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6. 의식주 생활
  • 3) 주생활
  • (2) 유교적 생활문화의 확산과 주거 공간의 분화

가. 가묘 건립의 확산

 고려 말에 신흥사대부들로 등장했던 유학자들이 조선시대의 양반계층을 이루면서 사회의 지배계층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들은 고려 후기로부터 수용되기 시작한 성리학에 자신의 학문적 이념이자 사상의 뿌리를 두고 있었다. 성리학은 본래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理氣論을 통하여 하나의 통일적 원리로 파악하는 철학적인 유학이었다. 성리학은 특히 人倫, 즉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의 윤리를 중히 여기는 사상으로 사대부들은 이러한 사회윤리로 사회를 교화시켜야 항구적인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나라를 다스리기에 앞서 자신과 가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던 사대부들의 생활이념과 규범은 가정생활에 있어서 새로운 생활문화를 이루어 갔다. 三綱五倫은 사회 속에서 지켜야 할 인간관계의 가치 덕목이었으며, 朱子家禮는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의례의 기준이었다. 이러한 규범들을 실천하고 의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주거생활의 방식이 요구되며, 주생활의 변화는 주거 형태의 변화를 수반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교적 생활문화와 그에 따르는 주거 형식이 정착되어 갔으며, 그들이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성장하는 조선 중기 이후로부터 일반 민중에게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유교적 생활문화의 정착과 확산에 따라 주거 안에서 이루어진 변화 중에 첫번째는 家廟 건립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가묘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주택 안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정의할 있다. 충효사상은 성리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치덕목으로서 선조에 대한 제사는 이를 실현하는 중요한 실천적 규범이었다. 가정에 있어서 사대부들의 핵심적인 생활 행위가 ‘손님을 맞이하고 제사를 모시는 것(奉祭祀 接賓客)’이듯이 제례는 모든 가정의례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이다. 가묘는 비단 제례뿐만 아니라 주자가례에 따른 4례(冠婚喪祭)가 모두 이루어지는 장소를 의미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묘의 설치는 가례를 실행하는 전제적 요건이었던 것이다.

 주자가례에 따른 가묘의 건립은 이미 고려 말에 鄭夢周가 주장한 바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부 사대부들은 가묘를 세우기도 하고, 또 가묘 건립을 강력히 주장하여 법제화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1077)태조 7년(1398)의≪經濟六典≫에는 위반자에 대한 벌칙조항까지 수록되어 법제화 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는 사대부 계층에서조차 보편화되지 못하고 있었다.1078)예를 들어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가묘제 시행의 부진과 가묘제의 규정변화가 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士大夫들이 家廟를 세우지 않으며, 심한 자는 神主도 만들지 않고 紙錢으로 대신하고 있으니 규찰하라고 禮曹와 司憲府에 傳旨하였다(≪成宗實錄≫권 19, 성종 3년 6월 무인). 조선 전기까지는 불교와 무속신앙이 기층사회에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유교윤리가 정착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가묘 건립이 일반화된 것은 종법제·봉사제·상속제 등이 정착하기 시작한 16세기 이후로 알려져 있다. 지방의 사족들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고, 지방에서는 서원과 향약의 건립을 통한 사족의 농민 지배가 활성화되는 한편, 성리학적 실천 덕목인≪小學≫과 가정의례의 기준인≪주자가례≫가 대량으로 간행·반포되어 유교적 생활문화가 확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1079)이호열,≪조선전기 주택사 연구≫(영남대 박사학위논문, 1991), 17쪽.

 이에 따라 16세기 이후 사대부 계층 특히 종조의 제사를 계승받는 종가에 있어서 주택 안에 별동으로 가묘를 설치하는 일은 의무적이고 필수적인 일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가묘는 제례뿐만 아니라 모든 가정의례의 중심 장소로서 가장 신성한 영역에 배치되어야 했다. 家禮書에 ‘집을 지을 때 먼저 정침의 동쪽에 사당을 세우도록 한 것’을 보면1080)홍승재·박언곤,<조선시대건축과 예제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논문집≫ 6-1, 1990), 160쪽., 주거 건축에 있어서 가묘의 배치가 우선시 되었고, 동쪽은 가묘가 자리할 방위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반가의 사당을 살펴보면 대부분 살림채의 좌측 후면1081)살림채가 남향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좌측의 사당은 동쪽이 된다.에 자리하고 있으며, 세 칸 홑집의 평면 구성을 갖는 사당을 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싸는 폐쇄적인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당의 배치와 형태는 그만한 주거 면적과 건립 비용이 소요되는 일이었기에 서민 계층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당의 건립이 사대부 계층만큼 절실하지도 않고 경제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종대에는 집터가 좁아 따로 가묘를 세우기 어려운 사람은 神位를 보관하는 櫝을 만들어 정결한 방에다 안치하고 그 곳에서 제사를 모시는 편법을 허용한 바 있다.1082)≪太宗實錄≫ 권 2, 태종 원년 12월 을미. 또한 세종대에는 집이 가난하고 노비가 없고 집이 10칸 이하인 자와 家基가 3, 4負 이하인 자는 1칸 크기의 가묘를 짓는 것을 허용하고, 이것도 할 수 없는 자와 본래 사족이 아닌 자에 대해서는 침실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던 것이다.1083)≪世宗實錄≫ 권 55, 세종 14년 2월 신미.

 따라서 가묘의 건립이 기층사회에 확산된 조선 중기 이후에도 일반 민중들은 별동의 사당을 두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별동은 아니더라도 살림채내에 한 칸의 제실을 두는 경우, 제사를 모시기에 합당한 정결하고 신성한 공간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민가에서 흔히 발견되는 대청이라는 공간이 제례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의례의 중심 장소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 대청은 제실의 용도로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1084)살림채의 중심에 위치하는 마루는 여러 연구에 의해 의례와 격식의 의미를 갖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마루가 북퉁구스족의 神聖空間인 ‘Malu’, ‘Maró’와 같은 기능을 가졌다는 점을 주장하는 학자로는 장보웅, 이병도, 三品彰英 등이 있다. 즉, 상류 주거의 대청이 서민 주거에 확산된 것은 유교적 생활문화의 보급에 따라 조선 중기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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