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3.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 1) 준론탕평과 군신 의리
  • (2) 정국의 추이

(2) 정국의 추이

 정조 연간의 정국을 탕평정치 형태의 진전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면 대체로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대리청정(1775)에서 정조 3년(1779) 말까지라 할 수 있다. 이미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하던 시기부터 준론의 의리를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조제하고 그 인재를 보합에 이르게 하겠다는 탕평의 원칙이 선포되었다. 그래서 ‘혼돈의 탕평이 아닌 의리의 탕평’이 표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홍국영을 중심으로 청류를 표방한 노론 청명당 계열이 정국을 주도한 시기였다. 이 때 홍국영은 호서지방에서 송시열의 후손인 宋德相·宋煥億과 기호지방에서 閔遇洙의 문인인 金鍾厚 같은 山林의 명망을 지닌 인물들의 지원, 그리고 궁궐 안에서 누이인 元嬪의 지원을 바탕으로 해서 노론당의 의리를 주도적으로 실행함으로써 노론계 권력집단의 주체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 시기에 영조 말년에 복관되었던 尹宣擧·尹拯 부자와 소론 3대신이 다시 추탈관작되었고,<탕평윤음>에서 신임의리가 재천명되었으며, 송시열이 孝宗 묘정에 배향되었다. 또한 이조낭관 통청권을 복구해서, 영조 연간 탕평책하에서 강화되었던 재상의 권한을 당하관급에서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복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들을 바탕으로 해서 영조 연간 탕평정책의 결과로 야기되었던 폐단, 이른바 홍봉한과 김구주의 양 외척당을 와해시키고 양편의 의리를 극단적으로 표방하는 趙載翰·李德師나 沈翔雲·洪趾海 같은 세력을 모두 역적 대 역적으로 대비시켜 처단하였다. 이른바 以熱治熱의 통치술이었다. 동시에 외척 내지 부마세력과 연결하여 권력을 지켰던 洪啓禧 집안과 金尙魯·鄭厚謙·洪麟漢 등 이른바 노·소 탕평당 계열을 권력집단에서 제거하고, 이에 동조했던 홍계희와 가까운 인척인 洪啓能·洪趾海·洪量海 같은 호론계 산림 일부도 제거하였다. 전체적으로는 노론·소론·남인의 준론(청류)계가 모두 우대되었다. 또 右文政治를 표방하면서 왕실 외척과 사대부 세력의 연결관계를 차단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규장각제도도 이미 즉위년부터 계획되고 있었다. 이 시기는 홍국영 은퇴 후 徐命善 세력과 鄭民始가 홍국영을 지원했던 세력에 대해서 독립을 선언하기 전 단계까지는 그에 대립적인 정파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어서, 척신 김구주와 연결되었다고 의심받는 남당계가 그들 스스로 정조의 뜻을 실천한다고 주장하던 상황이었다. 곧 이 시기는 시파나 벽파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제 2기는 정조 4년(1780)에서 정조 12년 정월까지의 시기이다. 이 때는 서명선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 준론계 정파를 강화시켜서 노론 청류계 정파와 보합하려 했던 탕평기이다. 그래서 원자 탄생을 계기로 윤선거·윤증 부자를 다시 복관시켰고, 홍국영을 전혀 예기하지 못한 상황에서 은퇴시키고, 그를 지원하던 노론 산림세력을 제거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 시기였다. 이 때 산림 宋德相과 宋能相·洪量海 그리고 그 여당으로 표현되는 호서지역 노론세력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任聖周·宋煥億들도 이들과 연결되었다고 비판되면서 그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이 때를 전후로 괘서·유언비어·정감록 문제라든지 송덕상과 연결된 居士輩의 모역동참사건, 남인 청론계의 학문성에 관계되는 서학실천운동이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 정조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金夏材 옥사, 그리고 金鍾秀와의 연관성이 의심되는 李瑮 옥사, 常溪君 湛을 추대한 역모사건인 具善復 옥사 같은 돌발사건들이 터지기도 했다. 이는 홍국영 이후의 정국운영 문제를 놓고 노론계가 분열·대립되는 조짐들로 해석된다. 또한 영남 남인 李象靖이 산림으로 초치되기도 하고 숙종때 남인계 산림인 李玄逸이 신원되기도 하여, 남인계 전체의 관직 진출로는 전보다 개방되고 있었다.

 반면에 채제공 세력은 노론계와 소론계 전체가 연합하여 공격함으로써, 남인 정치집단 내에서도 洪秀輔·蔡弘履·睦萬中 계열이 갈라져 나가 채제공 공격에 가담하는 등 청남세력이 강력하게 견제되었다. 곧 남인계가 권력 상층에 참여할 기회는 제한되었던 시기였다. 소론 준론계는 그러나 지방 사대부층의 지지라는 정치적 기반이 戊申亂과 乙亥獄事들로 해서 이미 붕괴되어 있었으므로, 이러한 권력집단만이 강화된 상태에서는 소론계 스스로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가진 노론계와 연대의 필요성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달성 서씨나 전주 이씨 가문 같은 경우, 영조 연간의 풍양 조씨 가문처럼 학통이나 혼인관계 또는 정치적 의리론의 측면에서 노론세력과 연결을 도모하기도 했으므로, 이후 노론계에 흡수될 수 있는 바탕이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형성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정조 득의의 탕평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규장각의 제도 정비가 본격화되고,≪대전통편≫이 완성되기도 했다. 정치금고자를 풀어주는 疏通 정책도 계속 시행되고 있었는데, 이는 사대부 내의 정치참여 자격을 넓힘으로써 국왕의 세력기반을 확대하려 한 것이었다.

