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1. 탕평책 실시의 배경
  • 2) 탕평론의 대두

2) 탕평론의 대두

 兩亂期를 거치면서 심각하게 대두된 대중국관계의 재조정 문제나 사회·경제적인 현안이 착종하는 것과도 관련해서 명분론 중심으로 전개되던 붕당간의 정치 항쟁이 점차 붕당의식을 극복하고 현실문제를 실무로서 해결해 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요컨대 비생산적인 당쟁을 거부하고 國富와 민생을 우선하는 정치 운영을 지향하는, 즉 반붕당·당쟁극복의 논리와 세력이 성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붕당·당쟁극복의 논리와 주체가 추이하는 사정, 즉 탕평론과 탕평책의 등장 과정은 이른바 ‘붕당정치’의 자기 모순인 당쟁의 악화와 관련되었다.

 17세기는 禮學·禮訟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15세기 이래로 발달해 온 주자학의 중요한 영역으로서 조선적인 예학이 학문의 큰 흐름을 이루는 가운데 많은 예학자가 배출되고 이것이 학파적인 분화도 보이고 있었다.031)黃元九,<李朝 禮學의 形成過程>(≪東方學志≫ 6, 延世大, 1963).
고영진,≪朝鮮中期 禮學思想史≫(한길사, 1995) 참조.
마치 그 무렵 주자학의 理氣·人性說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것과도 같은 현상이었다. 예학은 유교의 典禮를 다루는 학문이었으므로 명분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사회의 규범과 儀式, 意識과 행동을 규정하고 그 當否를 치밀하게 따지는 점에서는 예와 명분이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명분론이 큰 쟁점으로 등장하는 것과 함께 전례문제를 둘러싸고 관인 유자들이 심각하게 대립하는 ‘예송’이 따라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에 일어난 ‘元宗追崇是非’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요컨대 국왕 인조가 선조를 아버지로 불러야 옳다는 재야 예학자들의 주장과 生父인 定遠君(선조의 다섯째 아들)을 그대로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는 반정공신들의 주장이 맞선 논쟁이었다.032)李迎春,<潛冶 朴知誡의 禮學과 元宗追崇論>(≪淸溪史學≫ 7,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李成茂,<17世紀의 禮論과 黨爭>(≪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참조.
인조가 ‘反正’이라는 비상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데서 비롯된 문제였는데 전자는 왕통 계승 자체만을 중시하려는 견해라면 후자는 혈통 계승의 기반 위에서 왕통을 세우려는 입장이었다. 결과는 전자의 法統 명분에 대하여 혈통 우선의 명분을 내세운 후자의 승리로 돌아갔다. 인조의 宗法的 지위를 확립하여 반정의 명분을 공고히 하려는 반정세력의 의도가 관철된 셈이었다. 이렇게 전례와 명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만큼 명분론이 크게 일어났던 시기에는 公私間에 전례문제, 즉 예송도 빈번했던 것이다.

 흔히 예송이라고 하면 17세기 중엽의 ‘己亥禮訟’(1659, 혹은 1660년의 庚子禮訟이라고도 함)과 ‘甲寅禮訟’(1674)의 경우를 들게 마련이다.033)두 차례의 ‘禮訟’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가 참조된다.
姜周鎭,<禮訟과 南人政權의 成立과 分裂>(≪李朝黨爭史硏究≫, 서울大 出版部, 1971).
李迎春,<第一次禮訟과 尹善道의 禮論>(≪淸溪史學≫6,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9).
―――,<服制禮訟과 政局變動-第二次禮訟을 中心으로->(≪國史館論叢≫22, 國史編纂委員會, 1991).
李成茂, 위의 글 참조.
명분론이 주도하는 정치운영의 상황에서 예송이 일어남으로써 정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그 여파도 컸기 때문일 것이다. 효종의 장례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庚子年의 예송에서는 아직 살아 있는 大妃(인조의 繼妃 趙氏)의 服期를 朞年(1년)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와 3년으로 하자는 주장이 대립하였다가 전자의 견해가 채택되었다. 그 15년 뒤 효종비(仁宣王后 張氏)의 장례 때에 일어난 갑인예송에서는 역시 대비 조씨의 상복을 놓고 앞서의 기년설에 근거한 大功(9개월)服과 三年說에 입각한 朞年服을 내세우는 주장이 맞섰는데 이번에는 후자가 승리하였다. 대개 전자의 기년설은 효종을 인조의 次子(장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昭顯世子)로 보아 衆子(庶子)에 준하는 상복을 입으면 된다는 일부 서인 산림의 견해였고, 후자의 삼년설은 효종이 비록 차자였을지라도 왕위의 대통을 이었으므로 長子에 준하는 상복을 입어야 옳다는 남인계 예론가들의 견해였다.

