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 1) 탕평책 시행
  • (2) 완론탕평파의 대세 장악과 반탕평파·준론탕평파의 연대

(2) 완론탕평파의 대세 장악과 반탕평파·준론탕평파의 연대

 앞에서 서술했듯이 蕩平이라는 정국운영론은 경신환국 직후인 17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표방되었으나, 영조 5년 기유대처분 이후에야 실제 정치운영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그런데 영조 5년 이전 단계의 탕평론은 환국으로 불리는 일진일퇴의 정국운영을 부정하고는 있으나, 사림정치의 조선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붕당정치 형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특히 원칙적인 붕당정치로의 복귀를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환국기 一黨全權을 주장했던 붕당의 표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영조 5년 기유대처분 이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붕당을 타파하는 것이라는 정국운영 원칙이 전면에 표방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편 정치집단은 모든 당파에 있었고, 당시에는 온건한 주장을 펴는 정파라는 뜻에서 ‘緩論’이라 호칭되었다. 곧 완론의 탕평론은 붕당을 타파해야 한다는 표방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정치 현안이라는 점을 긍정하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사림의 정치원칙인 각 붕당의 義理 자체가 붕당 타파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정치집단도 존재했다. 이들은 완론에 대칭되는 준엄한 견해를 펴는 정파라고하여 ‘峻論’이라고 호칭되었다. 완론은 붕당을 타파하는 탕평을 긍정하는 입장이 뚜렷했다. 그러나 준론은 반탕평론과 준론의 입장을 존중하는 탕평론(곧 준론탕평론)으로 그 입장이 구분된다.

 영조 4년(1728) 무신란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완론탕평파가 내세운 붕당의 타파는, 한 당파가 전권을 장악하는 환국에 의한 정치운영 형태 뿐만 아니라 이전 단계의 정치운영 원칙이었던 붕당정치 형태 역시 부정한 것이었다. 영조대는 대체로 이러한 완론계열 정치집단을 중심으로 의리를 조제하고 인재를 보합하는 탕평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고 군주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곧 영조대는 완론탕평론이 실제 정치상황에 적용된 완론탕평이 실시되었다.

 붕당정치 형태는 16세기 전반 己卯士林 단계에서 至治主義·公論政治의 표방과 함께 사림계 ‘붕당’ 현상의 긍정론이 내세워진 데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6세기 후반 율곡 이이가 조선적 붕당정치론을 제기한 이래 붕당정치 형태로서 정립되어 갔으며, 17세기 중반까지는 대체로 산림의 조제보합권이나 당하관 청직 주도의 관료제 운영들을 바탕으로 해서, 붕당간의 공론의 대결을 통한 조정·보합으로 상호간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는 원칙론 곧 붕당정치론이 실제 정국운영 기준에 적용되었다.072)조선 후기 사회에서의 朋黨은 정책 결정권을 가진 관료들의 대립·조화관계로 나타나는 정파(권력집단)만을 지칭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이들의 모집단인 예비 관료 집단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당시 사람들은 色目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곧 보다 넓고 다양한 정치집단들을 포괄하고 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전국적 규모와 다양한 조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 주도세력이었던 士林이 또한 그 기반세력이었다.

 그러나 17세기 말 숙종 즉위 이후 한 붕당이 외척집단과 결탁하여 전권을 장악하는 형태로 변환함으로써 일당 전제적 체제와 정탐정치, 그리고 산림계와 외척계의 연합으로 형성된 명문벌열 곧 특권적 권력집단이 정국을 주도하는 환국정치체제로 이행됨으로써, 사림정치적 운영론은 파탄되었다. 이 때문에 18세기 중엽부터는 붕당의 타파를 정치의 첫번째 원칙으로 표방하는 탕평책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영조 연간에는 붕당의 타파와 당론의 제거가 가장 필수적 원칙이라고 인정되었다. 이를 뒷받침한 완론탕평론을 주장했던 인물들은 붕당을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구분하는 방식을 부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 일부는 사대부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던 군자소인론을 부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老論으로서 영조 16년부터 4色의 대탕평론을 주장했던 元景夏가

비록 군자라도 역시 한 가지의 잘못은 있고, 비록 소인이라도 역시 작은 장점은 있습니다. 진실로 그르다면 군자를 배척해도 되고, 진실로 옳다면 소인을 써도 됩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도리는 결코 편벽되어서는 안됩니다(≪英祖實錄≫권 63, 영조 22년 5월 정유)

