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3.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 1) 준론탕평과 군신 의리
  • (1) 준론탕평론의 적용

(1) 준론탕평론의 적용

 정조대 정국운영에도 영조대처럼 탕평이라는 원칙이 받아들여졌다.090)정조 연간 탕평정국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있다.
鄭玉子,<正祖의 抄啓文臣敎育과 文體政策>(≪奎章閣≫6, 서울大, 1982).
―――,<正祖朝 文化政策>(≪朝鮮後期文化運動史≫, 一潮閣, 1988).
朴光用,<蕩平論과 政局의 變化>(≪韓國史論≫10, 서울大, 1984).
―――,<英·正祖代 南人勢力의 政治的 위치와 西學政策>(≪한국교회사논문집≫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正祖연간 時僻黨爭論에 대한 재검토>(≪韓國文化≫10, 서울大, 1990).
鄭奭鍾,<丁若鏞(1762∼1836)과 正祖·純祖年間의 政局>( 高柄翊先生回甲紀念史學論叢≪歷史와 人間의 對應≫, 한울, 1985).
李泰鎭,<正祖의「大學」탐구와 새로운 君主論>(≪李晦齋의 思想과 그 世界≫,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92).
―――,<正祖-儒學的 계몽 절대군주>(≪韓國史 市民講座≫13, 一潮閣, 1993).
裵祐晟,<正祖年間 武班軍營大將과 軍營政策>(≪韓國史論≫24, 서울大, 1991).
그러나 동시에 정조대 탕평은 영조대의 탕평정국을 비판하면서 출발하였다. 비판의 기본 관점은 사림세력의 정치원칙인 의리문제를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권력자에 그저 추종하는 무리들을 중심으로 당색을 갖추어서 함께 추천하고 구색을 맞추어 쓰면 된다는 互擧雙對를 진정한 탕평으로 착각했고, 이 때문에 이른바 蕩平黨 만의 탕평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결과는 당쟁의 폐단을 확대시키기도 했던 척신정치의 부활을 초래하였고, 척신들의 이해관계나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왕위계승권자의 위치도 함께 흔들리는 등의 폐해가 다시 나타났는데, 이 점을 군주인 정조는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국운영은, 사대부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이기도 한 ‘世道’ 전체를 타락시켰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완론계 정파 중심의 탕평을 비판한 것이었다.091)이하 주를 붙이지 않은 내용은 朴光用, 위의 글(1984·1985·1990)에 주로 의거함.

 그래서 정조대의 탕평은 정치원칙을 존중하는 淸議·峻論을 지켜나가는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 곧 진정한 의리에 바탕을 두는 탕평이 그 출발부터 전면적으로 표방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타락한 세태를 이상적인 시대의 수준으로까지 회복하게 한다는 挽回世道를 시대적인 표방으로 내세웠다. 이는 영조가 표방했던 聖君政治論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또한 이미 영조 연간부터 존재해 왔지만 부차적 주장에 머물렀던 준론탕평론을 정조 연간에는 본격적으로 정국운영에 적용하겠다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동시에 영조대에 덜 존중되었던 주자성리학(宋學)적 실력을 보다 존중하는 바탕을 유지해서, 군주권이 보다 넓은 지반을 가지도록 강화하겠다는 선택이기도 했다.

 준론탕평론은 의리의 변별을 보다 중요시하지만, 붕당의 타파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긍정하는 견해이다. 곧 이를 모두 이룰 수 있는 의리로써 조제하여 인재를 보합하자고 함으로써, 탕평의 근본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영조 연간 노론 준론계의 핵심적 지도자였던 李天輔는 다음과 같이 사림정치의 기본 원칙인 義理와 사대부로서의 명예와 지조인 名節을 모두 지켜내면서, 동시에 붕당의 타파를 병행하는 방법을 찾아서 추진하자고 했다.

臣은 지금의 붕당을 없애기 전에 기개와 절개가 먼저 망해서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말이 黨論에 관계되어도 그 말이 옳으면 옳은 일을 하는데 해롭지 않고, 당론이 아니라도 그 일이 그르면 이를 그르다고 해야 해롭지 않습니다. …지극하고 공정하게 임하면 만물은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李天輔,≪晉庵集≫권 4, 應旨疏).

