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5. 무용·체육
  • 1) 무용
  • (1) 정재무

(1) 정재무

 斥佛崇儒의 정책을 채택한 조선왕조는 고려 때의 燃燈會와 八關會 등은 公儀로서 계승하지 않았으나, 고려 전래의 의례행사들은 그대로 계승하여 고려의 풍속을 살려갔다.

 태조는 즉위 후 고려시대의 관제·법령 등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였으나 樂舞는 개국위업을 축원하기 위한 새로운 노래와 그에 맞춘 呈才가 더러 있었을 뿐 대부분 고려의 것을 답습하였다.

 鄭道傳은 태조 때 조선의 창업을 頌詠한 文德歌를 지었는데 궁중연희에서 자주 연주되었다. 태조는 한양 新宮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 정도전에게 “이 곡은 경이 지은 바니 마땅히 일어나 춤을 추라”고 하니 정도전이 즉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렇듯 문덕곡은 작곡되어 연주되면서 곧 이어 정재로서 제정되었던 것 같다.1008)성경린,≪한국의 무용≫(교양국사총서 24,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130쪽. 또한 태조 2년(1393) 7월 정도전이 夢金尺·受寶籙의 두 신악을 지어 올리고1009)≪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7월 기사. 그 해 10월에는 典樂署에서 정재로 구성되어 궁중 宴儀에서 연출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몽금척은 金尺이라고도 하며 태조가 潛邸에 있을 때 神人이 꿈에 나타나 태조의 바탕이 문무를 겸하고 있으며 民望이 속함을 이르고 금척을 주었다고 한다. 즉 하늘의 뜻을 받아 나라를 건국했다는 것을 樂舞化하였다. 몽금척의 구성은 唐樂呈才 양식을 도입한 춤으로≪樂學軌範≫과 조선 말기의≪各呈才舞圖笏記≫에 전한다. 그리고 수보록 역시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의 일로 한 사람이 智異山 石壁 중에서 異書를 얻어 바친 일이 있었는데, 壬申年 태조 등극에 이르러 과연 그 말이 들어맞은 일을 찬양한 것이다. 수보록은≪악학궤범≫에만 전하며≪각정재무도홀기≫에는 전하지 않는다.

 태조의 금척·수보록과 비슷하나 태종의 사적을 칭송한 것으로는 태종 2년(1402) 6월 河崙이 지어 올리고 樂舞化한 覲天庭과 受明命이 있다.1010)≪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6월 신유. 이른바 전자는 태조의 꿈과 도참의 일이요, 후자는 태종의 行狀의 일임이 약간 다를 뿐이다. 근천정은 태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天庭, 즉 중국 조정에 들어가 황제의 眷禮를 받고 돌아왔는데, 모든 백성이 이 일을 기뻐하여 지은 樂章이다.1011)성경린, 앞의 책, 132쪽. 수보록 등과 함께 會禮·冬至·正朝·9월 養老宴에 쓰였다 한다.

 수명명도 역시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중국에 갔다가 誥命, 休帖, 印章과 冕服 등을 중국의 천자로부터 받아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여 지은 것이다. 근천정과 함께 使臣宴에 쓰였다 한다. 사신연에 주로 쓰였던 것으로는 근천정과 수명명 외에 荷皇恩과 賀聖明·聖澤1012)≪世宗實錄≫권 40, 세종 10년 5월 정축.이 있다. 이 중 하황은과 하성명은 卞季良이 왕명을 받아 지어 올린 것으로 하황은은 세종 원년(1419) 정월에1013)≪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정월 계축. 하성명은 12월에1014)≪世宗實錄≫권 6, 세종 원년 12월 무술. 창제되었다.

 하황은은 태종이 父王의 명을 받아 國事를 받게된 것을 기쁨에 넘쳐 추는 춤이며, 하성명은 태종 때 시작된 聖明을 경축하는 춤이다. 세종 2년(1420) 4월에 太平館에서 중국 사신이 賀聖明歌의 子를 보고 轉寫해 줄 것을 청한 사실에 비추어 후자를 걸어놓고 연출하는 악무였다고 한다. 성택은 임금의 거룩한 恩澤이 사방 모퉁이까지 골고루 빛을 발함을 형상화한 것이다. 성택의 구성은 竹竿子 2인, 簇子 1인, 中舞인 仙母 1인과 左右挾舞 8인으로 이루어 졌다. 먼저 奉簇子·奉竹簇子가 들어와 죽간자의 구호가 있고, 이어 선모와 좌우협무 8인이 들어선 다음, 선모가 조금 앞으로 나서서 致語를 하고 물러나 제자리에 서면 賀聖朝令에 맞추어 聖澤詞를 창한다.

