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 1) 탕평책 시행
  • (3) 정국의 추이

(3) 정국의 추이

 제 1기는 즉위 후부터 영조 5년(1729) 기유대처분 전단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탕평을 표방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이전과 같은 일당 전제적 환국정치의 형태를 취했던 시기였다.

 소론정권하에서 즉위한 영조는 다음 해에 자신을 왕세제로 옹립해 주었기 때문에 참화를 당한 노론 1당을 중심으로 환국을 시켰다. 즉위 초에는 숙종대 처럼 환국의 정치형태를 취해서, 소론 및 남인세력은 일단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어서 영조 2년에는 신임의리 문제를 놓고 노론 任徵夏의 상소로 큰 파란이 일어났다. 이 상소문의 내용은 영조에게 씌워진 의혹을 없애려면 경종의 약점(고질병)을 중외에 공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경종에 대한 ‘大不敬 大不道’로 인식되었고, 이 때 소론과 남인들은 임인년 옥사에 대한 경종의 처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의리라고 이를 공격하였다. 이는 노론계에서 숙종대와 같은 명실상부한 일당 전제적 환국을 도모하려는 데 대한 반발이어서 정국이 대단히 어지러워졌다.

 영조 3년(1727) 7월에는 淸論을 표방했으나 소론세력 중 緩論의 지도자였던 趙文命들을 중심으로 해서 丁未換局이 되고, 이로써 노론이 모두 물러나고 소론 峻論의 지도자 李光佐가 국왕의 特旨로 영상에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정치상황을 안정시키는 한편, 탕평을 정치이념으로 표면화시키기도 했다. 이 환국은 탕평을 내세웠기 때문에 소론과 남인의 보합이 가능했지만, 실은 노론의 견제를 위하여 남인을 이용한 경우로서, 소론 일당의 환국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영조 자신은 이 전후시기에 소론 조문명 계열과 노론 洪致中 계열 같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 정치집단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결국 2년 뒤 기유대처분 이후의 탕평정국을 성공시키기 위한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다음 해 3월에 일어난 영조 4년 무신란은 경종을 시해하려 했던 음모로 지목된 이른바 三手逆案 및 경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영조가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의혹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이 병란은 사대부층이 주도했던 대규모의 반정 시도에서 출발하였다. 이에는 소론 및 남인의 명문 가문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실제로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반란군을 이끌었던 李麟佐와 鄭希良은 남인의 명문가문으로서 각각 尹鑴의 손녀 사위, 鄭蘊 봉사손의 맏아들이었다. 趙光祖의 봉사손이었던 趙文普까지도 이들의 의리에 동조하여 반정 시도에 가담했던 형편이었다. 또 許堅의 조카인 許澤, 張希載의 아들인 張輝도 참여하고 있었다. 소론 측에서는 경종비의 동생인 沈惟賢 및 평안병사 李思晟과 朴必顯 등 이광좌의 문인들이 중심세력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신란에 가담했던 소론계와 남인계 급진파는 이후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다음 해 기유대처분이 발표됨으로써 비로소 탕평이 정국운영론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곧 붕당의 타파를 전면에 표방하는 탕평은 무신란의 충격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제 2기는 영조 5년 기유대처분 이후 영조 16년 경신처분까지의 시기이다. 무신란을 계기로, 영조는 당파적 의리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군주권 앞에서 붕당은 타파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완론 중심의 노론과 소론계 탕평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 때 소론 완론 대신인 조문명·송인명은 이 변란을 안치하면서 남인에게 의도적으로 죄를 덮어씌우는 등 노론과 소론계의 보합에 의한 탕평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영조 5년 6월경부터는 당론을 벗어나지는 못했어도 名節을 지키는 실력있는 준론을 조제보합하는 탕평을 ‘진정한 탕평’이라고 내세웠던 소론과 남인계 정파 역시 당론에 물들어 있다고 공격당함으로써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곧 노·소 완론세력의 의리를 조제하고 인재를 보합하려는 탕평이 실시된 시기였다.

 제 3기는 영조 16년 경신처분 이후 영조 31년 을해옥사까지의 시기이다.

 영조 16년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전기가 된 해였다. 신임옥사에 직접 관계된 당사자들이 이 시기가 되면 거의 다 사망하였다. 이후 이 때까지 인물 중심의 보합에 치우치던 탕평이 제도적으로 보완되었다. 곧 이조낭관의 通淸權과 한림의 回薦法이 개혁되어, 自代制의 전통으로 유지되었던 관료체제에서의 淸要職으로의 지위가 제거되었다. 이후 관료의 위계질서가 강화되고 탕평파 재상에게 권한이 집중됨으로써 완론 중심의 탕평파 정권이 오랜 안정기를 맞게 되었다.≪續大典≫도 이 시기에 편찬되었다. 또 金昌集·李頤命이 신원되어, 신임옥사로 죽임을 당한 老論 四大臣이 모두 복권되었다. 곧 이제까지 정국을 혼란시켰던 주요 쟁점이 일단 없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노론 김재로, 소론 송인명·조현명으로 구성된 정권이 대략 12년 정도 相府를 독점하면서 정국을 이끌어 갔다. 바로 이 시기가 영조 득의의 탕평이 실시되었던 시기였다.

