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 3) 기본 법전의 정비

3) 기본 법전의 정비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經國大典≫이 성종 5년(1474)에 반포된 이후 곧 성종 23년에는≪大典續錄≫이 나왔고, 이후 중종 38년(1543)에는≪大典後續錄≫, 명종 10년(1555)에는≪經國大典註解≫, 숙종 24년(1698)에는≪受敎輯錄≫이 편찬되면서 계속 보완되어 갔다. 특히≪수교집록≫은 동일 사항에 관하여 앞뒤의 수교가 서로 모순될 경우에는 뒤의 수교가 우선한다는 원칙을 분명하게 밝혀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시대가 바뀌고 법령이 계속 증가되면서, 시대에 맞지 않거나 상호 모순되거나 번잡해진 경우가 아주 많았다. 이에 “관리들은 법을 집행하는 데 혼란스럽고 소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085)≪續大典≫小識. 등 법적용에 상당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 때문에 숙종 14년에는 박세채가≪경국대전≫에 대신할 법전으로≪續大典≫을 편찬하여 법제도를 새롭게 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숙종 32년 여러 법령들을 찾아보기 편하게 앞의 책들을 분류하여 하나로 모은≪典錄通考≫가 편찬되었을 뿐이다.

 원래 법전이란 국가의 정책을 구현하는 수단은 법에 있다는 법치주의를 그 바탕으로 한다. 이는 통일적이고 획일적인 통치를 필요로 하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요청이었다. 영조 즉위 후 새로운 법전을 편찬해야 할 이러한 필요성들이 다시 검토되었고, 결국 영조 16년(1740)에는≪속대전≫ 편찬이 시작되었다. 그 기준은≪경국대전≫이후의 수교 중에서 영구히 준수할 수교를 가려서 이에 준하는 법전을 편찬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구법을 새롭게 밝힌다는 입장이기도 했다. 이는 또한 우리 사회에 고유한 판례법이나 관습법을 계속 成文法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드디어 7년 뒤인 영조 22년 4월에≪속대전≫은 간행되어 반포되었다.086)이상의 내용은 朴秉濠,≪韓國法制史攷≫( 法文社, 1974)를 주로 참고함.

 이 법전은≪경국대전≫의 총 213항목 가운데 이후 개정 또는 증보된 137항목과 새로이 추가된 18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경국대전≫과 맞먹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이로써 조선 후기에 신설된 衙門들과 중앙 및 지방제도 운영에 도입된 새로운 관행들이 법제화되었다. 또한 새로운 量田法 및 宮房田 규정, 토지세·대동법을 포함한 조세제도 관련 조항, 奴婢訟 및 山訟 같이 조선 후기에 격화되어 간 사회문제 처리 규정들도 법제화되었다.

 특히 중요한 부분은 기본 법제화된 신설 아문들이다. 최고 정책 결정 기구로서의 비변사, 가장 큰 세입원인 대동미 출납을 담당하는 선혜청, 조선 후기의 새로운 군사제도로 정비되어 간 5군영, 곧 훈련도감과 禁衛營·御營廳·守禦廳·摠戎廳이 비로소 대전에 수록되었다. 탕평 추진을 위해 개혁한 청요직 혁파 규정들도 역시 대전에 수록되었다. 변화된 지방 군제, 도성의 일반 치안을 담당하는 포도청 역시 이 때 수록되었다.

 이 밖에 중요한 규정으로는 집약농업 진흥을 위한 堤堰을 비롯한 水利를 관할하는 堤堰司, 科擧 및 取材시험 규칙, 奴婢從母法의 확정, 銀店과 蔘商, 토지·노비 매매 관계 조항, 오가작통법이나 호적법 관행, 강상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범죄 처벌 규정 등이 있다.

 당시 영조는 정치적으로는 ‘大訓’, 사회적으로는≪續五禮儀≫, 법적으로는≪속대전≫을 3대 편찬사업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사업을 다 이루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087)≪英祖實錄≫권 60, 영조 20년 12월 갑진. 곧≪속대전≫은 영조가 구상했던 새로운 조선 후기 국가체제의 법적·제도적 완결을 의미한다.

 이후 정조 5년(1781)에는≪경국대전≫과≪속대전≫을 통합하고, 이후의 수교와 시행되고 있는 새로운 法例들을 추가하여 일관되게 정비한 기본법전을 만들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정조 9년≪大典通編≫의 편찬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균역법 실시에 따른 변화된 조세제도, 규장각 설치와 이에 관계된 초계문신제도 등의 법령을 대전에 수록하여 기본법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속대전≫과 마찬가지로 신설된 衙門들과 중앙 및 새로운 首領 考課法을 포함한 지방제도 운영에 도입된 새로운 관행들도 많이 법제화되었다. 서얼허통 관계 법규(한품서용절목;정조 1) 및 노비신공 감소 규정들도 백성의 파악방식에 대한 변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刑典의 推斷 조목에서 대전에 수록되지는 않았으나 이제까지 금지되어 왔던 금지형벌 규정을 영조 연간부터 시행되어 온 형벌의 완화라는 기본입장에서 특별히 법제화하기도 했다. 이 밖에 새로 설치된 아문으로는 새로운 도성수비체제 확립 이후 도성 중시 정책의 하나로 영조가 설치한 도성의 하천 준설을 관장하는 濬川司가 있고, 군영 관계로는 宣傳官廳이 새로이 법제화되었다.

 이 역시≪속대전≫편찬 이후 계속된 탕평책으로 변화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신속한 기본법 전화를 의미하는 것이다.≪대전통편≫편찬 이후에 변화된 중요한 사항으로는, 정조가 마지못해 허락했던 吏曹 郎官 통청법 복구 조항이 다시 폐지된 것과, 5군영을 일원화하여 국왕의 군통수권을 강화하려 했던 장용영의 설치, 배다리 건설에서 시작하여 후일 水軍까지 관할하게 된 舟橋司의 설치, 국가가 공권력으로 도망 노비를 찾아주던 奴婢推刷法의 폐지 등이 있는데, 이 중 장용영은 결국 계속 제도화되지 못하고 순조 2년(1802)에 폐지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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