 끝나면 선모와 좌우협무의 北向舞, 다음 선모는 제자리에 있고 협무만의 回旋舞, 이윽고 四方·四隅로 八卦를 형성하면서 서면 선모가 坎妓를 향해 左旋回舞를 시작하고, 坎·震·离·兌 四方妓 4인과 對舞한 다음에는 선모가 艮妓를 향하여 다시 회무를 시작해 艮·巽·坤·乾 四隅妓, 舒手와 더불어 사방기 4인은 斂手足蹈하고 선모와 사우기 4인은 대무를 하고, 끝나면 선모도 협무와 함께 회족무를 추고 돌아와 처음의 대형으로 서면 죽간자가 구호를 부르고, 끝나면 죽간자와 簇子가 물러나고 이어 선모와 협무 8인도 차례로 물러나면 춤이 모두 끝난다.1015)≪世宗實錄≫권 40, 세종 10년 5월 정축.

 이상과 같은 정재를 추어온 사람들은 고려시대에는 女伶, 즉 敎坊의 여제자만이 정재를 추었으나, 조선 초 세종 때부터는 外進宴에는 舞童이, 內進宴에는 여령이 각각 춤을 추었다. 세종 13년(1451) 12월 慣習都監使 朴堧이 會禮宴에 女樂을 쓰지 말도록 상언하여 각 도에서 11세 이상 13세 이하의 어린 남자아이를 서울로 올려 보내게 하여 舞童으로 대체하였다. 그러나 11세부터 13세까지의 어린 소년들이 舞樂을 거쳐 정재를 익힐만 할 때가 되면 이미 체모가 건장하여 오래 쓸 수 없는 폐단이 생기자, 8세 이상 10세 이하로 나이를 낯춰 뽑았다. 이른바 이 무동들은 고종 때까지 外宴에서의 정재를 담당하였다.

 세종 27년 4월 權踶·鄭麟趾·安止 등이≪龍飛御天歌≫를 지어 올렸는데 이 노래를 부르며 추는 정재로 鳳來儀가 있다.≪世宗實錄≫에 실린 봉래의에 관한 악보를 보면 前引子·進口號·與民樂·致和平·醉豊亨·後引子·退口號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竹竿子가 나가 진구호를 부르고 좌우로 벌려 서면, 舞妓 8인이 折花舞로 나갔다가 八手舞로 물러나 여민락령의 반주로 龍歌의 海東章을 노래하고 이어 根深章·源遠章·昔周章·今我章·狄人章 다음에 右旋·回舞에는 野人章에서 千世章·子子章·嗚呼章까지를 繼唱하고, 끝나면 四方作隊인체 모두 북쪽을 향하고, 이번에는 치화평 三機를 노래하는데, 이것은 용가의 우리말 노래가 된다. 이 춤은 祖宗積累의 심원함과 綿造의 가난함을 표현한 것으로 주악으로는 唐樂과 鄕樂을 섞어서 연주하나, 致和平舞와 醉豊亨舞로 변할 때에는 향악만 연주한다.

 男樂과 女樂이 있으며, 다른 향악정재는 엎드려 俛伏하여 시작하고 끝나지만 이 봉래의는 奉竹竿子 두 명과 무기 8인이 나와서 정위치에 서면 곧 춤이 시작되는데, 주악과 拍의 소리에 맞추어 절차를 따라서 구호와≪용비어천가≫를 부르며 足蹈·對舞·背舞·回舞를 하다가 치화평무로 바뀌어 죽간자가 처음 위치에 오면 춤이 끝나는 것이 다른 향악정재와 다르다. 이 춤은 아름다운 무작보다도≪용비어천가≫의 노래를 수도 없이 불러대는 가무의 압권이라 할 것이다.

 한편 정재 중에는 왕이 친히 지은 악무가 있는데 保太平과 定大業이다. 이 두 정재는 세종 29년 조종의 문덕을 기리기 위하여 직접 창작하여 會禮樂으로 쓰던 것으로, 세조 9년(1463)에는 崔恒으로 하여금 가사를 줄이게하고1016)≪增補文獻備考≫권 94, 歷代樂制 4.
≪世祖實錄≫권 31, 세조 9년 12월 을미.
樂調도 줄이게 하는 동시에 林鍾平調를 黃鍾平調로 바꾸어 세조 10년 정월부터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는 변화를 갖는다.1017)≪世祖實錄≫권 48, 樂譜舞圖附考定. 이 중 보태평은 文舞로서 왼손에 籥을 들고 오른손에 翟을 들고 36명이 추는 춤이며, 정대업은 武舞로서≪악학궤범≫에 의하면 각종 儀物을 든 35명이 동·서·남·서쪽에 도열한 가운데서 36명이 칼과 창과 弓矢로 춤추는데, 특히 宣威에서는 曲陣·直陣·銳陣·圓陣·方陣 등의 진법에 의하여 춤춘 점이 주목된다.1018)成 俔,≪樂學軌範≫권 5, 123쪽.