 국왕을 위시한 왕실의 喪葬禮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典禮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조정의 학식있는 관인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명망있는 老師熟儒·禮學者들도 자문에 응하도록 되어 있었다. 論禮가 진행됨에 따라 미세한 이견이라도 첨예하게 확대되기 십상이고 여기에 재야 유생들의 집단적인 찬반론이 가세함으로써 전례를 위한 예설은 곧장 당론이 되게 마련이었다. 당색의 차이가 예설의 논점을 서로 다르게 하고 여기에 평소의 정치적 견해나 현실의 이해관계가 겹쳐 있었던 것이다. 예송이 권력투쟁, 집권 경쟁의 양상을 띠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034)禮訟이 권력투쟁의 양상을 띠어 가는 데 대한 비판론은 朴世堂의 경우에서 잘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三年說이나 朞年說 모두 효종이 인조의 次長子라는 사실 위에서 喪服의 隆殺만을 달리 하는 논의라는 것, 그리고 상복의 융쇄만으로 이미 정해진 宗統 자체를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종통문제와 복제문제를 분리해 보는 입장에서 삼년복이니 기년복이니 하는 문제가 종통의 정당성 여부를 결정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설의 번쇄한 논의에 반대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예설을 빙자한 권력투쟁을 비판한 것이었다(朴世堂,≪西溪集≫권 7, 禮訟辨 참조).

 실제로 두 차례의 예송은 소수파인 남인이 다수파인 서인을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하는 직접 계기가 되었다. 남인의 삼년설이 서인의 기년설을 명분과 논리에서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양론이 처음부터 정치적 의도가 분명했거나 이념상의 차이가 드러난 것은 아니었고, 또 그 논거 역시 ≪儀禮≫·≪經國大典≫ 등에서 이끌어 오는 점도 같았다. 대략 15년을 사이에 둔 논쟁 과정을 통해서 보면 기년설은 士大夫禮를 체계화한 ≪朱子家禮≫에 의거하는 경향을 띠는 데 대해서, 삼년설은 ≪의례≫의 王朝禮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삼년설은 王室과 私家의 차별을 분명히 함으로써 사대부층의 臣權에 대한 왕권의 존귀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음에 대해서 기년설은 왕실과 사가(사대부), 왕권과 신권과의 차별성보다는 치자층 일반의 보편성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묘하게도 왕권중심론과 신권중심론의 대립점이 예송의 지렛목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과연 국왕 현종과 숙종은 삼년설에 공감하고 서인을 내치는 대신 남인 등용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왕권론과 신권론은 단순히 세력균형·권력구조론의 차원을 넘어 현실문제의 체제적 대응을 가름하는 주요 지표였다. 즉 삼년설과 기년설로 맞섰던 복제 논쟁은 朱子禮說과 反朱子禮說의 갈등이라는 측면이 있었고 이것은 바로 주자학과 고전 유학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정통 주자학이 신권 중심의 정치 운영을 통해서 綱常說과 지주층 옹호의 입장을 관철해 가려는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반주자학은 군주권의 강화를 통하여 농민층의 恒産을 보증하려는 진보 개혁적 입장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예송의 기년설과 삼년설은 놀랍게도 각각 명분론과 지주제 옹호론, 실제론과 소농민 육성론을 내세우는 정치노선의 차이나 대립현상을 일정하게 반영했던 것이라 하겠다.035)예송과 권력, 정치 이념과의 관계를 이같이 상정하는 시각에 대해서는 金駿錫,
<朝鮮後期의 黨爭과 王權論의 추이>(≪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참조.

 인조반정 이래로 50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서인과 남인 사이의 ‘견제와 비판’이라는 보합적·소강적 관계는 두 차례 예송의 결과 여지없이 깨어졌다. 주자학 명분론의 지향이 파탄에 이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양반 지배층은 임진왜란의 위기 상황에서 명분론을 내세워 집권체제를 안정시키고 서인 장기집권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그 명분론적 지향은 곧 밖으로 외적의 침입을 부르는 커다란 요인이 되었고 안으로는 당파간의 정치 항쟁을 격화시키는 빌미를 만든 것이었다.

 아무튼 남인은 오랜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집권 남인은 정권교체의 의의를 별로 발휘하지 못한 채 오히려 淸南·濁南으로 당론이 갈리어 대립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주도권을 쥔 탁남계는 취약한 지지기반을 보강하기 위한 방편으로 척신세력과 제휴하여 도성 방위나 치안 유지를 위한 군문강화책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주력하였다.036)李泰鎭, 앞의 책 참조.
같은 남인인 淸南系 許穆의 비판은 더욱 철저하였다(金駿錫,<許穆의 反北伐論과 農民保護對策>,≪島巖柳豊淵博士回甲紀念論文集≫, 1991).
정책이나 이념에서 서인과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정권 경쟁의 차원에 머물러 버린 것이었다. 결국 남인들의 권력 집중에 불안을 느낀 국왕 숙종이 척신세력을 불러들이고 마침 모역설이 떠도는 것과 관련되어 남인정권은 6년만에 무너졌다(庚申換局, 1680).

