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6. 의식주 생활
  • 3) 주생활
  • (1) 주거의 계층적 특성

(1) 주거의 계층적 특성

 조선 중기에 이르러 士林 중심으로 사회체제가 정비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사회계층에 따라 주거 계층이 재편성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봉건사회에 있어서 사회의 계층적 배타성은 계층에 따라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차별성을 수반함으로써 주거 계층을 한정하였음을 보아 왔다. 따라서 고려왕조의 문벌귀족사회로부터 조선 전기의 과도기를 거쳐 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림 중심의 양반사회가 정착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체제로부터 수반되는 주거 계층이 정착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거 계층의 재편 과정은 가사규제의 개정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선 전기의 건축에 관한 규제가 태조 4년(1395)에 성립된 家垈制限으로 부터 시작되었다면 그 이후 여러 차례의 개정과 보완을 거쳐 거의 1세기에 가까운 성종 9년(1478)에 와서야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된다. 개국 초에 제정된 가사규제가 일관되게 지속되지 못하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개정되는 것은 일부 세력가들이 이를 위반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 전기에는 아직 양반관료사회의 특성을 갖춘 주거 계층이 정착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성종 9년에 개정된 가사규제의 내용이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볼 때,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새로운 주거 계층이 정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이전에 어떠한 주거 계층이 편성되어 있었고, 각 계층별 주거의 특성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고려시대의 주거 계층을 확인할 만한 실증적 유구나 문헌자료 등이 극히 희소하고, 특히 주거 계층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가사제도의 내용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의 사회구조를 참고할 때 소수의 문벌귀족들이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를 독점하였고, 대다수 평민계층은 농노와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보여지기에, 이에 따라 주거 계층도 양극화되어 있었다고 추측될 뿐이다.