 라고 한 말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사림정치에서 君子란 사대부(士類)만을 지칭하는 뜻이므로, 이는 사대부만으로 정치가 운영될 수는 없다는 의미도 된다. 또한 趙顯命이나 宋寅明 같은 완론탕평파 대신들, 그리고 이들을 중용한 영조 자신까지도 송대에 출발한 사대부 우위론의 핵심인 ‘名論’을 싫어했고, 또 평소에 명론의 보루인 유학자를 싫어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실제로 조현명은 남인 金聖鐸의 상소문 내용이 당시 군주인 영조가 숙종의 庶子라는 부분을 드러냈다고 해서 명론의 죄인이라고 공격받자, “조정에 名論이 지나치게 일어나서, 국가 판결에 대한 의견이 공평함을 잃었습니다”라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곧 명론의 목적과 국가의 목적을 대립적으로 파악했던 것이었다. 영조 역시 “나는 명론을 좋아하는 군주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청나라 사신을 숙소까지 찾아가서 만나기도 했다. 영조 초기 완론탕평파를 지도했던 조현명의 형인 趙文命은 반대로 ‘청명’을 존중하기는 했으나, 黨弊의 핵심은 특권적 정치집단으로서 淸名의 전통을 앞세워서 자신의 이해를 지켜가고 있었던 世家大族073)조선 후기 정치상황에서 산림과 외척의 결합으로 나타난 특권적 정치집단은 名門閥族·橋木世家·世家大族들로 불렸다. 이들은 양반문벌을 형성하여 대대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경향이 일반화 되었으므로, 이미 숙종 연간에 遐遠之人과 구분되어 京華子弟라고 불리기도 했다.의 사적인 이익추구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이들 정치집단의 정치운영 모델이 통일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앞의 예들은 완론탕평론이 가졌던 입장이 남송대 주자성리학적 입장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다는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곧 영조 연간 탕평정국 하에서의 관료제 운영이 대체로 명·청대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관료제를 본받고 있었다는 특징은 어느 정도 이러한 사상적 기반이 바탕에 깔려 있으므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완론탕평론은 처음에는 박세채의 입장을 이어받은 소론계 조문명과 조현명·송인명 계열에서 주장하였고, 영조 즉위 이후 국왕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노론계 洪致中·金在魯·원경하 계열에서 수용하면서 강력한 정파를 형성해 갔다.

 영조 역시 각 당의 의리론을 ‘黨論’이라 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각 당파가 군주를 자기 당의 당수 정도로 생각한 결과, “세 당파가 각자 스스로 군주를 택하였다”074)≪英祖實錄≫권 45, 영조 13년 9월 기축.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곧 당론이란 당파가 군주권을 무시하고 스스로 필요한 의리를 만드는 ‘自作義理’라고 지목하여 파기하였다. 또한 黨人은 시비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붕당을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구분하는 자체를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비록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도 현명한 자식과 불초 자식이 있는데, 하물며 가족으로 전수되어 내려가기도 하는 당파의 그 많은 사람이 모두 군자이고 모두 소인일 리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곧 구양수와 주자 이래의 붕당정치론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율곡 이이의 붕당정치론 역시 부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뭇 별을 거느리는 북극성이나 뭇 자식을 거느리는 아버지의 권위와 같은 군주권을 중심축으로 하여 각각의 의리를 조제하고 각각의 인재를 보합함으로써 만이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왕도를 공평무사하게 펼 수 있다는 것이었다.075)朴光用, 앞의 글(1984).

 영조는 붕당만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 정치 곧 士論 내지 청의·명분론에 의해 움직여지는 정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의리를 주도한다는 산림집단이 도리어 임금을 무시한다고 비난하기도 했고, “나는 명분을 좋아하는 군주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기도 해서, 사관들이 “평소에 유학자를 싫어하셨다”는 비판적 평가를 실록에 올리기도 했다.

 영조는 만년에 탕평책 아래서 군주의 위치를 “집 짓는 데 비교한다면, 한쪽 가장자리에는 옛 재목을 쓰고 한쪽 가장자리에는 새 재목을 쓰는데, 그 위에다 대들보를 올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곧 각 당파의 인재들을 쓰되, 최종적인 의리는 국왕이 장악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군주권 건설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영조는 실제로는 완론탕평파를 주로 중용하고, 이들을 자신의 외척으로 끌어들여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므로, 새 재목으로 표현되는 신진사대부 세력을 가려 쓰는 부분에서 정치적 한계성이 야기되었다. 영조 개인의 통치 스타일에서 연유된 파격적인 정국운영이 가끔씩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는 부차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말년의 정국은 이른바 완론탕평파의 상호 연혼관계로 형성된 새로운 특권 권력층이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으로 흘러갔고, 이 여파로 많은 정치적 혼란도 야기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정국운영론은, 영조 초반부터 반탕평론이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준론탕평론도 영조 초반부터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존재하였다. 또 이들의 정국운영 모델 역시 커다란 편차가 있었다.