 경신환국의 결과 남인 집정자와 종친 4명의 賜死를 포함하여 100여 명이 遠配·杖流·削職당하였고 推鞫에서 刑杖으로 죽은 자도 10여 명이 넘었다. 남인의 실각이 이처럼 살벌한 숙청으로 이어진 것은 종래 정쟁의 조건 위에 다시 黨人·훈척·종친과 그 수하인들이 관련되었다는 모반음모설이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037)姜周鎭,<宗親除去와 戚臣政治의 成立>( 앞의 책). 음모설이 사실이냐 가해자 쪽의 조작이냐의 진위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로써 정치투쟁의 수단과 방법이 명분론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환국이 거듭될수록 숙청과 보복이 더 가혹해짐으로써 이제 정쟁의 승패는 단순한 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死生의 갈림길이 되었다.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은 훈척의 병권 장악과 정탐·誣獄 등 정치 비리에 대하여 이를 비호하는 宋時烈 지지자들과 이를 비판 공격하는 소장층으로 나뉘어 대립함으로써 노·소론의 분립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이른바 ‘懷尼是非’와≪家禮源流≫著者是非가 가세하였다. 즉 전자는 君師父一體說·背師說을 내세운 송시열측과 父師輕重說을 들어 尹宣擧·尹拯 부자를 두둔하는 측의 대립이었고, 후자의 문제 역시 송시열의 친우인 兪棨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쪽과 윤선거의 작품이라고 믿는 쪽의 싸움이었다.038)金相五,<懷尼師生論의 是非와 丙申處分에 대하여>(≪論文集≫ 1, 全北大, 1974).
李銀順,≪朝鮮後期 黨爭史硏究≫(一潮閣, 1988) 참조.
그러나 노·소론은 禧嬪 張氏 소생의 왕자를 元子로 책봉하려는 숙종의 계획에 반대하다가 남인들의 반격으로 함께 밀려난 己巳換局(1689)이나, 재차 남인을 거세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甲戌換局(1694) 때까지는 아직도 완전한 분당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039)이 시기 ‘換局’을 중심으로 한 정국 동향에 대해서는 洪順敏,<肅宗初期의 政治構造와 ‘換局’>(≪韓國史論≫ 15, 서울大, 1986) 참조.

 갑술환국은 정치세력으로서 남인의 몰락을 가져왔고 동시에 노·소론이 결정적으로 黨을 나누어 세우는 전환점이 되었다. 처음 환국의 수습 임무는 일단 소론에게 맡겨졌다. 척신의 득세와 그들의 병권 집중을 억제하는 대신 남인 잔여세력의 調用을 통하여 保合調劑的인 분위기를 유지하자는 것이 소론의 기본 입장이었음에 대하여, 노론이 여기에 극력 반대하고 남인 처벌을 주장함으로써 노·소론 사이에는 강·온 양론이 크게 엇갈리게 되었다. 이 때부터 숙종대 말기까지는 대체로 실세에서 우세를 유지하던 소론의 보합론이 노론 강경론의 공세에 밀려 점차 비세로 몰리는 추세였다.<三田渡碑文>논쟁040)李銀順,<老少論의 時局認識論-李景奭의 政治的 生涯와 三田渡碑文 撰述是非->(앞의 책) 참조.을 비롯해서 박세당의 ≪思辨錄≫041)≪思辨錄≫에 관련한 논쟁과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조된다.
李丙燾,<朴西溪와 反朱子學的 思想>(≪大東文化硏究≫3, 成均館大, 1966).
李勝洙,<西溪의≪思辨錄≫저술태도와 시비논의-성리학적 세계관의 변모를 중심으로->(≪韓國漢文學硏究≫16, 韓國漢文學會, 1993).
김용흠,<朝鮮後期 老·少論 分黨의 思想基盤-朴世堂의≪思辨錄≫是非를 중심으로->(≪學林≫17, 延世大, 1996).
과 崔錫鼎의 ≪禮記類編≫이 주자의 敎說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각각 소각 처분되는가 하면,042)≪肅宗實錄≫권 48, 숙종 36년 3월 무인, 경진. 마침내는 이미 죽은 尹宣擧의 문집을 毁板하고 그들 부자의 관작을 빼앗는 ‘丙申處分’(1716)이 내려진 것이었다.043)≪肅宗實錄≫권 58, 숙종 42년 7월 기미, 신유, 계해·숙종 42년 8월 신해·숙종 42년 12월 을묘 및 권 59, 숙종 43년 5월 임오.