 이러한 주거 계층이 사림 중심의 양반사회가 정착되면서 보다 세분화되고, 계층별 성격도 변화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조선 개국의 주도 세력이었던 신진 사대부들이 지배층으로서의 특권을 향유하고, 세습을 통하여 특권이 유지됨으로써 신분의 배타성이 강한 양반관료사회를 형성하였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양반 안에서도 관료계급이나 경제력에 따라 차별이 발생하고, 중인과 농민계층의 사회적 지위 및 경제력이 향상되었음을 상기할 때, 조선 중기 주거 계층은 보다 세분화되고 다양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중기 주거 계층은 대략 4개의 계층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것은 상위 지배계층으로서 양반과 하위 지배계층으로서의 중인, 그리고 피지배 계층인 양인과 최하층 구성원인 천인이었다. 이들을 독특한 주거 계층으로 분류하는 것은 단지 양반관료사회 속에서 신분상의 우열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신분에 따라 사회적 권력이나 경제력의 우열이 가름되기도 하지만, 각 계층의 주거가 차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활이념이나 생활방식의 차이가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예를 들어 양반계층은 유학을 공부하여 관료로 입사하는 사대부 계층으로서 유교적인 생활이념과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생활을 구현하기 위한 주거 형태가 우선적으로 요구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생산계층이었던 양인들은 유교적인 생활방식보다는 생산성을 증진시키는데 효율적인 주거 형태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물론 신분에 따라 가사제한이 차별적으로 적용되었고 경제력에도 차이가 있어, 주거 형태를 만드는데 제한적인 요소로 작용하였겠지만, 기본적으로 계층마다 주거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가 달랐을 것이다. 따라서 각 계층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경제적 조건과 그들의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주거에 대한 요구를 종합해 보면 조선 중기 주거 계층은 다음과 같이 분류되고 각각의 특성을 가졌다고 보여진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기본적으로 유학을 공부하는 사대부 계층이었다. 양반사회가 정착됨에 따라 양반들은 관료로 등용될 수 있는 정치적 특권을 소유하여 지배계층을 이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科田을 통한 田租의 징수, 사유지의 竝作半收制 경영 등을 통하여 경제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양반들은 자신들의 유교적 생활방식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고, 지배계층으로서의 권위를 표현할 수 있는 주거를 건설할 수 있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관료계급의 상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사규제에 따른 건축적 규제를 덜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보다 규모가 크고 장식적인 주택을 만들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주거는 일반적으로 ‘양반 주거’ 또는 班家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조선 중기 반가가 그 이전 시기의 상류계층 주거와 크게 구별되는 것은 유교적 생활문화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말에 신흥사대부들을 통하여 도입된 성리학적 사회윤리는 사대부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가치 덕목으로 기능하였다.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주거는 修身과 齊家를 이루기 위한 場이었기에, 그러한 주생활을 담을 수 있도록 건축되어야 했다.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치르기 위한 공간의 구성, 內外의 구별, 長幼의 구별, 학문 연구를 위한 공간 등은 조선 중기 반가에서 보여지는 일반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양반사회에서 중인들은 대부분 서얼 출신으로서 하위 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잡과를 통해 등용되는 기술 관직이나 문관의 하급관리인 서리와 무관의 하급관리인 군교 등의 직을 세습하며 담당하였다. 그러나 문무 양반과는 달리 승진의 한계가 있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간 계층에 속하기 때문에 가사 규제의 범주 안에서 양반 주택을 모방하는 주택의 성격을 취하였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다만 직무의 성격으로 볼 때 대부분 행정기관이 위치하는 읍성 안에 거주하였음이 분명하고, 주로 비농업적 활동에 종사하였다고 추측된다. 따라서 인구가 밀집하여 대지의 제약을 받는 읍성 안에서 생산 공간이 약화된 주거가 만들어졌다면 이는 다분히 근대 도시 주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실증적인 유구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이와 관련한 연구도 적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을 복원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조선사회의 양인은 농·공·상업에 종사하는 기층 구성원을 일컫지만 절대 다수가 농민들이었다. 양인계층은 국가에 대하여 전조·공물·부역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으며, 신분적으로는 양반층의 지배를 받았다. 물론 고려 후기로부터 농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여 중소지주나 자영농민도 발생하였으나, 조선 중기까지 대다수의 농민은 타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佃戶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가사규제에 의해 주거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권위의 표현이나 유교적 생활방식보다는 농업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주택이 필요하였고, 지역의 자연환경에 경제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주거 형태와 건설 방법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주거를 상류 계층의 주거인 ‘반가’와 대립되는 용어로써 ‘민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 중기 이전의 농민계층 주거와 비교할 때 발전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농업 기술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주거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비교적 소수이기는 하지만 중소지주나 자영농들로 성장한 양인들은 가사규제의 범주 안에서 주거 수준을 높여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거는 권위적인 요소보다는 생산적인 요소를 발전시켜 주거 안에 생산과 관련한 부속 공간들이 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이후 사족에 의한 대농민 지배의 강화와 유교적 생활문화의 확산에 따라 제한적으로나마 유교적 생활에서 요구되는 공간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조선사회에 있어서 천민계층은 주로 노비계층을 일컫는다. 사노비 중에는 상전의 집에서 기거하며 농경과 가내 잡사에 사역되는 率居奴婢가 있었고, 상전의 집 밖에 거주하면서 身貢만을 바치는 外居奴婢가 있어 독특한 주거 계층을 형성하였다. 솔거노비는 양반주거내에 포함되어 일정한 생활 영역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립된 주거 계층으로 볼 수 없다. 그들의 생활 영역은 대부분 양반 주택의 전면 외곽에 위치하는 ‘행랑채’나 ‘대문채’에 부속되어 있었다. 또한 ‘사랑채’나 수장 공간을 경계로 하여 주인의 거처인 ‘안채’와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주거 외부로부터 주인을 보호하고, 노비들에 대한 주인의 권위를 지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외거노비는 비록 독립된 주거를 소유하고는 있지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들의 상전인 양반계층에 예속되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활공간만으로 이루어진 주거에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반가의 인근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주거를 ‘가랍집’ 또는 ‘호지집’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부엌과 하나의 침실로 구성된 단순한 주거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주거의 모습은 그 신분적, 경제적 양태로 볼 때 조선 중기 이전 지배계층의 농장에 예속되어 있었던 전호의 주거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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