 영조 초반에는 忠逆과 義理를 혼란시키므로 탕평을 반대한다는 반탕평론이 우세하였다. 노론계 산림세력을 위시한 강경파와 소론계 강경파, 그리고 영조 연간 정권에서 가장 소외되었던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재야 남인세력은 대체로 탕평정치에 부정적이어서, 대체로 반탕평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 기본적인 주장은 시비를 밝혀서 군자당이 자기 당임을 확실하게 한 연후에야 탕평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곧 당시 추진된 탕평은 붕당타파에만 촛점을 맞춘 나머지 충역과 시비를 혼란시켰다는 것이었다.

 노론 반탕평론자들의 정국운영 모델은, 영조 7년(1731) 노론계 산림인 尹鳳九가 올린 다음의 상소문에서 잘 알 수 있다.

先正臣 송시열이 또 효종께 아뢰되 “朱子의 시대는 지금 시대와 아주 가깝고 時世의 만난 바도 지금과 꼭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하나하나 다 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시대의 선후는 오백여 년이나 되고 나라의 크기로는 中華國家와 方外國家라는 구별이 있지만 주자의 말씀을 쓸 수 있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노론)당이 번성할수록 국가도 더욱 안정됩니다(≪英祖實錄≫권 30, 영조 7년 7월 무인).

 현재 상황이 남송 때와 똑같다는 것이었다. 곧 ‘醇正朱子性理學’의 사회적 적용은 여진족과 대결 국면의 국가체제를 채택했던 남송 체제를 모델로 해야 한다는 점을 뚜렷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만동묘 건립으로 상징되는 尊周攘夷의 名論에 투철할 것이 요구되었고, 현실적으로는 명문 양반 문벌이 주도하는 정치체제 역시 긍정되었다. 하다못해 “임금도 군자의 당파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던 주자의 말을 받아들여서, “나도 율곡의 당이 되겠다”고 했다는 선조 임금의 말이 후세 임금들이 본받아야 할 전형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준론을 표방하면서도 탕평정국에 참여한 노론계 인물들은 그 경향이 조금 달랐다. 예컨대 영조 중반이후 노론세력의 중요한 지도자였던 李天輔는 붕당의 타파와 氣節의 숭상을 병행하는 방향에서 조제보합의 폭을 넓히자고 주장하였다. 당시 노론계 산림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朴弼周는 실질을 보다 강조하는 한편, 송시열이 세운 존주양이설에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076)朴弼周,≪黎湖集≫권 32, 三得錄. 곧 대체로는 송시열이 남긴 유언대로077)≪肅宗實錄≫권 21, 숙종 15년 6월 무진. 남송적 체제와 효종 연간의 정국운영 방식을 그대로 지켜 나간다는 정치모델의 의제적인 의미는 인정하지만, 실제 정국운영에서는 그 모델에 비판적인 분위기가 인정되고 있었다. ‘육경고문’을 학문의 출발로 하는 李縡와 金昌協의 학통에서, 중국 한나라의 훈고학에서 출발하여 송나라의 학문(宋學;성리학)을 비판하는 실증적 학풍을 지닌 명말청초의 반성적인 經史學이나 이후의 考證學을 수용해야 한다는 학풍이 대두하면서 북학파로 이어진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들은 노론의 핵심세력인 서울지역에 대대로 거주하는 京華閥閱을 그 구성원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론계에서는 柳壽垣과 鄭齊斗의 경우에서 나타나듯이 명과 청의 정치운영에서 볼 수 있는 강력한 군주권과 그에 입각한 군현제적 관료제 내지 그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체계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양명학적 분위기를 선호한 것 같다. 이후 江華學派와 연결되는 정파에서는 이를 지켜 나갔으나, 한편에서는 다시 주자성리학의 정통을 고수하는 입장으로 되돌아 갔다.

 남인계는 청류를 표방해서 淸南으로 불린 정치집단이 영조 연간부터 정계에 진출하였다. 영조 초반 청남의 지도자였던 吳光運은 ‘色目中名流’를 발탁하는 탕평을 실시하여 청의와 명절을 존중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곧 각 당파의 준론세력을 조제하는 탕평을 주장한 것이었다.078)재야에 머물렀으나 이들과 친밀했던 성호 이익에게서도 오광운과 같은 입장의 준론탕평론이 나타난다(李瀷,≪星湖先生僿說≫권 11, 人事門, 蕩平). 이들은 기호지방 출신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는데, 육경고문을 바탕으로 서한(前漢)에서 나타나는 봉건제적 분위기와 군현제적 분위기를 결합시킨 군국제적 관료제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보다 고전적이라 할 수 있는 강력한 군주권을 선호한 것으로 보여진다. 학문적 입장으로는 숙종 연간 許穆의 학문적 입지를 따라서 六經古文을 탐구하거나 한·당대 문화를 연구하는 방향으로 체계화되었다.