 주자학을 둘러싼 비판론과 옹호론이 대립하는 斯文論爭에서 국왕 숙종은 거듭 소론 일방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게 되고 상대적으로 노론은 크게 고무되었다. 소론의 위축은 정국이 조만간 노론 일색으로 통일될 것을 예상케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숙종이 돌아가고 경종이 즉위하자 상황은 일변하였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가 불안해 보였던 경종의 옹위자이자 그 지지 기반임을 자처하는 소론 강경파가 왕권을 배경으로 노론에 대한 일대 반격으로 나왔던 것이다. 뒷날 노론이 스스로 ‘辛壬士禍’(1721∼1722)로 부르듯이 金昌集 등 4명의 노론 대신이 遠竄·賜死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당인들이 박해를 받았다.044)이른바 ‘辛壬士禍’에 대해서는 吳甲均,<景宗朝에 있어서의 老少對立>(≪淸州敎大論文集≫8, 1972) 및 李銀順,<18세기 老論 一黨專制의 成立過程-辛壬士禍와
≪闡義昭鑑≫의 論理를 중심으로->(앞의 책) 참조.
그러다가 경종이 겨우 재위 4년으로 죽자 이번에는 영조의 등극을 기다리던 노론의 세상이 되고 소론에 대한 보복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렇게 숙종대 후반부터 영조대 초기까지의 30여 년에 걸쳐 일진일퇴를 반복한 노·소론 항쟁에서는 몇 가지 전에 없던 새로운 양상이 드러나고 있었다. 즉 남인이라는 대항세력이 거의 없어진 상태에서 본시 서인끼리 벌이는 대결이었다는 점, 때문에 쟁론이 더욱 치밀해지고 보복과 박해도 그 만큼 가혹해졌다는 점, 아직 명분론·강상론이 쟁론의 핵심이었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이 무렵에는 온갖 정치적 조작과 음모·모반이 반복되고 여기에 물리적인 힘, 즉 금력과 무력이 현실적인 영향력으로서 가세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치열한 黨禍가 결국 지배층 전체를 피해자로 몰아가리라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점차 소강적·타협적 정치 안정을 기대하는 탕평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점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사실 탕평론의 등장 배경은 조선 후기 양반정치의 모순을 그 시기 사회·경제구조의 변동과 관련시켜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계기가 노·소론 분당에 있는 것이고 보면 탕평론의 의의는 노·소론이 분당에 이르기까지의 사상적·이념적인 분기현상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우선 禮訟期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서인 모두가 기년설에 공감했다기 보다는 그것이 領袖 송시열의 강력한 주장으로서 남인의 삼년설에 맞서는 바람에 당론처럼 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045)李成茂, 앞의 글(1992), 43쪽 및 52∼53쪽 참조. 典禮를 실무·실용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우와 명분과 典故에 치중하는 경우는 발상과 태도에서 차이가 큰 것이었고 이것이 예송의 본래 분위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신환국 뒤에 남인 처벌문제를 놓고 강·온 양론으로 맞섰다든가, 척신을 두둔하거나 태조의 尊號論을 들고 나온 송시열에 대해서 朴世采 등 少壯들이 반발했다든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즉 典禮의 그것처럼 병자호란의 대응 자세에서 드러났던 당위론과 실제론의 대립이라는 맥락으로 보아 무리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박세당의 ≪사변록≫을 둘러싼 논쟁은 소론(=박세당)의 주자학 비판론에 대한 노론(=송시열)이 자부하는 정통주자학의 반격이었다.046)김용흠, 앞의 글 참조. 이는 주자학에 대한 반주자학의 성장, 즉 명분론 이데올로기의 동요를 반영하는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노·소분당을 학문·이념적으로 집약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주자학비판론=반주자학과 정통주자학의 대립이 조선 후기 양반지배층의 현실 인식과 그 대응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점은 앞에서 거듭 말하였다. 이념과 정책 노선의 차이가 현상적으로는 노·소론의 분립이라는 형태로, 주자학과 반주자학의 갈등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학문·사상적 정치적 분립의 動因은 이미 李瀷이,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기는데 이해관계가 긴밀하고 오래되면 붕당이 깊어지고 견고해지는 것은 事勢가 그러한 것”047)李瀷,≪星湖先生文集≫권 30, 朋黨論 17ㄱ.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048)현실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가 본질적·이념적인 차이로 드러나는 경우가 토지문제였다(주 28)의 논문 참조). 특히 송시열과 박세당은 農書와 관련한 農學思想·農政理念에서도 地主的 입장과 小農的 입장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金容燮, 앞의 책, 1988, 151∼186쪽 및 195∼213쪽 참조).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서는 ‘蕩平’이나 ‘均役’이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平’·‘均’의 의미를 담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붕당끼리의 격렬해지는 정쟁을 완화하고 새롭게 성장하는 서민층의 사회의식,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지주전호제의 확대와 농민층 분해에 맞물려 전개되는 수취체계·재정구조의 모순을 개혁함으로써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균평화하여 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실현해 나가려는 분위기의 반영으로 볼 수 있었다.

