백자자료가 있다.

 1650년대의 요지로 ‘己丑’ ‘庚寅’ ‘辛卯’ ‘壬辰’ ‘癸巳’ 銘이 발견된 松亭里요지를 들 수 있다. 선동리요지에서 출토되는 백자와 거의 비슷하여 담청백색의 백자와 청자, 청화백자, 철화백자의 접시, 대접, 호, 사발, 합, 병 등이 다양하게 발견되며 철화로는 죽, 매, 용, 초문과 청화의 초문 등이 시문된 백자가 출토되어 1640년대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주변 요에서 발견되는 오목굽의 굵은 모래받침의 조질백자의 양상도 비슷하다.

 1660년대의 柳寺里요지에서는 ‘辛丑’ ‘癸卯’ ‘甲辰’ 銘의 백자와 청자, 철화백자도 송정리요지와 같이 발견되고 있다. 햇무리굽의 사발편들과 백자태토의 청자편도 그대로 발견되어 1640년대의 도자의 양상이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670년대와 新垈里요지에서는 ‘甲寅’ ‘丙□’ 銘의 간지명이 발견되고 있으며 백자태토의 청자와 햇무리굽 사발편이 발견되지 않아 주목된다. 회백색, 담청회백색의 백자에 철화로 자유롭게 운용문, 초화문, 국문, 죽문 등이 생략되거나 간략하게 시문된 철화백자의 대표적인 요지이며 이들이 많이 제작되었던 시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주변의 오목굽 모래받침 백자는 계속 제작되었으며 內底에 圓刻이 없는 백자접시나 ‘祭’ 명이 쓰여진 철화백자 접시류가 많아지고 있다. 1677년의<白瓷鐵畵丁巳銘詩銘전접시>는 이 시기의 것으로 보이며 전국의 수많은 백자가마에서 자유롭게 시문된 철화의 초문병, 호들은 이 시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680년대의 요지로≪承政院日記≫숙종 2년의 기록에 보이는 ‘塔立洞分院’은 현재 廣州郡 草月面 池月里요지로 추정되며, 회백자와 담청회백자의 제작이 이루어진 시기로 철화의 ‘甲’ 명과 초문이 시문된 철화백자의 제작이 있었다. 접시 사발, 합, 호, 전접시 등이 계속 제작되지만 백자태토의 청자나 햇무리굽 사발의 제작은 없으며 점차 밝은 백색의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유명한<白瓷鐵畵雲龍紋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소장)처럼 운용문을 대범하게 생략하며 자유롭고 활달하게 그린 철화의 항아리와<白瓷鐵畵虎紋항아리>(<사진 5>)(日本 大阪市立東洋陶瓷美術館 소장)처럼 해학스런 철화의 호랑이 그림 항아리 역시 이 시기의 백자의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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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백자철화호문항아리
<사진 5>백자철화호문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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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90년대의 백자가마터는 확실하지 않으나 점차 회백자에서 유백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시기로 추정된다.

 17세기 후반의 백자는 회백색의 바탕 위에 철화백자의 全盛을 이루어 다양한 철화의 초문, 운용문의 항아리들이 이 시기의 도자의 특색이며 그 절정은 1670년대, 1680년대의 신대리요지, 池月里요지 출토의 철화백자로 뒷받침되고 있다. 특히 1670년대부터는 백자태토의 청자 제작이 사라지고 간지명도 점차 없어지며 햇무리굽의 사발도 사라지고 있다. 둥근 항아리와 그 위에 자유로운 필치로 운용문, 초화문을 그린 항아리들이 널리 제작되게 된다.

 이처럼 16, 17세기 도자의 특색은 분청자의 소멸과 조질백자(井戶茶盌 등)의 등장,0877)尹龍二,<朝鮮陶瓷의 變遷>(≪朝鮮時代陶瓷名品圖錄≫, 德園美術館, 1992), 141∼145쪽. 그리고 17세기에 들어서 전국적으로 굵은 모래받침의 회백자 제작이 널리 성행하며, 관영 沙器工場으로 廣州에 설치된 분원에서의 활발한 백자의 제작, 문헌의 기록에 의한 10년을 단위로 한 가마터의 이동과 출토 백자편의 변화를 알아보았다. 특히 철화백자의 활발한 제작과 회백자, 明器類의 다양한 남녀 인물상과 말, 그리고 소형의 그릇들의 모습과 17세기 말에 들어서서 銅畵白瓷의 등장과 乳白色 백자의 등장은 새로운 조선 후기 백자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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