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5. 무용·체육
  • 2) 체육
  • (3) 방희

(3) 방희

 擊毬는 고문헌에 打毬·擊毬·抛毬·杖毬·棒戲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바 조선시대의 격구는 말을 타고 실시하는 騎馬격구와 徒步격구로 나누어서 파악할 수 있다.

 문헌상으로 볼 때 양쪽 모두를 ‘擊毬(打毬)’로 기술하고 있지만 내용으로 판단하여 보면 전혀 다르며 도보격구는 오늘날 골프경기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15세기의 朝鮮王朝實錄에는 ‘棒戲’로 나타나며 이 경기는 중국의 ‘捶丸’과 내용이 같다.

 중국에서 추환이 유행한 때는 宋代로 당시에 이미 경기 방법 및 용구에 대하여 서술한 丸經이 있었다 한다. 이는 경기의 분포가 넓었음을 대변하여 주는 것이고 이 경기는 元代에도 계속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이미 격구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활발히 전개된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추환도 유사한 도입경로를 거쳤을 것으로 추측되나 문헌상 확인할 수는 없다.

 이 방희에 대한 기록은≪世宗實錄≫에 처음 나타난다. 조선 초기의 기록이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태상왕과 왕은 날씨가 매우 추워서 교외에 나가지 못하고 신궁의 내정에서 打毬를 하였다. 내년 봄에 이르러 그친다. … 격구의 법은 分曹하여 승부를 겨룬다. 棒은 狀匙같고, 크기는 손바닥만 하다. 물소의 가죽을 써서 이를 만들었다. 두터운 대로 자루를 만든다. 공의 크기는 계란만 하고 碼 혹은 나무로 만든다. 땅을 파서 주발만한 구멍을 파는데 이를 窩兒라고 한다. 혹은 전각을 사이에 두고 혹은 계단 위에 혹은 평지에 구멍을 만든다. 치는 사람은 혹은 무릎을 꿇고, 혹은 서서 棒으로 공을 치는데 毬는 騰越, 斜起, 輪轉하기도 한다. 毬가 구멍에 들어가면 점수를 얻는다. 규칙이 대단히 복잡하다(≪世宗實錄≫권 14, 세종 3년 11월 갑신).

 이와 같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경기의 용구, 경기장, 경기법의 개요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등월, 사기, 윤전 같은 용어는 毬의 구질을 설명하는 것으로 오늘날 골프에서의 런(Run), 스라이스(Slice), 훜(Hook) 등과 대비가 된다.

 ≪世祖實錄≫에는 이보다 더 상세한 내용이 있다.

격구법은 수인 혹은 10인 또는 수십 인을 좌우로 나누어서 승부를 겨룬다. 棒의 모양은 손바닥 크기의 匙와 같고 대나무와 물소 가죽으로 만든다. 가죽이 엷으면 공이 높이 뜨고 두꺼우면 공이 높이 뜨지 않는다. 또한 兗棒이 있어 毬를 치면 뜨지 않고 구른다. 구는 나무 혹은 碼를 쓰고 크기는 계란같다. 땅을 파서 주발만한 구멍이 위치한 곳의 형편에 따른다. 한 번 쳐서 들어가지 않으면 구가 멎은 곳에 따라 두세 번 이를 쳐서 들면 1점을 얻는다. 한 번 쳐서 들어가면 다른 구를 칠 수 없으며 그만 둔다. 이후는 같다. 한 번 친 구가 다른 구에 닿으면 그만둔다. 이후 역시 같다. 혹은 서서 치고 혹은 무릎을 끓고 친다. 규칙이 매우 많다(≪世祖實錄≫권 2, 세조 원년 9월 경진).

 이 기록들을 통하여 보면 경기의 인원(경기규모), 봉의 형태 및 제작법, 공의 제작법, 경기장 시설법, 봉의 용도 및 특성, 득점법, 경기규칙, 그리고 경기가 주로 실시되는 시기를 알 수 있으며 이는 현대의 골프경기와 거의 같은 형식임을 알 수있다.

 특히 태종 때에는 惠正橋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打毬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1057)≪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2월 기묘. 이는 이 시대에 방희가 상류층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까지 폭넓게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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