 이른바 조선 후기 ‘實學’은 이러한 정치·경제적 지향을 학문의 차원에서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학은 흔히 ‘실사구시’·‘경세치용’이라고 하듯이 학문의 대상과 목표를 모두 현실에 근거하고 현실의 정치를 통해서 구현하려는, 정치·경제·사회적 현안에 대한 개혁 방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학문 활동이었다. 실학은 학문의 내용이나 방법, 특히 학문의 목표에서 정통주자학의 그것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던 점에서 분명히 반주자학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특히 兩亂期를 통해서 제기되어 온 國家再造論의 한 맥락은 이러한 실학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柳馨遠이 국가재조의 전반적인 방략을 마련하는 가운데 정전제의 정신에 입각한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지주제와 소농경제의 모순관계를 극복하고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육성과 정치 운영 방식의 획기적 전환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049)金容燮,<朝鮮後期 土地改革論의 推移>( 앞의 책, 1990), 429∼433쪽.
金駿錫,<柳馨遠의 政治·國防體制 改革論>(≪東方學志≫77·78·79합집, 延世大, 1993).
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 실학은 당쟁적인 정치 운영에 대항하는 정치운동의 한 형태로서 전개된 학문·사상운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형원이나 이익의 경우가 그렇듯이 그들 실학자들은 대부분 당쟁으로 소외되거나 당쟁적 정치운영에 실망하여 정계를 떠났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실제로 실학의 이념은 일정하게 탕평론에 이어지고 있었다. 우선 均·平을 지향해서 농민적 입장과 기대를 수용하려는 태세가 그러하였다. 무엇보다도 실학은 학문의 방법과 이념에서, 탕평론은 그 정치원리·정치운영에서 정통주자학과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실학과 탕평론은 통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梁得中이나 吳光運은 정전제의 원리와 국왕 중심의 세도론을 근거로 영조의 탕평책을 적극 지지한 官人 儒者들이었는데 이들이 특히 ≪磻溪隨錄≫을 최선의 經世書로 보고 이를 왕에게 권장하였던 것은 결코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050)金成潤,<蕩平의 原理와 蕩平論>(≪釜大史學≫15·16합집, 1992), 442∼453쪽 참조.
양득중은 尹拯의 제자로서, ‘實事求是’를 강조한 영조대 소론 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磻溪隨錄≫도 윤증에게서 소개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오광운은 淸南系를 이끈 許穆의 연원과 관련이 깊어 李瀷 등과도 교류하였으며 특히 유형원의<行狀>을 작성하기도 하였다(朴光用,<蕩平論의 展開와 政局의 變化>(≪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326∼334쪽 참조).

 한편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와 관련한 새로운 정치 지향 계층의 성장은 탕평론이 제기될 수 있는 사회·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우선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지주제의 확대로 농민층 분해가 촉진되어 無田無佃之民이 광범하게 방출되는 가운데 富民·饒戶 등으로 지칭되는 경영형부농·서민지주층의 성장이 괄목할 만 하였다. 이들은 상품 유통경제의 발달과 수공업·광업의 발달과정에서 등장하는 富商大賈·私匠·德大 등 상공인층과 더불어 이 시기 사회·경제변동을 선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새로 성장하는 사회·경제세력은 그들의 역량에 상응하는 현실적 기대와 요구가 있게 마련이었다. 바로 사회의식의 변화 확대이며 신분적·정치적 지위 상승이었다.051)특히 경영형 부농의 성장과 이의 사회·경제적 의의에 대해서는 金容燮,<朝鮮後期의 經營型 富農과 商業的 農業>( 앞의 책, 1990) 참조. 그럼에도 현실은 재정 수요의 증가분과 담세력을 상실한 영세농의 부세가 오히려 이들에게 전가되면서 중간수탈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불만은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지향성을 띠고 폭발할 것이 예상되었다.

