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3.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 2) 규장각과 왕정

2) 규장각과 왕정

 정조는 자신이 훌륭한 학자이기도 했다. 즉위 초에 이미 실력 중심의 右文政治를 표방하면서, 각계 각층의 실력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탕평정책을 표방하였다. 특히 사대부의 문풍을 진작시킴으로써만이, 의리를 존중하는 탕평이 그 실효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 청요직으로서의 규장각 설치였다.108)규장각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鄭玉子,<奎章閣 抄啓文臣 硏究>(≪奎章閣≫5, 서울大, 1981).
―――,<正祖의 抄啓文臣敎育과 文體政策>(≪奎章閣≫6, 서울大, 1982).
李泰鎭,≪奎章閣小史≫( 서울大, 1990).
이는 영조가 실시한 청요직 혁파정책의 전면적인 폐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즉위 초 홍국영과 노론 청류세력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 밝히면서도 이조낭관의 통청권을 복구시켰다. 그러나 정조 13년(1789) 정조 득의의 탕평이 실시되자 다시 혁파해버리고 말았다. 또한 유생 교육을 담당하는 성균관의 책임자인 대사성에 윤행임·김조순·이가환 같은 자신의 측근세력을 임명하고, 장기간 근무시키는 久任法을 실시하였다. 관학풍을 진작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문정치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기구는 역시 규장각이었다. 규장각이란 원래 임금의 글씨를 모아두는 기구라는 뜻이다. 이미 세조 연간에 梁誠之가 그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가, 숙종 때 宗正寺에 규장각이라는 小閣을 건립하고 御製·御眞을 봉안하였으나,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정조는 즉위한 다음 날에 규장각제도의 창설을 명하였고, 6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9월에 어제 편찬 및 보관을 목적으로 하는 왕실 도서관으로 출발하였다. 12월에는 서적 인쇄를 담당하는 校書館이 규장각에 소속되면서, 규장각을 內閣이라 하고 교서관을 外閣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후 정조 5년 정조의 측신인 徐命膺·채제공 등에 의하여 그 직제가 완성되면서 학술연구기관으로 되었고, 최종적인 제도 완비는≪奎章閣志≫가 완성된 정조 8년경이었는데, 이 시기 전후로는 정책 연구 기능까지 발휘하게 되었다.

 규장각은 提學 2명, 直提學 2명, 直閣 1명, 待敎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제학은 종1품으로서 재상급에서 임명되었다. 이 밖에 檢書官 4인과 檢律을 포함해서 雜職이 30여 명이 있었다.

 공식적인 기능은 첫째 御製와 御眞의 봉안, 둘째는 서적 편찬·출판과 장서 구입, 셋째는 초계문신 양성이었다. 곧 도서관 기능과 학문연구소 기능을 담당하였다. 결국 문신을 양성하고, 새로운 정책과 제도를 세울 때 국왕에게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적 기능이었던 것이다.