 정조대 노론계 집권 주류에 이어지는 선배 정치가였던 兪拓基도 소론계 李宗城과 연합해서 척신정치에 대항하면서, “그 사람이 가진 의리가 옳으냐가 중요하므로, 그 사람이 가진 당파 색깔은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재야 학자로 머물렀던 성호 李瀷도 탕평의 핵심은 치우치지 않는 데 있다고 하면서, 이는 품성과 기질이 전혀 다른 북쪽 연나라 사람과 남쪽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갈 수 있다거나, 친족과 풍습이 다른 부부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이므로, 뜻과 지력을 모아 공동의 이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탕평이 안되는 근본 원인은 ‘貴勢子弟’ 곧 양반문벌 때문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었다.092)李瀷,≪星湖先生僿說≫권 11, 人事門, 蕩平. 이러한 준론탕평론은 정조 연간 남인 계열의 유력한 정치지도자였던 丁範祖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는 人心이 각각 다르지만 조화시키면 하나가 되듯이 黨心이 각각 대립되지만 조화시키면 나라를 잘 이끌게 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요컨대 전근대 성리학적 사회의 정치원칙인 의리에 준엄한 인물들의 원칙을 조제하고 인재를 보합하는 데 이르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완론탕평론과는 환국 형태의 정국운영을 부정하는 입장과, 군주권 강화와 관료제 강화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정조 연간에는 영조 47년(1771) 전후에 淸流093)원래 「淸流(淸類)」는 일반 사대부(縉紳)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집단을 말한다. 조선에서 사림세력이 정국을 주도한 16세기 이후는, 각 붕당 안에서 사림의 전국적인 여론인 公論을 대변하여 이를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정치집단, 곧 사림정치의 正道를 걷는 정파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를 표방하면서 출발했던 노론 淸名黨에서 이어진 金鍾秀·尹蓍東 계열, 경종 2년(1722) 전후에 새로이 출발했던 淸南에서 이어진 蔡濟恭 계열, 峻少(少論 峻論)에서 이어진 徐命善·李福源 계열의 소론계 정파들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영조대에는 당색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두 외척세력의 정치간여를 비판하는 정파였다는 점이 공통점이었다. 곧 외척 및 그들과 밀착된 특권적 정치집단의 정국 주도를 배척한다는 기본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094)노론 청명당 계열은 유척기·이천보·尹汲·金致仁들이 영조 연간 초기 지도자였다. 이들 중에서 다수가 경주 김씨 외척세력과 결탁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정조 연간에는 일반적인 평가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청남(남인 청류)세력은 영조대에는 沈檀·吳光運·洪景輔·權以鎭들이 이끌었다. 소론 준론세력은 을해옥사 이후에는 李宗城·朴文秀 계열을 중심으로 존립할 수 있었다. 정조 연간에는 이들에서 이어진 정치집단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이들의 의리 주장이 정치 원칙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면서 탕평책 아래에서 조제되었다.

 특히 정조는 영조 말년 척신세력의 전횡으로 야기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그후 왕세손일 때도 대리청정 전후시기에 척신계의 방해로 곤경에 처했던 사태 등의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즉위 후 외척세력의 배제를 정치의 첫째 원칙(의리)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이는 특히 사림정치의 기본원칙과도 일치하고 있으므로, 사림계의 淸議를 존중하는 준론계 정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갔던 것이었다. 그래서 즉위 초에 영조 연간 정국을 주도했던 南黨(金龜柱 계열)·北黨(洪鳳漢 계열)으로 불렸던 외척당 세력을 모두 와해시켰다. 또한 자신의 즉위 공신인 洪國榮이 척신정치를 기도하자, 아무도 예기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계를 은퇴하게 했다. 이후에도 즉위 공신인 鄭民始나 李命植들은 최고 정책 결정권을 가지는 相臣으로는 임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정조의 탕평책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히 정파간의 인재 보합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정조는≪대학≫을 새로이 탐구·해석하여, 군주권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제왕학을 세웠다. 그 결과 정국운영은 군주가 주도해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군주는 사대부를 포함하는 모든 신민을 ‘민은 나의 동포’라는 입장에서 일원적으로 단일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즉위한지 20여 년이 지난 정조 22년(1798) 자신을 ‘모든 하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라는 ‘萬川明月翁主人’으로 표현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따라서 淫朋으로 평가한 당시의 붕당은 당연히 타파의 대상이었다.095)李泰鎭, 앞의 글(1992). 정국운영 방식도 是非를 가리는 分別論에 입각한 일진일퇴의 정국보다 保合大和論에 입각하되 優劣을 변별해서 함께 쓰는 탕평조제의 정국을 채택하고 있다고 밝혔다.096)≪弘齋全書≫권 166, 日得錄, 政事.