 이 시기의 정치적 불만은 반드시 그들 신흥의 경제세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18세기경에는 농촌사회 변동, 서민층의 신분 상승이 전개되는 한편에서는 종래의 농촌 양반층이 광범하게 몰락하고 閒遊者層052)金盛祐,<조선후기 ‘閑遊者’層의 형성과 그 의의>(≪史叢≫ 40·41합집, 1992) 참조.이 증가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 가운데는 學丈·師丈, 또는 地師로서 賣文資生하며 농촌사회에 지식을 전달하고 사회의식을 자극하는 부류들도 있었다.053)鄭奭鍾,<資料에 대하여>(≪朝鮮後期 社會變動硏究≫, 一潮閣, 1984), 17∼18쪽 참조. 이들 몰락 지식인들은 일단 유교 주자학을 체득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수단으로 해서 현실적인 불우와 불만 의식을 표현 전달하고 있었던 점에서는 보수적인 일반 유림과는 달랐다. 토지에서 밀려난 賃勞動層을 위시해서 승려·才人·백정·巫覡 등도 현실 정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다. 그것은 종래부터 소외되어 온 기층부 서민들의 입장과도 기본적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양반정치의 외곽을 형성하는 胥吏·武官·譯官 등도 일단 기성의 정치 질서에 불만을 가지고 당쟁적 정치 동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정치적 불만 계층이 세력화해서 정변에 가세하거나 변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점차 높아져 갔고 그러한 사태는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테면 도성 안에서 明火賊이 銀貨를 약탈한 사건, 노비들이 香徒契를 근간으로 劒契·殺主契를 조직한 사건, 승려·지사·무당 등이 대궐 침입을 꾀한 彌勒信仰事件 등이 일어났다.054)鄭奭鍾,<肅宗朝의 社會動向과 彌勒信仰>(위의 책).
홍순민,<17세기말 18세기초 농민저항의 양상>(≪1894년 농민전쟁연구2-18·19세기의 농민항쟁-≫, 역사비평사, 1992) 참조.
저 유명한 광대 도적 張吉山 부대가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055)鄭奭鍾,<肅宗年間 僧侶勢力의 擧事計劃과 張吉山-李悅·兪選基 등 告變을 중심으로->(위의 책) 참조. 그런가 하면 소론과 노론이 저마다 상인들의 자금을 끌어 모으고 武人·宦官을 움직여 換局을 도모한다는 告變事件이 일어나기도 하였다.056)鄭奭鍾,<肅宗朝의 甲戌換局과 中人·商人·庶孼의 動向>(위의 책), 94∼121쪽 참조.

 잘 알려져 있듯이 영조 4년(1728)의 ‘戊申亂’은 이러한 불만 계층과 그 동조세력이 중앙 정계의 변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일으킨 대규모 변란의 대표적인 경우였다.057)吳甲均,<英祖朝 戊申亂에 관한 考察>(≪歷史敎育≫ 21, 歷史敎育硏究會, 1977).
李鍾範,<1728년 戊申亂의 性格>(≪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참조.
무신란 이후에도 남인의 서울 방화 계획이나 淸凉山 聚會逆謀 등 정변·민란과 관련한 크고 작은 변고가 거듭되었음은 물론이었다. 표면으로는 아직 주자학 보수주의가 완연하였지만 당쟁으로 인한 지배층의 분열과 정계의 불안정, 나아가서는 지배층 전체의 취약한 형세를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회 저변층의 정치적 진출 시도는 거의 실패로 돌아가기 마련이었고 또 그들의 정치 관여는 특권 양반들의 하수인 혹은 방조자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사회 저변층의 성장, 상공인층의 대두는 양반정치의 모순을 더욱 가속시키는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 질서의 지향을 그 만큼 촉진시키는 사회 동력이 아닐 수 없었다.