 이 때 완론탕평파 일각에서 제기된 ‘大蕩平論’은 노론계 정파에서는 처음으로 4색 당파의 조제보합을 주장한 것이었다. 곧 노론·소론·남인 연합의 정파가 탕평파 안에서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정파는 신임옥사가 기사환국 전후의 당국자인 남인·소론에게 있다고 하는 대부분의 노론세력과, 기사환국 당시의 의리를 고수하고 있던 대다수의 재야 남인세력에게 모두 시세에 아부하는 행위라고 비판되었다. 그러나 이를 주창했던 노론 완론계열 지도자 元景夏는 노론세력이 내세운 ‘辨君誣’라는 표방이 곧 당론이라고 비판하였다. 오히려 영조의 임금으로서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주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그 근거가 되는 ‘睦虎龍 鞫案’을 소각하고, 대신 ‘大訓’을 편찬하여 의리를 분명히 해서 영조의 입장을 안정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영조의 뜻에 부합되어 그대로 받아들여져 시행되었다. 이 때문에 후일 金省行·白望 등이 영조에게 충성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신원될 수 있었던 것이다.081)그러나 당시 일부 노론 계열, 예컨대 후일 청명당계로 이어지는 정파의 스승인 李縡 같은 반탕평파 인물이나 元景夏 같은 탕평파 인물들은 노론 내에서 특권적 권력을 유지하려고 공명을 탐하기도 했던 이들 세력과 자신의 세력기반을 변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상당히 퍼져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 시기에 노론계 일각에서는 준론탕평론을 주장하는 세력이 성장해 가고 있었고, 청남 계열도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노·소 완론세력은 척신들이 주도하는 당으로 변해 갔다. 곧 영조 26년(1750) 균역법 실시를 전후로 해서는, 왕실 외척이 실제 정국운영을 주도하는 이른바 탕평당의 전권이라는 상태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정국운영의 결과, 이후 시기 내내 왕위계승권자의 위치가 약화되고 위협받는 사태까지 초래되었다. 따라서 정조 연간에는 외척세력의 정치간여 배제를 포함해서 보다 정치원칙론에 충실한 준론계 정치집단을 중심으로 정국운영을 해야 한다는 준론탕평론이 수용되는 바탕이 마련되어 간 시기이기도 하다.

 제 4기는 영조 31년 乙亥獄事에서 영조 38년 사도세자 폐출 시기까지이다.

 영조 31년 2월부터 시작된 을해옥사는, 이제까지 군주권을 강화해 왔던 영조가 왕실과 가까웠던 李宗城·朴文秀 등 몇 명의 인물을 제외한 朴師緝·朴纘新 등 소론 준론의 명문 가문과 柳壽垣·沈金隺·申致運을 비롯한 우수한 학자들을 500여 인이나 사형에 처한 과감한 정변이었다. 이 옥사로 소론계는 집권 관료세력 안에서는 소수의 정파로서 존재할 수 있었으나, 준론·완론을 불문하고 자신의 色目을 더 이상 내세울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후는 소론 준론의 마지막 남은 지도자였던 李宗城이 지도하는 세력과 蔡濟恭이 지도하는 청남세력이 긴밀한 동지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게 된다. 남인세력은 이후 노론세력 중 李天輔의 東黨 및 兪拓基의 中黨 계열과 일정한 유대관계를 가졌던 소론 이종성 계열과 함께 왕세자(사도세자) 보호에 진력하였다. 곧 청남세력은 이후 소론준론의 위치를 대신하여 독자적으로 준절한 의리를 지키는 준론 계열 정치집단으로서, 완론 계열 및 외척당에 대항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굳혀 나가게 되었다.

 이 을해년 옥사 이후 노론계 3相政權이 장기간 계속되었는데, 이는 탕평이 표방된 영조 연간에서는 예외적인 기간이었다. 이 시기 정권은 대체로 여러 척신계가 연합하는 형태로 이끌려갔다. 이 척신정치 문제와 이 시기 전후 집권층에 불만이었던 사도세자의 처신문제로 해서, 노론계는 동당·남당·중당의 3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思悼世子 측근의 신하들 중에 소론과 남인계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노론 재상 김재로가 세자의 정치적 경향성을 실험해보기 위해서 대리청정을 권했다는 지적들도 이 시기 전후 정치사 관계 기록에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목적을 가진 왕세자 대리청정기에 이 괘서사건을 시작으로 소론계를 탄압한 옥사가 터졌는데, 옥사 당시 사도세자의 처신문제가 후일 사도세자 죽음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제 5기는 임오년 사건(壬午禍變;1762) 이후 정조 대리청정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국왕과 혼인관계에 있는 인척세력의 전횡을 초래하여 이들의 합종과 연횡에 의해 정국이 운영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때 洪鳳漢을 중심으로 한 북당과 金龜柱를 중심으로 한 남당의 대립이 있었다. 이 때 이들을 외척당이라고 비판하는 정파로 노론계 일각에서의 청명당이 있었는데 중립적인 유척기 계열, 준론탕평파인 이천보 계열, 완론탕평파에서 변신한 金致仁 계열, 반탕평파에서 합류한 尹汲 계열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로 구성되었다. 학통은 대체로 이재와 金昌協 및 朴弼周를 잇는 洛論계였다. 이들은 당시 외척이 주도해 간 정국을 견제·비판하였다.

 또 하나의 당시 정국의 견제세력은 의리·명절의 숭상과 붕당의 타파를 병행하는 방법을 찾아서 추진하자는 주장, 곧 의리에 준엄한 인물들을 조제보합에 이르게 하자는 준론탕평을 주장하는 沈檀·吳光運·채제공으로 이어지는 淸南계열과, 이종성·박문수에서 이어지는 소론 준론계 정파들이 있었다. 이 세 정파는 당시 느슨한 연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들 준론 계열 정파는 후일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아서 정조 연간의 집권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반면에 사도세자 사건 이후 정권을 장악한 완론 및 외척으로 구성된 세칭 탕평당 계열은 정조대 중반경까지는 권력집단에서 거의 도태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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