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악후보≫와≪악학궤범≫에 그 음악과 사설이 기록된 조선 초의 北殿은 장가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면 본래의 장가 북전은 사라지고, 새로 짧은 단가 북전이 나타난다.
장가 북전의 大葉 부분이 독립하여 성립된 단가 북전은≪금합자보≫에 만대엽과 함께 처음 기록되었고, 그것은 세개의 旨(후기의 章)로 된 6행의 노래와 짧은 1행의 餘音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 북전은 笛譜를 병기한 만큼 당시 이미 널리 유포되었던 악곡이었다.
≪금합자보≫북전은 사설구조에서는 만대엽과 동일하지만 그 음악은 전혀 다르다. 즉 북전의 악곡구조는 각 3행의 사설을 동일한 2행 길이의 3지에 배분하였고, 음악이 제2강에서 시작한다. 더욱이≪양금신보≫에 기록된 북전은 3대강 악보로 되어서 6대강(16정간) 악보에 기록된≪금합자보≫의 북전과도 그 정간법이 다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북전은 그 박자가 이미 8박자로 된 음악이고, 그 선율이 5박과 8박의 구조로 시작되는 악곡임을 알 수 있다.≪양금신보≫의 북전은 다음<악보 13>처럼 되었다.
처음에는 林鍾宮의 平調북전이 애호된 듯하고, 후에 黃鍾宮의 羽調북전과 계면조 등 여러 악조의 북전이 불려졌고, 각 북전의 머리선율을 변화시키는 제2북전도 파생되어 북전은 그 곡수와 내용이 다양해졌다. 북전은 일명 後庭花로도 일컬어지며 18세기 말까지 널리 연주되다가, 그 선율을 이어받아서 새롭게 대치한 시조가 조선 후기에 대두되면서 사라졌다.0932)황준연,<北殿과 時調>(≪세종학연구≫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6), 115∼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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