 이와 같이 진법에 따라 추던 정대업 중 선위의 진법구성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변모되며 진법에 의한 佾舞는 없어지고 전 과정에 있어서 칼과 창만 들고 추게 되었다. 보태평과 정대업의 舞譜는 조선 말기의≪時用舞譜≫에 전한다.

 다음으로 曲破는≪高麗史≫에 언급되어 있으나, 樂志에 춤의 절차에 대한 기록은 없고,1019)≪高麗史≫권 71, 志 25, 樂 2.≪惜奴嬌曲破≫에 樂詞만 전하고 있다. 曲破呈才는 오래 쓰이지 않아 아는 이가 없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1020)≪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9월 계축.≪악학궤범≫에 전하는 곡파정재는 그후 再演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고려사≫악지에는 보이지 않고,≪악학궤범≫에만 그 춤의 절차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세조 말엽이나 성종 때에 창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六花隊는 여섯 가지 꽃을 상징하는 6인의 舞妓와 致語人 1인, 죽간자 2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죽간자가 問花心詞를 부르면 치어인은 花心答詞로 대답하는 문답식의 和唱을 하는 것이 이색적이다.

 이 밖에 조선시대를 걸쳐 빠지지 않고 가장 많이 즐겨 추던 춤인 響鈸과 鶴舞·蓮花臺舞·處容舞가 종합된 鶴蓮花臺處容舞合設, 그리고 임금이 대궐로 돌아올 때 大駕의 행로에서 베풀어졌던 敎坊歌謠 등이 있다.

 향발정재는 향발이라는 작은 타악기를 좌우수 모지와 장지에 매고, 장단에 맞추어 이를 치면서 추는 춤이며,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儺禮 때 추던 장엄한 의식절차이던 것으로 이 중 학무는 교방가요에서도 추어지는 정재이다.

 특정한 춤은 아니나 임금이 궁궐로 돌아올 때 임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의례적으로 演行되었던 교방가요는 화려한 설비를 갖추고 바닥에는 바퀴 4개를 달아 끌고 다녔으며, 1백 명의 여기가 동원되었다. 大駕가 대궐에 들어가기까지 가요와 학무, 연화대, 금척 등이 이어진다.

 이상과 같이 건국 초부터 쌓아올린 악무의 제도는 성종대에 와서≪악학궤범≫의 편찬으로 완전히 꽃피우며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안정된 정치와 문화의 성시를 이룬 성종대와는 달리 향락과 폭정을 일삼아서 국가의 질서는 몹시 어지럽고 문화는 날로 퇴폐하여 졌다. 연산군은 성균관을 폐하여 이 곳을 宴樂의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원각사를 폐하여 승려를 내쫓고, 掌樂院을 聯芳院으로 개칭하여 여기들을 이곳에 머무르게 하였다.1021)성경린, 앞의 책, 162쪽. 따라서 궁녀의 수가 막대하였고 처용무를 기생으로 하여금 전습케 하였으며, 왕이 친히 豊頭舞라 전해지는 假面舞를 추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향락은 결국 中宗反正을 불러왔다. 중종이 즉위한 후에는 연산군 때의 기녀들을 찾아 처벌하였고, 기승을 부렸던 여악에 대한 시비가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중종 2년(1507)에는 成希顔의 상언으로 內宴에서만 여악을 쓰도록 하고 正殿會宴에는 여악을 쓰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중종 5년에는 각종 연례악을 새로이 제정하였는데, 이에 쓰이는 정재는 태종 때 제정한 것과 거의 같다.1022)성경린, 위의 책, 164쪽.

 선조 때는 임진왜란으로 악무가 잠시 끊어지고≪악학궤범≫이 불타기까지 하였다. 그 뒤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고, 악공과 악생들이 죽거나 포로가 된 자가 많아 각종 제사에까지 악무가 쓰이지 못하였다.

 인조 25년(1648) 정월, 종묘 春享大祭에 다시 음악과 무용이 쓰이기1023)성경린, 위의 책, 167쪽.까지 10년의 기간이 걸렸다.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초의 악무는 고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조선의 예악이 부흥 정리되었으나 연산군으로 이어지는 조선 중기의 악무는 연산군의 문란한 폭정과 두 차례의 난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던 각종 呈才舞들이 간소화되고 중단되는 상태에 이르러, 조선 중기의 정재무는 영·정조 때 퇴폐한 악무를 부흥하고자 노력하기까지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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