 규장각 설치는 그 정치적 목적이 두 가지였다. 첫째는 새로운 청요직의 재건이었다. 사대부 자신을 지켜내는 名節과 기본 실력인 文學을 진작함으로써 정조가 표방한 학문정치에 맞는 인재를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둘째는 이로써 기대하는 효과이기도 한데, 외척세력과의 단절을 정치원칙으로 받아들이는 국왕 측근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종합하면, 이미 변질·격하된 승정원과 홍문관에 대신하여 국왕의 통치를 직접 보좌하여 효과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기구로서 설치한 것이었다. 이는 성균관 교육의 강화와 함께 새로운 관학풍의 진작을 통한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곧 세가대족의 보합에 치중했던 영조대의 탕평정책이 외척세력이 주도하는 특권적 문벌정치로 흘러간 것을 반성하고, 사대부 일반의 보합을 우위에 두는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하나이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는 정조가 끊임없이 표방했던 ‘挽回世道’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의리를 존중하는 인재의 탕평을 통하여 재야 사대부 세력의 보합까지 달성함으로써 결국 이들을 바탕으로 한 국가체제의 更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규장각제도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첫째 抄啓文臣제도를 들 수 있다. 이 제도는 정조 5년(1781) 2월에 확립되어≪續大典通編≫에도 수록되었는데, 그 유래는 이미 조선 초기의 賜暇讀書制度나 讀書堂의 예에서 찾을 수 있다. 초계문신은 과거를 거친 문신으로서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되어 承文院에 추천되었던 당하관 이하 문신으로서 37세 이하의 사람 중에서 선발하였고, 40세가 되면 해제되었다. 초계문신으로 뽑히면, 국왕의 도서관에서 재교육을 받음으로써 국왕 측근에서 문화정책을 충실하게 보좌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실력을 쌓아가는 인재로 양성되었다. 초계문신의 선발은 의정대신이 주관하였다. 그 목적은 사대부의 名節을 높이고, 이를 위하여 경학과 문학을 연마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강의는 현실에 실제 쓸 수 있도록 句讀 위주에서 탈피하여 문장의 뜻을 깊게 천착시키는 데 두었다. 초계문신에게는 신분보장과 잡무가 면제되는 특전이 주어졌다. 또한 국왕이 매달 친히 초계문신을 지도 편달하였다. 실제 초계문신은 10회에 138명이 선발되었으며,109)정조 이후는 헌종대에 2차 56명이 선발되었을 뿐이다. 이들 중에서 반 이상이 고위관직에 진출했고, 각신으로도 18명이나 진출하였다. 또한 노론·소론·남인·북인계의 우수한 인재들을 함께 선발해서, 그들 사이의 학문적 교류와 동류의식을 강화시켰다. 특히 남인계가 수용했던 서학과 노론계가 수용했던 패관문학을 모두 명청문화의 폐단으로 비판하면서 벌렸던 文體反正運動은, 그 대상자가 명문벌열 출신 초계문신으로서 노론계 金祖淳·南公轍·沈象奎와 소론계 李相璜 등이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이 시책이 특권적 권력집단인 京華閥閱을 견제하고 변질시키는 효과도 노린 탕평책 추진을 위한 장치였다는 점을 잘 말해 준다.

 둘째로 檢書官제도를 들 수 있다. 검서관은 5품으로서, 門地와 재주·文藝에 따라 전임 검서가 2명씩을 추천하면, 각신들이 시험을 보아 3인을 추천하고, 최종적으로 국왕의 낙점을 받아 임명되었다. 검서관은 정조 3년 홍국영의 건의로 설치했다고 하는데, 당시는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홍국영이 실각한 후인 정조 5년 2월 전면적인 직제 정비가 있었고, 이 때 내각으로 그 직제가 이동되었다. 또한 서얼층을 위한 대책으로 전환되면서, 서얼층 가운데 실력자를 국왕의 측근 신하인 검서관에 임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규장각 검서는 정조처럼 규장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군주에게는, 승정원 승지와 같은 국왕의 비서관으로서의 역할도 하게 된다. 곧 보다 적극적으로 본다면, 서얼층 실력자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결과 서얼 출신으로서 李德懋·朴齊家·柳得恭 등이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검서관을 거친 경화벌열인 李書九 역시 이들 서얼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 중에서 박제가는 해외통상론과 북학론을 주장하였고, 정조에게 ‘山林’의 기풍이 있다고 칭찬받은 이덕무는 명말청초 반성적 경세가로 평가되는 고염무의 經史에 밝은 해박한 학풍에 심취해 있었고, 유득공은 북방계 역사계승의식을 재평가하는≪渤海考≫를 써서 남북국시대론을 표방했으며, 보다 정통성리학을 존중했다는 成大中과 成海應 父子는 정조의 명을 받아 이서구와 함께 조선중화주의를 표방한≪尊周彙編≫을 편찬하였다는 사실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곧 검서관제도는 서얼 출신들의 학문을 양성하고 수용하는 통로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규장각 서리는 천역기술직으로서 평민 중에서도 선발될 수 있는데, 이들 중에서 金洛瑞·張混·朴允黙들이 군주인 정조와 당시 재상들의 知遇를 받아, 선비를 자처하면서 玉溪詩社라는 활발한 委巷文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 역시 규장각 설치로 나타난 새로운 문풍 진작이 아래 계층으로 보다 넓게 퍼져가기도 하는 大同의 시대 분위기를 말해주는 경우라 하겠다.110)鄭玉子,<委巷詩社의 成立과 詩社運動>(앞의 책).

