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6.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1) 시대배경 및 의생활

(1) 시대배경 및 의생활

 조선 중기의 의생활 제도는 몇 편의 문헌자료와 실물에 의해 참조된다.

 문헌은≪朝鮮王朝實錄≫과 특히 성종 5년(1474)에 반포된≪經國大典≫및≪國朝五禮儀≫가 있다. 중기 明代까지는 中國制를 받아들이지만 淸代부터는≪大明會典≫을 근거로 제작, 수급하였다. 물론 官服制度는 삼국통일기부터 시작된 請賜 및 賜與에 의해 실시되어 오던 ‘二等遞降原則’ 준수를 기반으로 하지만, 일반인들은 국속을 고수한다. 따라서 국속과 중국제를 혼용하는 ‘이중구조’는 계속되면서 前期에 거추장스러웠던 옷은 임진·병자 양란 이후 기능적이고 활동적인 옷으로 바뀌고 차츰 便服과 笠制의 국속화가 정착되는 기틀이 마련된다.

 실물은 出土遺物1058)조선시대 출토유물 복식자료는 단국대학교 石宙善記念民俗博物館을 비롯하여 충북대학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온양민속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도 단국대학교에 가장 많다.이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는 1960년대 이후부터 새 도시건설 등으로 인해 墓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수습된 것들이다. 이것들은 墓主의 연대나 신분이 뚜렷할 뿐더러 유물의 형태나 옷감·무늬·바느질법에 이르기까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 매우 정확한 資料原이 된다. 다만 색상은 대부분 누런 ‘緗色’으로 변한 상태로 출토되기 때문에 색채 구별이 어렵다는 취약점이 있다. 출토물은 보통 의류 20∼50점 씩 나오는데 墓主의 신분이나 세력에 따라 수량이나 옷감·문양 등이 다르다. 상류층은 수량이 많고 옷감도 중국산 비단류가 많다. 아래 계층일수록 수량이 적으면서 옷감은 대부분이 國産 명주나 무명이고 솜옷과 솜이불류가 많다. 예를 들면 왕족인 耽陵君(선조의 증손;1636∼1731)이나 淸衍郡主(思悼世子의 女;1754∼1821) 묘의 출토물 가운데서 옷에도 솜옷은 없고 모두 홑이나 겹이며 옷감도 무늬와 재질이 좋은 중국 비단류가 대부분이다. 수량도 탐릉군은 70여 점이나 되고 청연군주는 남편과의 合葬墓에서 의류와 부장품이 약 200여 점이었다.1059)石宙善,≪韓國服飾史≫(寶晉齋, 1971), 145쪽. 반면 경북 達城에서 출토된 평민이었던 晉州河氏(1580∼1646) 것에서는 70여 점 중에서 60여 점이 무명이었으며, 거의 다 솜옷이나 솜이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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