 또한 유교적 통치에서는 군주가 큰 일을 도모하려는 뜻(有爲之志)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는 유학자들이 소인배로 비판했던 王安石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데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 개혁이 절대 필요했던 시기에 군주인 神宗의 개혁 의지를 강력하게 보좌했던 점과 개혁안의 실용성을 긍정했던 것이다. 반면에, 당시 司馬光 같은 정통 주자성리학자들이 도리어 수구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또한 주자성리학을 배척했으면서도 군주권 강화에 큰 공을 세웠던 王陽明의 문집을 좋아하여 탐독하기도 했다.097)≪弘齋全書≫권 161, 日得錄, 文學. 이런 입장에서는 신하들의 정국주도를 긍정하는 제도적 장치의 하나인 붕당은, 영조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타파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편파적인 상황을 타파하려는 탕평 원칙은 정국운영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 파악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정조는 서얼과 노비 역시 국왕의 신민으로서 다른 신민들과 함께 그 처지를 개선할 대책이 필요하다고 파악해서, 지위가 열악한 이들에 대한 처우 개선책을 계속 강구하였다. 특히 정조 말년에는 노비제를 완전히 혁파할 결심을 굳히기도 했다. 순조 원년(1801)에 정조의 뜻을 잇는다고 하면서 공노비가 혁파된 것은 그 부산물이었다.098)李泰鎭, 앞의 글(1993). 이 때 정조의 측신 尹行恁이 지어 바친 윤음의 내용은, 箕子와 같은 성인의 치세에는 노비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군주가 백성에게 임할 때는 貴賤의 구별도 없고 內外의 구별도 없이 모두 같은 赤子이므로, 奴니 婢니 하여 구분하는 것은 하나의 동포로 보는 뜻이 아니다”099)≪純祖實錄≫권 2, 순조 원년 정월 을사.라고 선포하였다. 이는 전 시기까지 사대부들이 우리 나라의 노비제도는 기자시대부터 시작되는 오랜 역사성을 가졌으므로 중국 사회와 달리 세습노비제도가 존속되는 역사 전통이 있다는, 오래 계속되어 온 사회적 통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획기적인 선언이었다.

 또한 정조는 재상에 대한 국왕의 인사결정권을 아주 중요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정국의 변화에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그래서 의리에 투철하다고 인정되어 한번 신임한 준론 재상은 반드시 8년의 기간은 중용해서 쓰되, 중용하기 전에 일정 기간 정계에서 떠나게 함으로써 그 자신의 정치적 의리를 유지하는지와 그를 지지하는 집단에서 계속 그 신망이 유지되는지를 지켜보면서, 다음 시기 정치 변화를 주도하게 하기 위한 학문적·정치적 실력 축적을 도모하게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또한 정치운영의 원칙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파적 의리의 경우에는 영조와 같이 정국운영을 시비의 차원으로 이끌므로 탕평정국을 파기하는 가장 나쁜 요소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예컨대 서학 신봉자들을 국가변란을 도모했던 황건적이나 백련교도와 같은 부류로 파악해서 국사범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洪樂安에 대해서, 정조는 당시 안정을 찾아가는 남인계 채제공과 노론계 김종수의 준론계 정파가 주도하는 탕평정국을 시비논쟁으로 이끌어서 결국 환국을 도모하려 시도했다고 하여 강력히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정조가 말년에 밝힌대로 반드시 한 부류의 역적과 다른 부류의 역적을 대비시키고 한 부류의 충신과 다른 부류의 충신을 대비시키되, 충신과 역적으로 대비시키는 정치운영은 하지 않겠다는 ‘以熱治熱’의 독특한 통치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전술적 고려를 탕평정국 운용에 적용함으로써 그 효율을 극대화하려 했던 것이었다. 즉위 초년에 바로 이 방식을 이용하여 홍봉한 계열과 김구주 계열을 한꺼번에 제거하였고, 이후 김종수 계열과 채제공 계열을 같이 등용하였던 것이다.

