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2. 미술
  • 5) 건축
  • (4) 유교건축

(4) 유교건축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유교관계의 건축이 활발하였다. 유교건축으로는 한양의 문묘와 성균관, 오부학당, 지방의 향교, 서원, 정사들이 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尊賢 공간인 文廟 영역과 講學 공간인 明倫堂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조 6년(1397)에 문묘를 창건한 이래, 세종 때 편액하는 등 정비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 선조 때 다시 짓게 되었다. 大成殿은 선조 34년(1601)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선조 35년에 완공하고, 선조 36년부터 東廡와 西廡를 지어 37년에 완공하였다(<도면 5>,<사진 2>). 또 선조 39년 무렵에 명륜당이 중건되었다.0885)朱南哲,≪韓國建築美≫(일지사, 1983), 366∼372쪽.
≪국역太學志≫(成均館, 1994).

확대보기
<도면 5>문묘 배치도
<도면 5>문묘 배치도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사진 2>대성전
<사진 2>대성전
팝업창 닫기

 대성전은 문묘라고도 하는데, 이 건물 속에는 孔子의 위패를 한 가운데 모시고 四聖, 孔門十哲, 宋朝六賢의 위패들을 좌우에 배향하고, 대성전 앞 쪽 좌우에 늘어선, 동무와 서무에는 중국 名賢 47위와 우리 나라 명현 18위의 위패를 모신다.

 대성전은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다듬은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짜 올린 다포식 건축이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전면에 개방된 퇴간을 두었다. 공포의 양식은 내외2출목으로 바깥단은 강직한 앙서로 안으로는 교두형이며 특히 보머리는 三盆頭形으로 되어 초기의 다포식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의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와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놓고, 또 잡상을 추녀마루에 놓아 장식하였다.

 명륜당은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본단을 세우고, 좌우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헌을 붙여 지었다. 공포의 양식은 본당은 이익공, 양익헌은 초익공이고, 지붕은 본당을 맞배지붕으로 좌우익헌은 끝단에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사진 3>).

확대보기
<사진 3>명륜당
<사진 3>명륜당
팝업창 닫기

 지방의 향교건축으로 조선 중기에 건립된 건축으로는 경주향교, 나주향교 대성전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경주향교0886)朱南哲, 위의 책, 376∼379쪽.의 창건은 고려시대로 전하나, 현재의 건축은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33년에 중건한 것이 전하여 온다. 대성전은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주좌를 쇠시리한 다듬은 초석들을 놓고,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들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식 건축이다. 기둥머리에서 끝단이 수서로 된 헛첨차를 끼워 이 위에 소로를 놓아 출목첨차를 받치고 있다. 주두 위에도 수서로 된 살미첨차를 놓아 출목첨차와 맞물려 짜임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맞배기와지붕이고 활주를 세웠다. 이 향교의 명륜당과 정문의 구조양식이 특이한데, 명륜당에서는 퇴간 안 쪽의 기둥의 공포는 주두 위와 창방 위 주두 좌우에 높은 소로 위에 첨차를 놓고 출목첨차 없이 첩첩이 첨차들만 쌓아 도리를 받치고 있다. 또 정문에서는 기둥에 주두없이 보 머리의 끝단에 기둥굵기로 구멍을 내어 기둥을 끼워 그 위로 도리와 장여를 받치고 있는데 이런 구조는 다른 건축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나주의 문묘대성전은 건축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에 건축된 주심포식 건축이다.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기단 위에 연꽃잎을 조각한 다듬은 초석들을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기둥 옷몸에서 헛첨차를 놓고, 소로를 두어 주두 위로 뻗어 나온 살미첨차와 결구하여 외1출목공포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주상 주두 위에 소첨차와 대첨차를 놓아 외1출목공포를 이루는데 소첨차만으로 도리밑 장여를 받치고 있음이 특이하다. 지붕은 겹치마의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사진 4>).

확대보기
<사진 4>나주향교 대성전과 서무
<사진 4>나주향교 대성전과 서무
팝업창 닫기

 유교건축으로서의 서원건축은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周世鵬이 祠廟를 건립하고 고려 때의 安裕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여, 중종 38년에 白雲洞書院을 건립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명종 5년(1550)에 李滉이 군수로 부임하고 나라에 고하여 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음으로써 賜額書院이 시작되었다.

 소수서원은 서원건축의 초창기 건축이니 만큼 배치에 있어 어떤 체계를 찾아볼 수 없다. 냇물을 바른쪽에 끼고 진입하면 일각대문과 마주하게 되고 이 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어, 그 측면을 바라보게 된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명륜당 북측 측면에 직교하여 남향하고 있고, 사당은 명륜당 서쪽 깊은 터에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하여 있다. 지락재, 학구재, 경판고들이 사당이나 명륜당의 중심 축들과 어긋나게 자유롭게 자리잡고 있음이 초창기의 서원배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앙서로 된 익공을 하나 놓아 결구한 초익공식 공포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서원에서의 존현공간은 사묘만으로 구성된다. 그 까닭은 향교에서는 공자와 사성, 십철 등 여러 현인들의 위패를 봉안하여야 하지만 서원은 건립할 때부터 어느 특정 현인을 향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묘 하나만을 건립하는 것이다. 소수서원에 주향된 현인은 문선공 안유로서, 문선공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전면은 퇴간으로 개방하였다. 공포는 초익공식이다(<도면 6>).0887)朱南哲, 위의 책, 398∼401쪽.

확대보기
<도면 6>소수서원 배치도
<도면 6>소수서원 배치도
팝업창 닫기

 道東書院은 선조 38년(1605)에 金宏弼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였고, 선조 40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의 배치는 서원건축의 정형을 보여준다. 넓은 마당에서 누문을 통하여 들어서면 강학공간이 되고 이 마당의 안쪽에 강당인 중정당이 자리잡고 그 전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강당 뒷쪽으로는 급경사의 언덕이고 여기에 계단이 있어 내삼문에 올라서게 되고 전면에 김굉필의 위패를 주향한 사묘가 자리잡고 있다. 내삼문 좌우로는 담장이 세워져 강당의 좌우로 둘러쌓은 담장과 만나 뒤쪽으로 연장되어 사묘를 둘러싸게 된다. 사묘의 측면에는 경판고가 자리잡고, 그 아랫터 강당의 측면에 교직사가 있어 서원의 살림을 맡아 한다.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중앙 3칸주간이 대청이고 좌우 1칸주간이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다듬은 돌허튼층쌓기한 후 갑석을 놓아 마무리하였으며, 전면 좌우 석계 안쪽으로 龍頭를 조각하여 꽂아 장식하였다. 공포는 외1출목의 주심포식이다. 사당은 단층맞배집으로 주심포식 건축이다(<도면 7-1, 7-2>).0888)朱南哲, 위의 책, 412∼415쪽.

확대보기
<도면 7-1>도동서원 배치도
<도면 7-1>도동서원 배치도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도면 7-2>도동서원 중정당 입면도
<도면 7-2>도동서원 중정당 입면도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