 사회·경제적 성장을 배경으로 시작된 서민·하층민들의 정치적 지향은 탕평론이 대두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우선 서민층의 사회 정치의식의 확대는 양반 중심의 정치 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제 정치가 더 이상 양반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일깨우는 동시에 양반층으로서는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기도 하였다. 정치 참여와 그 운영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요구를 일정하게 억제하면서 기존 양반층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그들 양반관인 전체가 공유하고 결속할 수 있는 정치 질서가 새롭게 모색되어야 했다. 이 시기 탕평론·탕평책이 제기되는 배후에는 이처럼 아래로부터의 상승 욕구와 위로부터의 위기의식이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종래 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특권 양반층이 주자학을 기초로 운영하는 것이었던 점에서 볼 때 이에 대치할 새로운 정치원리·정치운영 방식, 즉 탕평론·탕평책에서는 명분론·군자소인론과 같은 주자학 정치 원리가 그 만큼 지양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탕평론의 消融保合說에는 주자학의 명분론·군자소인론을 극복하는 의미가 일정하게 내재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탕평론은 경신환국 후의 서인정국에서 처음 제기되었다.058)숙종대의 정국동향을 특히 탕평론의 추이와 관련하여 파악한 것으로 鄭景姬,<肅宗代 蕩平論과 ‘蕩平’의 시도>(≪韓國史論≫ 30, 서울大, 1993)가 참고된다. 다시 정권에 복귀한 서인들은 환국으로 세력을 잃은 남인 처벌문제와도 관련해서 온건론과 강경론이 맞섰던 것이고 탕평론의 제기는 이러한 대립 국면을 조정 완화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서인과 남인의 입장이 다시 뒤바뀐 기사환국 때나 재차 남인이 실각한 갑술환국 뒤에도 거듭 탕평론이 등장하였다. 이 때까지가 대개 서인과 남인 사이의 탕평을 실현하자는 논의였다면 그 뒤 그러니까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거의 배제된 숙종대의 후반에는 노·소론 사이의 탕평 논의였다. 노·소 탕평은 병신처분으로 노론 일당이 주도할 때까지 소론의 주도 아래 그런대로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숙종대 전반기의 탕평론은 아무래도 박세채가 대표적인 주창자였다.059)박세채는 정국 동향에 따라 전후 3차에 걸쳐 탕평을 역설하였다.
≪肅宗實錄≫권 14, 숙종 9년 2월 병자·권 15, 숙종 14년 6월 을미·권 27, 숙종 20년 6월 경자·정사.
그는 윤증·남구만과 함께 서인 소장층의 지도적 인물로서 흔히 ‘懷尼是非’로 알려진 송시열과 윤증의 불화관계를 해소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특히 그는 탕평의 실행 방안으로서 훈척과 일부 서인들의 강경론에 맞서 남인 수용을 적극 주장하였다. 훈척세력의 정치 관여를 억제하고 당쟁으로 인한 분열과 반목을 해소함으로써 사림 중심, 士論 주도의 정치 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이 무렵에는 李端夏·李尙眞·李畬·金構 등 주로 서인계 관인 유자들이 탕평의 필요성을 거론하고 己巳政局에서는 丁時翰이 남인 주도의 탕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060)鄭景姬, 앞의 글, 134·138쪽 참조. 정시한을 제외하면 대개의 논자들이 당쟁의 폐해 자체만을 우려하는 데 머물거나 노·소 보합에 국한하는 탕평을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박세채는 노·소 보합의 기반 위에서 남인은 물론 과거 북인까지도 수합할 것을 생각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일소되었던 것처럼 이번에 만약 남인이 몰락한다면 사림 전체가 위축되어 정국의 경색이 가속되리라고 보는 것이었다. 주지하듯이 이러한 박세채의 우려는 그 뒤 현실로 드러났다.

 돌이켜 보면 이 시기 당쟁극복론·붕당타파론은 이미 16세기 초 사림의 본격적인 정계 진출을 계기로 그 유래가 시작되었다.061)붕당론·붕당타파론의 추이에 대해서는 鄭萬祚,<朝鮮時代 朋黨論의 展開와 그 性格>(≪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참조. 즉 주자학의 정치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의 정치언론·정치활동은 기성세력으로부터 붕당이라는 지목을 받게 되었고, 이에 사림은 歐陽脩의 眞朋僞朋說이나 주자의 君子小人辨을 근거로 내세워 오히려 자신들의 당파적 성향을 합리화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붕당론은 그 후 동·서 분당기에 이르러 이론적·현실적으로 변용되었다. 이 때 李珥는 동·서인의 붕당은 사림 내부의 자체 분열로 여기에 君子小人之分을 적용할 수는 없으나 동·서인이라는 명목은 일단 타파되어야 한다고 보고 兩是兩非論·保合調劑論을 폈었다.062)≪宣祖修正實錄≫권 15, 선조 14년 9월. 이이의 양시양비론은 그 당장에 是非明辨論者로부터 정면으로 비판당하게 되고 동·서의 대립 역시 더욱 치열해졌다. 결국 그 스스로도 ‘是非明辨後의 調劑收用論’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군자소인론·시비명변론을 근간으로 하는 破朋黨論-결과적으로는 붕당긍정론-이 드세어지는 가운데 調停과 保合, 消融과 調劑를 내세우는 붕당타파론, 즉 탕평론이 형성되는 실마리는 여기에서 찾아지는 것이라 하겠다.

 박세채가 내세우는 탕평론의 이념과 방법은 멀리 이이의 그것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송시열과 함께 이이의 문집을 정리하여 畿湖 서인의 이념체계를 정립해 간 핵심 인물이었지만, 그 정치 이념에서는 송시열의 주자적 붕당긍정론을 반대하고 이이의 붕당타파론을 충실히 수용하였던 것이다. 노·소론의 분립은 이렇게 서로 다른 정치이론의 추구에서도 벌써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방법으로서의 보합과 조제가 설득력을 지니고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이론 근거가 설득력있게 제시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進賢退邪·惟才是用을 주장하는 점에서는 박세채 자신도 붕당긍정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시비명변론, 군자소인론을 긍정하고 있었으므로 사정은 더욱 그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세채는 皇極蕩平說에 주목하게 되었다. 황극탕평은 모두 ≪書經≫<周書>의 洪範篇에 있는 말로서 황극이란 ‘皇建其有極’, 혹은 ‘惟皇作極’이라고 했듯이 임금이 백성을 위해 至極한 표준을 세워 함께 그 福을 누린다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淫朋과 比黨, 즉 君民의 私邪로운 黨을 경계하고 있다. 탕평은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서 역시 偏黨을 막아야 한다는 경고가 들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황극탕평의 정신은 왕도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 군신 상하의 大公至正과 無偏無黨이 요구되는 점에 특징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洪範>에는 유교의 정치 원리, 經世理論이 집약되어 있다.063)<洪範>에 입각한 탕평론의 원리에 대해서는 金成潤, 앞의 글 참조. 박세채가 양반 유교정치의 모순으로 드러난 당쟁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원리로서 이를 이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여러 經傳과 先儒들의 홍범 연구를 종합 정리한 저작을 냈는데 특히 여기에서 황극설의 미진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064)≪範學全編≫ 6권 4책, (1684년) 목판본, 序文 참조.

