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2. 미술
  • 5) 건축
  • (2) 도성과 궁궐

(2) 도성과 궁궐

 조선 중기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말미암아 건축물들이 병화로 잿더미가 되었으며 반면 불타버린 건축물들을 다시 짓는 건축공사가 있어 그 어느 시기보다도 건축조영활동이 활발하였다.

 조선 초기 개국과 더불어 축조되고 정비되었던 한양의 도성은 애초 土築으로 되어 있던 부분을 세종 4년(1422)에 돌로 고쳐 쌓아 석축성을 이루었으며 세종 29년에는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도 개축하였다.

 이 도성의 정문 崇禮門[남대문]은 성종 10년(1479)에 중수공사가 있어 立柱上樑되었다. 이후로는 1962년의 완전 해체수리 때까지 중수나 개축의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오늘의 남대문은 조선 초, 중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이 되었다.

 남대문은 장대석바른층쌓기로 커다란 陸築을 쌓고 중앙에 장대석으로 홍예(虹)를 틀어 커다란 문짝 두 장을 달아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육축 위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문루는 중층 우진각집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1층은 내외2출목이고 2층은 외3출목 내2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끝단은 강직한 수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교두형이다.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놓았고,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놓아 장식하였다(<도면 1>).

확대보기
<도면 1>서울 남대문
<도면 1>서울 남대문
팝업창 닫기

 조선 중기에 이루어진 궁궐건축으로는 昌慶宮이 있다. 이 궁궐은 세종이즉위하면서 상왕이 된 태종을 위하여 지었던 壽康宮 자리에 새로이 성종 14년(1483)에 공사를 시작하여 15년에 완공한 離宮이었으나, 역대 많은 임금들이 이궁에서 지낸 조선왕조 삼대 궁궐의 하나이다(<도면 2>).

확대보기
<도면 2>창덕궁·창경궁 배치도
<도면 2>창덕궁·창경궁 배치도
팝업창 닫기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불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는데 성종 때의 배치를 그대로 따르면서 당시의 건축양식으로 지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시대의 궁궐은 남향함이 통례인데 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과 명정문, 궁궐의 정문인 弘化門 등이 모두 동향한 예외적인 궁궐이다. 때문에 광해군 중건 때 이들을 남향으로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만약 남향으로 할 때에는 含春苑 쪽으로 뻗은 남쪽 구릉의 지맥을 잘라내야 하는데 이 지맥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의 內靑龍의 맥이어서 이를 보호해야 함으로 본래대로 동향으로 배치하였다.0880)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서울특별시사고적편≫(1963), 227쪽.
≪光海君日記≫권 92, 광해군 7년 7월 병진·8월 임오.
이 사실은 조선 초기부터 건축에 강한 영향을 주었던 풍수지리설이 여전히 큰 영향을 주어왔음을 알 수 있다.

 창경궁은 동향한 궁성의 정문 홍화문을 들어서면 앞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禁川 위에 세운 금천교인 玉川橋가 있고, 이 다리 건너쪽에 정전의 정문인 明政門이 서 있다. 이 문의 양쪽으로는 月廊이 줄지어 서 있고 양 끝단에서 ‘ㄱ’자로 서쪽으로 꺽이어 뻗어나가 正殿 明政殿을 감싸면서 끝나게 된다.

 명정문을 들어서면 서쪽으로 동향한 정전인 명정전이 자리잡고 있다. 이 명전전의 남서쪽으로 편전인 문정전이 남향하여 있고, 그 서쪽으로 崇文堂이 서 있다. 이들 전각 이외에 동향의 景春殿, 남향한 歡慶殿, 通明殿 등이 서 있다. 그리고 이들 전각들 주위로는 많은 회랑들과 담장들이 둘러 있어 크고 작은 마당들을 이루고 있다.

 정전인 명정전은 광해군 8년 다시 지을 때의 건축양식을 이루고 있는데,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두 단의 높고 넓직한 月臺 위에 장대석 한벌대의 기단을 쌓고 이 위에 다듬은 초석들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으로 다포식 공포를 짜 어간과 협간에는 2구씩, 측간에는 1구씩 놓았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으로 초제공부터 삼제공까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안에서는 翹頭形으로 되어 조선 중기의 공포양식을 보여준다. 내부는 고주들을 측면 어간 앞 쪽 기둥열에 맞추어 세우고 안 쪽 어간에 옥좌를 두었다. 바닥은 방형전들을 깔고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중앙에 寶蓋天障을 만들고 봉황 한 쌍을 나무조각으로 만들어 매달아 놓았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으로 용마루 끝에는 鷲頭를, 합각마루와 추녀말에는 龍頭를, 추녀마루 위에 雜象들을 놓아 위엄을 갖추었다(<도면 3-1, 3-2>).

확대보기
<도면 3-1>명정전 입면도
<도면 3-1>명정전 입면도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도면 3-2>명정전 평면도
<도면 3-2>명정전 평면도
팝업창 닫기

 명정문 또한 명정전과 같은 광해군 때의 건축으로 생각되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어 다른 궁궐의 정전문들이 우진각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다른 특성이 있다.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 다포식공포로, 밖으로 소로만을 두고 외1출목의 첨차들을 생략하였는데 이런 수법은 희귀한 것이다. 살미첨차들은 교두형으로 되어 조선 중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홍화문은 창경궁 궁성의 정문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모습을 이루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중층우진각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 다포식공포로 살미첨차의 바깥단은 명정문처럼 수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교두형으로 조선 중기의 첨차양식을 이루고 있다. 본래 장대석바른층쌓기의 기단을 두고 다듬은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었는데 현재처럼 도로 위에 초석이 놓여진 것은 일제의 의도적인 개작인 것이다.

 通明殿, 숭문당, 환경전 등 기타의 전각들은 모두 창경궁 창건 때 건립되어 인조 때와 순조 때 불타 순조 때 다시 지은 조선 후기의 건축들이다.

 조선 중기에 건축된 궁궐건축으로는 창경궁 이외의 궁에서는 별로 없고 창덕궁의 宣政殿이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