 국내 先代에서 찾는 운영모델은 실제 정국을 반영하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노론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서인계가 북벌론을 내세우면서 의리주인을 차지하여 국가운영의 대세를 장악하여 갔던 효종 연간의 정국을 가장 모범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노·소론 대립 이후의 국내 정국운영의 모델은 효종 연간이 아니고, 노론의 의리를 옳다고 판정한 숙종 연간 병신처분 단계의 방식을 긍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론은 대체로 인조 연간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서인과 남인에 의한 붕당정치 체제가 제 기능을 발휘하였던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윤증이 박세채에게 서인과 남인의 원한관계를 해소할 수 있어야 정국이 제대로 운영된다고 주장했던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이이가 체계화한 이상적인 붕당정치를 바탕으로 하지만 多朋黨政治의 운영형태도 안정된 관료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남인은 대체로 중종 연간에서 인종 연간 사이에 사림정치 이념이 본격적으로 내세워진 첫 단계의 시기를 특히 좋게 보고 있었다. 이는 정국운영을 주도하지 못한 소수파였던 사림계이지만 정치원칙인 의리는 주도하였으므로, 결국 크게 볼 때 국가운영의 방향을 확립했던 보다 복고적이고 이상적인 시기를 존중한 것이라고 하겠다.079)이상의 서술은 朴光用, 앞의 글(1985)을 주로 참조함.

 그러나 영조 통치 후반기가 되면 소론계 반탕평론자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노론계 반탕평론자들의 핵심인 산림세력도 그 정치적 입지가 계속 약화되었다. 이 때부터 노론계에서도 준론탕평론이 보다 강력한 세력으로 결집되어 가게 되었다. 곧 탕평론은 이후 탕평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대체로 70년간 정국의 대세를 이끌었다. 영조 연간은 ‘완론’을 표방한 정치집단을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었다. 영조대 후반 을해옥사 이후 정권은 대체로 노론당이 독점해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당의 정치운영 모델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 때 정계에 진출했던 남인계 일각에서는 명말청초 顧炎武·黃宗羲 같은 지식인들의 반성적인 사회개혁 구상을 연구하고 있었고, 소론계 일각에서는 명·청대 관료제 사회와 황제권 문제가 연구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영조의 탕평책 실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환국으로 점철된 정국운영기 전후부터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당쟁을 사적인 이익추구의 도구로 만든 특권적인 명문벌열을 견제하는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 곧 탕평정국의 목표는 붕당의 와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쟁의 폐해를 더욱 크게 한 것은 당쟁의 핵심에 특권적 권력집단이 존재했다는 데에도 있었다. 이는 영조에게 완론탕평론을 최초로 진언하여 깊은 신임을 받고, 후일 그의 딸이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기도 했던 완론탕평파의 지도자 조문명의 탕평소에도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영조대 탕평 정국은 정국운영을 황폐화시킨 근본이 되어 버린 ‘붕당’ 자체를 타파야 한다는 표방이 전면에 내세워지면서 진행되어 갔으므로, 그 목적은 붕당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 붕당 자체를 정치세력의 위치에서 제거 내지 탈색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어 보겠다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탕평정책의 적용이라는 정치 현실은 당시 산업 발달로 나타난 사회변화 현실과도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농업에서는 이앙법의 전면적인 보급과 이에 따른 企業農的인 廣作의 확대, 그리고 상품작물의 재배 확대같은 생산력 향상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이는 18세기 중엽 전후 시기부터 전국적인 장시망의 활성화와 도시로의 富의 집중화 현상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변동을 그 밑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서 성장하는 도시와 지방의 서얼·향반·기술관료 같은 중간계층들이 관료세력과 연결되었고, 이들이 도시의 상권과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던 사회계층의 변동 양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중소지주적 기반을 근본으로 하는 사대부 체제는 지주전호제의 확대로 인한 대지주와 서민지주의 대두 및 생산력 증대에 따른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해서, 일반 백성의 파악 방식과 지방 지배방식의 변화, 국가 운영비의 합리적인 염출과 조절 같은 통치방식의 개혁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호포제 실시 논의들이 계속되었고, 균역법을 추진하면서 ‘均’은 바로 ‘大同’정책이라고 표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080)朴光用, 앞의 글(1984), 253쪽.
이「大同」론은 양반과 평민이 함께 모인 향회라는 논의구조와 함께 19세기에는 일반 백성의 사회의식으로 수용되었다(安秉旭,<19세기 민중의식의 성장>≪1894년 농민전쟁연구≫ 3 , 역사비평사, 1993).
이러한 정책 변화가 탕평을 표방한 정치운영과 같은 궤도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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