 제 3기는 정조 12년(1788) 2월에서 정조 18년까지의 시기이다. 이 때는 김종수로 대표되는 노론 청류계 정치집단과 채제공으로 대표되는 남인 청론(청남)계 정치집단을 보합하는 탕평이 어느 정도 성공한 시기였다. 곧 정조 득의의 정치운영 방식으로서의 준론탕평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청남 계열과 소론의 李福源 계열이 연합하여 이러한 정조 탕평의 일각을 떠받치기도 하였다. 이 때는 재상 권한을 다시 강화하는 정치개혁을 선언하였다.101)≪正祖實錄≫권 26, 정조 12년 7월 정해. 따라서 이조낭관 통청권이 다시 혁파되어 청요직의 권한이 규제되고, 비변사의 권한도 중요 사항의 경우 정승이 다시 議를 붙여서 국왕에게 올리는 형태로 운영함으로써 견제되었다. 곧 국왕과 재상 중심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관료체제가 채택된 것을 의미한다.

 奎章閣 기능이 활성화되고 문체반정을 표방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 久任法을 실시하는 등 관료세력의 재교육을 강조해서 새로운 관학풍의 진작이 있었다. 동시에 珍山事件을 계기로 小科까지 국왕의 親試로 운영하려는 시도인 賓興科를 실시하기도 했다.102)李泰鎭, 앞의 글(1992).

 또 군제는 백년 이상 계속될 수 없다고 하여 5군영제를 개편하려 하였다. 이는 장용영을 창설·강화하고 수원성 축성을 시작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궁극적으로는 군영의 일원화를 추진한 것이었다. 또한 서얼허통이 확대되고, 노비제도에 대한 개혁이 추진되어 공권력으로 도망노비를 찾아주는 노비추쇄법이 폐지되었으며, 도시의 새로운 상품유통체제를 인정하는 辛亥通共정책들이 이 시기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진산사건이 터지면서 서학실천운동에 대한 대처문제가 제기되었다. 또 사도세자에 대한 모함을 없앰으로써 군주권을 천양해야 한다는 주장이 영남만인소와 소론계 朴夏源 등 760여 인이 연명한 집단상소에서 ‘壬午義理’로서 표면화됨으로 해서 큰 파란이 야기되었다. 노론계에서도 朴宗岳·徐有隣·李秉模 등 정조 측근세력이 이를 지지함으로써 노론계 안에서도 상호 공격하는 등 심각한 분열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노론계 강경세력은 노론 벽파계를 淫朋으로 몰아 탕평정국에서 제거하려는 음모라고 파악하였다. 그래서 의리는 하나이므로, 신임의리와 임오의리를 나누어 해석할 수 없다는 표방으로 새롭게 뭉쳐져서 강력하게 반발하였다.103)당시 벽파의 주장은 정조의 五晦筵敎 직후 예조참판으로서 이를 비판한 이서구의 상소가 대표적이다.
李書九,≪惕齋集≫ 권 5, 筵敎頒示後言時事疏 庚申.
곧 사도세자 신원문제를 놓고 시파·벽파의 논쟁이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그 수습과정에서 정조 연간에 유일했던 노론 3상정권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이후 정국을 혼란하게 만든 사단이 생기기도 했다.

 제 4기는 정조 19년(1795)에서 정조 24년 6월 정조 사망까지의 시기이다. 이 때는 尹蓍東으로 대표되는 노론 산림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중도적 노론계와 채제공 지도하의 남인계를 다시 보합하려 하였고, 윤시동이 죽은 후에는 벽파의 지도자 沈煥之를 정승에 임명함으로써 시·벽의 대립상태를 역시 준론탕평의 형태로 조정하려 했던 시기였다. 동시에 이 시기는 규장각에서 성장한 국왕 측근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노론계 李秉模와 소론계 李時秀를 정승에 기용함으로써, 산림세력의 학통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벽파계를 조정·견제하려 하였다.

 이 시기의 초에 수원성이 준공되고 장용외영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장용영 체제가 완성되어 군권이 국왕 중심으로 일원화되어 갔다. 한편으로는 宋煥箕·李城輔 같은 벽파계에 가까운 산림세력을 다시 우대하는 정책을 펴서, 이성보의 건의를 받아 金麟厚 문묘 종사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준론을 조제하는 통치규모를 자세히 밝힌 이른바<五晦筵敎>직후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준론의 의리를 조제하고 인재를 보합하는 탕평은 계속되지 못하였다. 이후 정순왕대비와 연결되면서 권력을 잡은 벽파세력은 탕평정국의 구도를 일거에 폐기하려 노력하였다. 그래서 숙종 연간의 환국처럼 반대당 핵심인물들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였다. 정국이 노론 벽파 일당 전권의 형태로 전환된 것이다. 그러나 그 후유증을 수습하지 못하여 벽파 주도 정권은 6년만에 무너졌다. 이 때 야기된 정치적 단절과 혼란상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결국 독자적인 권력집단의 형성은 노론계 왕실 외척세력만이 가능한 세도정국으로 진행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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