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 4) 군영 정비와 군주권 강화

4) 군영 정비와 군주권 강화

 병권은 정치권의 권력행사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의 하나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원래 군대의 지휘·명령권이 국왕에게 있었다. 군영은 곧 국왕의 권력행사를 보장하는 물리력이었다. 동시에 권력의 변화 과정에 따라 군대조직 역시 변화를 겪게 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초부터의 군제인 오위제가 유명무실함이 드러나자, 선조 27년(1594)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반정공신들이 자신의 군사력을 유지하려는 문제와 맞물리면서 인조 2년(1624) 후금과의 대결 국면에서 어영청이, 같은 해 李适의 난 이후 경기도 지방군을 바탕으로 한 총융청이, 정묘호란 이후인 인조 12년에 남한산성 수비를 담당할 수어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숙종 8년(1682) 군역변통 논의 과정에서 척신 계열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금위영이 설치됨으로써 5군영제가 완성되었다. 곧 5군영제는 전체적인 계획 아래 한번에 설치된 것이 아니고, 정치적 역관계의 변화를 초래하는 격변 속에서 완성되어 갔던 것이다. 영조대에 있었던 군영의 재정비도 여타 체제의 정비와 마찬가지로 당시 정치권을 병력을 동원한 반정으로 뒤엎으려 했던 영조 4년(1728) 무신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088)이하 군영 정비 관계는 李泰鎭,<三軍門 都城守備體制의 確立과 그 變遷>(≪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 육군본부, 1977)을 주로 참조함. 이 때부터 붕당의 타파라는 정치원칙을 긍정하는 탕평의 정치운영론이 현실 정치에 실제로 적용되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권력기반 강화의 토대로서 군영체제의 재정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때 군영의 정비는 도성 수비체제의 확립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군영의 정비가 특징이었다. 이는 병조판서가 통솔하는 통일된 편제에 의한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 도성수비체제 완성으로 나타났다. 중앙군을 3군문 주축으로 구성하는 방안은 숙종 29년에 설치되었던 이정청에서 제기하였으나, 완전한 실시를 보지는 못했던 신편제이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5군영 창설 이래 계속되어 왔던 양역(군역)변통 논의를, 균역법 실시로 확정함으로써 안정된 군사재정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각 군영의 軍權은 군주권 주도의 개혁정책을 지지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완론탕평파 세력이 장악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이들은 왕실과 연혼관계를 맺어 나갔고, 이에 따라 정치세력도 재편성되어 갔다.

 영조 4년 무신란 때 淸州를 점령했던 李麟佐의 반란군은 漢城을 점령하기 위해 북진하다가, 安城과 竹山 전투에서 병조판서 吳命恒이 직접 지휘한 관군에게 패하여 그 목적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토벌군의 편성과정에서 각 군문 사이의 일사불란한 통솔이 어려웠던 문제점이 드러났다. 또한 반란군이 도성 안 내응자의 힘을 빌리려 했다는 사실들이 드러났다. 이는 곧 도성수비의 허점이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正言 權赫이 성안에 있는 자는 朝士·儒生·坊民 모두를 行伍에 편성시키고, 대신의 영솔 아래 각기 맡은 바 城堞을 지키게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때 도성수비체제를 강화할 필요성을 확실하게 깨달은 영조는, 이후 15년에 걸쳐서 삼군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성수비체제를 만들어 갔다.

 영조 13년 11월에는 금군의 규모를 강화하는 절목의 개정이 있었다. 21년에는 도성의 보수를 위한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담당구역의 획정이 있었으며, 22년 12월에 도성 보수공사가 끝났다. 이어 다음 해 2월에<守都節目>이 마련되었으며, 26년 9월에 그 완성을 의미하는<守城綸音>이 반포되었다. 이 수성윤음은 도내 방민에게 배포되었다. 윤음에 정리된 내용을 보면, 도성의 수비를 맡은 군영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이었다. 각 군문은 도성 수비를 3구분하여 담당하였는데, 도성 내의 5부 방민은 군문 구역과 거리에 따라 각 군문에 분속되었다. 그리고 각 군문은 담당한 구역을 각각 전영·좌영·중영·우영·후영의 다섯부대로 나누었다. 곧 도성 내의 5부 방민은 모두 계로 묶여져서 각 군문의 5영에 분속되었다. 또한 효종 이후 강화되었던 守禦廳은 3군문체제 확립과 양역변통 과정에서 그 편제가 자주 바뀌었다. 곧 영조 26년 7월에 廣州 留守가 守禦使를 겸하였고, 守禦京廳이 폐지되면서 수어청을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영조 35년에는 관원 교체의 빈번함 등의 문제 때문에 다시 수어청을 경청으로 옮겼다. 그러나 정조 19년(1795)에는 광주부가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어경청이 다시 폐지되었고, 중앙의 3군영과 달리 상비군이 거의 없이 유사시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 외곽을 방어하는 책임이 부여되었다. 이는 3군문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수어청이 점차 그 의미를 잃어 갔고, 이 때 와서는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영조는 禁軍廳도 개혁하였다. 이 역시 영조 4년 무신란이 계기가 되어서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영조 13년 병조판서 박문수에 의해서<禁軍節目>이 마련되었다. 이를 참고하면 중간 관직인 당상군관의 수를 15員으로 늘리고(이전은 10員) 교련관도 2窠를 늘리되(종전 10과), 이들 자리를 금군 출신에게 보장하도록 함으로써 금군의 처우를 개선한 점이 특징이다. 또한 취재에 합격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금군을, 무반 가문의 경우는 추천에 의해서도 가능하게 하였다. 영조 30년에는 병조판서가 겸임하던 금위대장을 별도로 임명하였다. 곧 병조판서는 5군문 대장을 위에서 통령하게 된 것이다. 이 역시 재상권의 강화를 바탕으로 군주권을 강화해 간 탕평책하의 관료 위계질서 강화정책과 그대로 연결된다. 이후 禁軍廳은 용호영으로 개칭되었고, 정조는 용호영과 별도의 또다른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하여, 이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5군영의 일원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선조 27년(1594)을 전후하여 조직된 지방군제인 속오군도 17세기 중반 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중앙 5군영 강화에 군사정책이 집중된 데다가, 효종 연간부터는 속오군에 대체로 收米收布法이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곧 실제 병력은 없는 收布軍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역시 영조 4년 무신란을 계기로 그 문제점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에 속오군도 영조 6년 9월에 20여 조의<束伍節目>이 발표되면서 새롭게 정비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대략 21만 명 이상의 규모였다고 추산된다. 기본적으로 隣里團結 魚鱗作隊를 원칙으로 하고, 營將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속오군을 편성한다는 내용이었다. 기타 결원 보충, 도피자의 처리, 위법자의 처벌, 조련법, 수령과의 관계 등의 규칙이 규정되었다. 속오군 작대는 각 읍에서 명단을 중앙에 보내면, 중앙관청에서 병조의 군안 및 한성부 호적과 대조·확인해서 허위 보고 등 폐단 발생을 방지하였다. 또 束伍給保法을 적용하여 속오군에게 1保씩을 주고 烟戶·雜役을 면제하는 동시에 매달 점검을 실시하는 등 철저한 관리를 규정하고 있었다.089)車文燮,<束伍軍 硏究>(≪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 出版部, 1973).
그러나 속오급보법은 영조 25년(1749)경부터는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농민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영조 12년에는 양민의 중복된 역부담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므로, 이후 속오군은 대체로 私賤民으로 보충되었다. 그리고 영조 34년 전후로는 다시 收布軍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朴光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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