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3. 음악
  • 1) 궁정음악의 전승과 변화
  • (2) 여민락

(2) 여민락

 15세기에는≪세종악보≫에 수록된 것과 같은 與民樂慢과≪금합자보≫의 여민락 같은 與民樂令이 있었다.0908)J. Condit,<여민락의 변천>(≪동양음악논총≫, 한국국악학회, 1976), 231∼264쪽. 그리고 이 여민락과 여민락령은 모두 임금의 행차에 주로 연주되었던 악곡이었다.0909)≪樂學軌範≫권 2, 時用俗部祭樂, 時用賀禮及宴享樂.

 조선 중기의 여민락만과 여민락(令)은≪肅宗實錄≫의 進宴 기록에 더러 보인다.0910)≪肅宗實錄≫권 44, 숙종 32년 8월 임자·권 55, 숙종 40년 9월 정사·권 63, 숙종 45년 4월 경신.
진연 관련연구는 金英峰,<朝鮮朝 儀軌에 나타난 宴禮樂의 變遷>(≪민족음악학≫14, 1992) 참조.
그런데 그 진연의 기록에는 여민락만과 여민락이 초기의 그것처럼 임금의 행차에 쓰였을 뿐만 아니라, 연향에서 呈才반주에도 사용된 것처럼 되었다. 그러므로 일견 이 시기의 여민락만은 舞鼓를, 여민락은 향발무와 광수무를 반주하였던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여민락만도 실제 정재반주로 쓰였을지는 의문이다. 진연의식과 절차 등을 보다 정밀하게 기록한 숙종 45년의≪進宴儀軌≫기록에는 여민락만이 무고정재를 반주하지 않았다.0911)≪進宴儀軌≫(≪한국음악학자료총서≫권 30, 1987), 27∼28쪽.

 조선 중기 여민락만과 여민락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는 어려우나, 여민락만은≪속악원보≫권 5(智)의 기록처럼 선율과 박자가 비교적 단조로운 것이고, 여민락은 그보다 선율이 복잡하고 장단이 뚜렷한 음악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 시기의 여민락이 반주한 향발무는 보허자(령)도 반주하였다. 따라서 여민락은 적어도 보허자와 그 음악내용이나 구조에서 유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여민락과 보허자는 함께≪속악원보≫권 5에 다음<악보 2>처럼 함께 기록되었고, 그 음악이 상호 매우 비슷하다.

확대보기
<악보 2>≪속악원보≫의 여미락관보와 보허자관보
<악보 2>≪속악원보≫의 여미락관보와 보허자관보
팝업창 닫기

 조선 중기의 여민락만은 임금의 행차시에 다음<그림 2>와 같은 편성의 전정헌가로 연주되었을 것이다.0912)인조대의 전정헌가 그림은≪樂學軌範≫권 2, 時用殿庭軒架의 악현을 참고하여 인조대의 인원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시대의 전정헌가는 초기의 그것에 비하여 규모가 상당히 작아진 것이고, 또한 현악기가 빠져서 그 편성내용에서도 초기와 상당히 달라졌다.

확대보기
<그림 2>인조대의 전정헌가
<그림 2>인조대의 전정헌가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