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5. 무용·체육
  • 1) 무용
  • (4) 광대 소학지희

(4) 광대 소학지희

 조선시대의 산대나희에서 주목할 것은 위에서 살펴본 규식지희와 가무뿐만 아니라 잡희, 창우지희 또는 배우희라고 불리던 소학지희의 活劇的 전개일 것이다. 고려의 조희 이래로 직업배우에 의한 여러 가지 소학지희가≪조선왕조실록≫과 기타의 문헌에 보인다.

 세조 10년(1464) 12월 나례 때에 逐疫優人이 있어 잡희로써 스스로 문답하여 탐관오리와 항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거리낌 없이 연출하였다고 하였고, 또 세조 14년 5월에는 본시 우인이던 冶匠 高龍이 ‘盲人醉人之狀’을 잘 놀았다고 한다.

 연산군 5년(1499) 12월에는 孔潔이란 배우가 나례 때에 李紳의 悶農詩를 읊고, 또 三綱領八條目 등을 논하여 몹시 무례하였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杖60에 驛卒에 속하게 하였다.1040)≪燕山君日記≫권 35, 연산군 5년 12월 갑인.

 연산군 11년 12월에는 孔吉이라는 배우가 이상적인 군주는 만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야 언제든지 있게 마련이라는 내용으로 소학지희를 벌이다가 매를 맞고 귀양갔다. 연산군 같은 暗主에 대하여 당시의 배우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한 사실을 이로써 알 수 있겠다.

 또 중종 22년(1528) 12월에는 나례 때 정재인으로 하여금 民間疾苦와 救荒절차를 놀이로써 연출케 한 사실도 보인다. 중종 때의 魚叔權의≪稗官雜記≫에는 定平府使 말안장 사는 놀이와 巫稅布 놀이가 소개되어 있다. 첫째는 중종대의 정평부사 具世璋이 탐욕이 심하여 한번은 말안장 장수를 불러들여 여러 날을 두고 값을 깎고 흥정하다가 마침내 官貨로 말안장을 사들였다. 그 모양을 배우가 歲時에 御庭에서 놀이로 놀아 왕이 정평부사의 장죄를 다스리게 되었다. 둘째는 관부에서 거둬들이는 무세포가 너무 심하여 매번 收稅吏가 오면 巫家에서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며 그 기한을 늦추려고 야단법석을 떠는데 그 모양을 배우가 역시 세시에 어정에서 놀이로 보여주어 왕이 무세를 면제하여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놀이들은 모두 사회비판을 보여준 놀이들인데 어숙권은 “배우도 능히 貪汚를 彈駁한다” 또 “배우도 백성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평하고 있다.1041)魚叔權,≪稗官雜記≫권 2.

 이와 유사한 사회풍자놀이는 필자미상의≪芝陽漫錄≫에도 있다. 명종 22년(1567)의 일로, 왕이 창우희를 구경하였다. 배우가 都目政事 즉 벼슬아치의 성적을 평가하여 벼슬자리를 떼어버리거나 더 좋은 데로 승진시키거나 하던 일을 놀이로 보여주었다. 즉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서로 못난 조카와 사위에게 情實을 쓰는 내막을 연출함으로써 왕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상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15∼16세기의 광대 소학지희는 배우들이 일정한 인물과 일정한 사건에 관련된 주제를 전개하는 연극을 연출하였고, 그것도 獨演形態만이 아니고 다수의 등장인물에 의하여 사회비판이나 시사풍자의 내용을 명절이나 군중들이 모이는 시기에 보여주었으며 궁중의 나희에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