 사실 16세기 후반에는 지주제의 모순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李珥·尹斗壽·韓百謙을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이 주자의 토지론을 재검토하는 가운데 箕子 箕田說·井田說 등에 주목하고 있었으므로065)金容燮,<朱子의 土地論과 朝鮮後期 儒者>( 앞의 책, 1990), 408∼413쪽 참조. 그들은 이 과정에서 기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홍범·황극설에도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은 주자의 경제사상에 동의하여 지주제를 옹호하는 논자들이 대개 정치 운영에서도 주자학의 정치이론, 즉 시비명변론·군자소인론을 내세워 붕당간의 조제 보합에 반대하게 마련이었던 사정과 좋은 대조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황극탕평론은 왕도정치를 천명하되 붕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고 이로써 반탕평론, 주자학 정치이론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이론으로서 성립될 수 있었다.

 황극탕평론이 내포하는 왕도정치·반붕당의 논리는 국왕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왕의 정치적 조정이나 결단을 보장하는 것이 되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국왕중심의 정치운영 방식은 현실적으로 16세기 이래의 오랜 전통이 되어 온 사림 주도의 이른바 ‘公論’정치에 일정한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치열한 당쟁의 한 원인이 사림의 공론정치에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왕 숙종은 기회있을 때마다 당론의 폐해를 지적하며 노·소 鎭靜을 촉구해 온 터였으므로 이제 자연스럽게 박세채의 견해를 따라 탕평교서를 반포하고 반붕당적 경향의 인사들을 銓長·大臣에 기용하면서 진정·조제로 유도하게 되었다.066)숙종은 탕평의 차원에서 嶺南의 인재를 수용하도록 강조한 것을 비롯해서 蕩平敎書와 蕩平備忘記를 번갈아 내렸다.
≪肅宗實錄≫권 18, 숙종 13년 12월·권 27, 숙종 20년 7월 병술·권 32, 숙종 24년 정월 을미·권 41, 숙종 31년 정월 경술·권 45, 숙종 33년 11월 경술·권 54, 숙종 39년 7월 갑자.
그리하여 숙종대 후반기의 정국은 노·소론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南九萬을 위시하여 尹趾完·尹趾善 형제와 柳尙運·申翼相·徐文重 그리고 崔錫鼎·徐宗泰 등 주로 소론계 인사들이 탕평노선을 주도하게 되었다. 노론에서도 閔鎭長·申琓·李畬·李濡·金宇杭 등이 ‘鎭靜·保合優先’, 혹은 ‘是非明辨後의 調劑’라는 방법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역시 탕평에 동조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황극탕평설이 일정하게 정국운영 원리로 받아들여지면서 신료군의 일부가 국왕의 조정과 처분권을 중심으로 정국의 보합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067)鄭景姬, 앞의 글, 145∼159쪽.

 그러나 황극탕평론은 그 이론 체계의 철저함에서 정통주자학의 정치이론, 즉 반탕평론에 맞서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앞서 박세채의 지적이 암시하듯이 탕평설은 秦漢 이래로 유교정치원리로서 실제적·이론적 발전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주자학의 그것은 漢唐으로부터 宋代에 걸쳐 발전·보강되어 온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이 시기 지배계층 전체가 거의 의심없이 지지하는 지배이념이었다. 예컨대 노·소론을 어느 정도 조정하던 국왕 숙종이≪禮記類編≫시비나≪사변록≫시비 등의 斯文論爭을 거치면서 마침내 노론 일방의 정당성에 동의하여 이른바 ‘丙申處分’을 내리게 된 것은 그 단적인 예였다. 국왕의 처분이 이렇게 내려지고 그 결과 소론이 크게 거세되기에 이른 것은 탕평론과 그 지지세력이 정통주자학을 앞세운 노론의 논리에 압도된 때문이었다. 주자학 정치론에 입각한 노론의 붕당론, 즉 君子小人辨別論·進賢退邪論은 그 만큼 요지부동의 자기 정당성의 논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대의 좌절된 탕평론과 탕평운동은 영조 초기의 정치적 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정치운영 원리로 발전해가야 할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

<金駿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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