 다음으로 규장각에서는 많은 서적을 편찬함으로써 당시 문화 능력을 크게 높였는데, 모든 분야에 걸쳐서 고루 출판되었다. 이 편찬 사업은 당시 청나라의 四庫全書 간행에 못지 않은 기획 아래 진행되었음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147종의 도서해제집인≪群書標記≫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 분류법인 4부법을 따라 분류하였으며, 특색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11)姜順愛,<正祖朝 奎章閣의 圖書編纂 및 刊行>(≪奎章閣≫9, 서울大, 1985)를 주로 참조함.

 유교 경전을 말하는 經部는 10여 종이 편찬되었다. 대체로 초계문신 교육 중에 만들어진 4서와 5경의 강의록이 중심이다. 곧 경전의 내용을 다시 점검하여 표준이 되는 해석을 얻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기록을 말하는 史部는 30여 종이 편찬되었다. 이 중에서 정조임금부터 쓰기 시작한 국왕의 개인 일기인≪日省錄≫, 통치를 위한 귀감을 모은≪列朝羹墻錄≫, 李宜顯의 저서를 증보해서 국가 중요 인물의 행적을 편찬한≪人物考≫, 당쟁을 비판하고 탕평책 실시 과정을 수록한≪皇極編≫, 정조 당대의 刑獄 판례(結案)를 모은≪審理錄≫, 刑具 격식을 바로잡은 내용을 수록한≪欽恤典則≫이 있다. 이 밖에 규장각의 중국본 서적목록인≪奎章總目≫과 지방에서 간행한 서적을 해제한≪鏤板考≫가 있다. 기타 관청의 제도와 연혁을 정리한≪奎章閣志≫·≪弘文館志≫·≪秋官志≫·≪度支志≫들과, 법전류로≪대전통편≫이 있다. 이제까지의 사적을 넓게 살펴서 통치규모를 파악함으로써 새로운 개혁 방향에 적응하기 위한 자료를 정리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 이외의 학문 서적을 말하는 子部는 10여 종이 편찬되었다. 朱子·程子·丘濬 같은 정통성리학자들의 중요한 글모음이 많은데, 이 밖에 당시 시대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으로서 정조의 어록인≪일득록≫, 우리나라의 무예 서적을 집대성한≪武藝圖譜通志≫, 소리와 문자를 연구하여 일원화를 도모한 정확한 음운서인≪奎章全韻≫, 정조가 직접 편찬한 음악서적인≪詩樂和聲≫, 조선중화주의 입장에서 대명의리론을 정리한≪尊周彙編≫들이 있다. 다방면의 학술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이라 하겠다.

