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5. 무용·체육
  • 2) 체육
  • (1) 성균관에서의 대사례

(1) 성균관에서의 대사례

 고대 중국에서의 射禮에는 大射禮·賓射禮·燕射禮·鄕射禮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주연이 베풀어졌다. 대사례에서는 군신의 예를 갖추고 향사례에서는 장유의 차례를 분명히 한 다음 활을 쏘았는데 이러한 행사에는 덕이 있는 자의 선발, 제후가 추천한 선비의 시험, 군신 상호간 禮와 樂을 배우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러한 중국의 사례는 조선시대 이전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사료의 미비로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성균관에서 대사례를 실시한 기록이 성종 8년(1477)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성종 8년 왕이 대학에서 大射를 행하고 列邑에서 飮射禮(鄕飮禮와 鄕射禮)를 하라고 명한 것이 그 시초로 되어 있다.1050)韓基彦,≪韓國敎育史≫(博英社, 1983), 124쪽. 성균관에서 생활은 학업과 덕행의 연마가 주된 목적으로, 과거준비를 위한 과정도 포함되기도 하였지만 그 생활 자체는 전통적 선비의 육성에 있었다. 이 점에서 유생들의 弓射 활동이 주목된다.

 대사례에 사용되는 궁은 禮弓 또는 角弓이며, 화살의 길이는 三尺이고 깃은 매우 크다. 또한≪論語≫에는 “군자는 다투는 일이 없으나, 활쏘는 데만은 예외다. 활쏘는 곳에 올라가고, 내려오고, 술마시고 할 때에는 서로 揖하고 사양하고 하니 활쏘는 데 다투는 것은 君子답다”1051)≪論語≫권 3, 八佾. 라고 하여 예를 갖추고 실시되는 활쏘기만은 군자가 할만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말한다. 이는 활쏘는 활동 자체보다도 행동에 미덕을 갖추도록 하는 내용의 말이다. 또한 “활쏘는 데는 과녁 뚫는 것을 주로 하지 않는다”1052)위와 같음.고 한 것은 사람의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인데 이것은 옛날의 활쏘는 방법으로 마음자세를 주로 하고 힘을 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태도를 이용한 한 예로 신라시대에는 弓箭法으로 인재를 등용하였고, 중국에서는 활쏘기를 가지고 그 사람의 덕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다 하여 관리를 선발할 때 이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갖추어서 하는 활쏘기에는 大射·賓射·燕射·鄕射가 있는데 대사의 규모가 가장 컸다. 대사에서는 나라에 제사가 있을 때 참례시킬 사람을 뽑는데 많이 명중시키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뽑히므로 군자는 궁술을 다투게 된다. 그러나 昇降飮酒 등의 절차에 여전히 揖讓을 하여 군자의 미덕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다.1053)車柱環,≪東洋의 智慧≫(乙酉文化社, 1972), 19쪽. 또한 이 대사는 많이 명중시키는 사람을 선발하기 때문에 경기적 의미를 갖는 활쏘기 대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의를 지니는 활쏘기가 성종대에 실시된 것과 대사례를 관장하는 六一閣의 존재는 성균관의 유생들에게도 활쏘기의 기회를 부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상류층의 자제들이라 육예의 소양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할지라도 대사례의 경쟁적 성격상 개인적인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바침 할 수 있는 자료의 예를 들면 洪敬孫이 소년시절 성균관에 있을 때 지은 發願詩로 “李石亨은 글을 잘 써서 亨書라 하였고, 曺棨는 활을 잘 쏘아 善射라 하였으며, 李仁堅은 연소한 사람으로 등과하여 이름을 날렸다”1054)成 俔,≪慵齋叢話≫권 6.는 구절이 있는바, 이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모범이 될 대상인을 선정하여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조계가 활을 잘 쏘아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은 활쏘기도 그들이 갖추어야 할 하나의 목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비형식적인 절차라도 활쏘기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만약 성균관의 생활에서 활쏘기의 기회가 없었다면 그들은 활을 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學令을 보면 매월 8일과 23일에는 모든 諸生들이 집에 돌아가 의복을 세탁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 날은 친지와 옛 벗을 만나보되 활쏘기, 장기와 바둑, 사냥, 구경, 낚시질 등 그 밖의 유희를 일삼아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기는 자는 벌준다고 한다.1055)韓國敎育史硏究會編,≪韓國敎育史≫(敎育出版社, 1984), 129쪽. 성균관 밖에서의 행동규칙에 활쏘기를 금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사례에서 과녁을 많이 맞추기는 커녕 활 시위조차 잡아당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형태가 되었던지 간에 활쏘기는 실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성균관에서의 활쏘기는 오늘날 학교체육의 목적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 실행 방법을 현대적 의미로 풀이한다면 잠재적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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