 학술정책에서도 남인계 서학 신봉자를 正學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노론계가 심취했던 稗官小品文學 역시 정학에서 벗어났다고 강력히 비판하면서 문체반정운동을 시행하고 있었다. 특히 집권 노론계 주류가 정통 주자성리학을 내세우고 있었던 데 반하여, 집권 남인계는 시대적 변화(時變)를 존중하면서 西漢을 ‘大封建’·‘務實’ 등으로 평가하면서 실제 정치의 모범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의리와 개혁을 재야 지식인의 입장에서 추구했던 明末 淸初 顧炎武나 黃宗羲처럼,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하는 국가체제 개혁방안들을 심도있게 검토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로써 준론탕평이 지향했던 정치모델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정조 연간의 정치사는 붕당을 없애기 위한 탕평정책이 실시되었던 시기라고 평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영조 연간 노론당이 승리한 후 사도세자 죽음을 놓고 새로 생긴 당파인 시파와 벽파의 당쟁으로 정치적 사건의 추이를 설명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유력한 해석이었다. 이러한 통설은 탕평론보다도 당쟁론이 당시 정치사의 실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또 이 구분은 시세에 따라서 국왕인 정조의 뜻을 따르는 파를 시파라 하고, 이를 반대하는 노론계 주류를 포함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파를 벽파라고 보는 구분법이다.

 그러나 시벽당쟁이란 일차적으로는 노론내의 문제에서 출발하였다.100)이하 시벽당쟁에 관한 내용은 朴光用, 앞의 글(1990) 참조. 남인과 소론계는 당시 강력한 정치세력인 노론계에 대항하려면 정조의 입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곧 소론·남인을 시·벽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시파와 벽파를 구분하는 기준을 정조의 뜻을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 하는 데 둔 것은 남인계와 소론계였다. 곧 남인과 소론계 당론서만이 노론계 주류를 벽파계로 파악하고 있었다. 노론계 당론서는 당시 노론 의리의 지도자인 산림세력을 포함해서 주류를 대체로 중도계로 파악하는 사례도 있다.

 또한 정국의 추이를 살펴보면, 노론계가 시파·벽파의 명칭으로 분기되기 시작하는 출발점은 대체로 정조 8년(1784)경이며, 그 전에는 이런 당파의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된다. 정조 12년(1788) 이후에는 시파·벽파의 대립 현상이 표면화되어 나타났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벽당론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사도세자 문제에 대한 의리문제와 관련된 본격적인 대치국면은 嶺南萬人疏로 야기된 파란이 있었던 정조 16년과 17년 여름, 장용영 체제와 수원성이 완성 단계에 도달한 정조 19년 전후 시기부터였다. 이 때는 탕평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줄 정도의 규모인 당쟁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도 綠林徒黨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시파와 벽파계는 반드시 당파적으로 뚜렷하게 구분이 되는 인적 구성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곧 관료 縉紳간의 대립 상황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를 4색 당파가 탕평책으로 새롭게 개편되면서 나타난 붕당간의 대립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벽의 의리논쟁 문제도 그 논리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에 대한 ‘扶洪派’와 ‘攻洪派’라는 기준이 그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부홍파의 경우도 홍봉한의 죄상은 공격해야 한다고 보았고, 공홍파라고 해서 청의를 지키는 인물이 없었다고 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노론·소론·남인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시파계는 자신을 홍봉한의 黨與도 아니고, 홍당을 공격한 金龜柱의 당여도 아닌 중도적 입장이라고 보고 있어서, 의리면에서 강경하면서도 중도적 입장을 취한 인물들은 벽파적 의리를 지녔다 해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기도 했다. 결국 노론계에서의 시파와 벽파를 가르는 기준은, ‘의리론’으로 본다면 신임의리와 임오의리를 구분할 수 있다고 보느냐, 구분할 수 없다고 보느냐 하는 차이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는 곧 신임의리를 강경하게 지키느냐 온건하게 지키느냐의 차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게다가 그 뭉쳐지는 집단들이 학통같은 뚜렷한 동질성을 공유했다기보다는, 왕실 외척과 연결을 도모함으로써 강화되는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 이는 결국 그 표방한 의리보다 왕실 외척을 권력집단에서 배제한 정조대 탕평정국 운영에 대한 반발이 주된 성격이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곧 정조 연간의 ‘시벽당쟁론’은 부분적인 현상을 전면적인 현상으로 확대 해석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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