 개인 문집을 말하는 集部는 20여 종이 편찬되었다. 국초 이래의 중요한 館閣文字를 모은≪文苑黼黻≫, 문체반정 정책 내용과 초계문신의 試券을 붙인≪正始文程≫,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수정하여 합본한≪五倫行實圖≫, 규장각 건립을 최초로 건의한 梁誠之의≪訥齋集≫, 李舜臣의≪李忠武公全書≫ 및 임진왜란 유공자의 實記 등이 있다. 정조의 방대한 문집인≪弘齋全書≫도 정조 사후에 규장각에서 간행되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실시된 위와 같은 정조대 문화정책은, 바로 조선 국가체제의 정비 방향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정조는 학문의 근본을 원시유학을 의미하는 6경이라고 보았다.112)이하 정조의 학문 부분 중 주를 달지 않은 부분은 주로 鄭玉子, 앞의 책에서 참조함. 곧 올바른 학문인 正學 역시 육경학을 의미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정조는 6경 존중과 道文一致論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의 근원인 經과 실제에 적용하는 史가 일치하는 경지인 삼대 이전의 古學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는 기본적인 길이 주자성리학이라고 평가하였다. 동시에 정조는 조선이 명의 정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지금은 조선만이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송시열 이래 세워진 大明義理論에서 배태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조는 우리 자신을 먼저 지키자는 內修外攘論을 표방하면서 正學의 수호를 내세웠다.113)≪承政院日記≫1777 冊, 정조 21년 6월 24일. 이 입장에서 남인계 서학파에서 나타났던 서양인과의 접촉 노력 및 서양학 우선 경향과 노론계 북학파에서 나타났던 해외통상론 및 고증학 우선 경향을 모두 明·淸문화의 지엽적인 부분을 지나치게 받아들인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우리 동국에서 태어났으니, 마땅히 우리 동국의 本色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학문 뿐 아니라 그릇같은 생활용품까지 중국산을 받아쓰려 한 당시 사대부들을 사치풍조에 물들었다고 비난하였다.114)≪弘齋全書≫권 175, 日得錄, 訓語. 이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조선중화주의를 넘어서는 민족주의적 단계에 도달했다고 할 수도 있다. 특히 고증학의 경우 문체반정운동의 과정에서는 패관소품으로 몰아 붙이면서 새로운 견해만 추구하고 성취에만 바빠서 속임수가 많고 현란하기만 하다고 평가하였지만, 비판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명말청초의 중요한 학자들을 비교적 넓게 검토하기도 했고, 그 중에서 顧炎武를 위시한 古學 추구자는 구분해서 평가하기도 했다.115)≪弘齋全書≫권 173, 日得錄, 人物(徐榮輔 壬子錄).
곧 정조는 소론 준론계 徐志修의 손자인 서영보와 함께 고염무의≪日知錄≫, 이광지의≪周易通論≫, 매문정의≪梅氏叢書≫등을 검토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정학을 해치는 邪學으로 규정된 서학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결정으로 내려진 서적 수입 금지조치는, 19세기 우리 사회의 문화 수용능력을 대폭 좁혀놓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규장각은 정조 연간에는 그 지위가 계속 강화되었다. 그와 함께 각신들은 조석으로 국왕을 문안하고, 승정원 승지와 같은 지위에서 모든 중요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登對할 때도 승정원을 경유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또 국왕 측근의 시종직이었으므로 언제든지 疏箚와 진언이 가능하였고, 경연관의 직책을 가졌으며, 史官 직책을 겸임하였다. 그리고 국왕의 공식 일기인≪일성록≫, 각신들과 대담하는 과정에서 나온 정조의 어록인≪일득록≫, 규장각의 공식 일기인≪內閣日曆≫을 작성하였다. 따라서 체제 정비 이후 규장각의 기능은 이전 관료기구 중에서 승정원·홍문관·예문관·사간원·종부시들이 맡고 있었던 기능을 종합적으로 장악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 연간에 폭넓은 기능을 발휘했던 규장각도, 군주권이 극도로 위축되어 가는 순조 연간 이후가 되면 각신에게 부여되었던 실제 권한은 모두 없어졌다. 제도 자체는≪대전통편≫에 수록되어서 존속하였으나, 御製의 간행과≪일성록≫의 기록 정도를 담당하였을 뿐이었다.116)1864년 고종 즉위 이후 御製의 보관이 종친부로 이관됨으로써, 규장각은 순수한 왕실도서관만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 11월에는 홍문관이 폐지되면서 그 기능이 규장각으로 단일화되고, 대제학의 직임이 설치됨으로써 지위가 크게 격상되었으나, 1910년 나라가 망함으로써 큰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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