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3.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 3) 장용영과 군주권 강화

3) 장용영과 군주권 강화

 정조 역시 영조와 마찬가지로 탕평책을 통한 군주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이에는 물리력의 뒷받침이 절대로 필요했기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군사제도의 개혁이 필요했다. 정조 2년(1778) 6월에 발표된 ‘大誥’에는 정치 개혁의 기본 원칙이 비교적 잘 표현되고 있는데, 이 때 이미 군영의 개혁을 언급하고 있었다. 곧 군영이 5개로 나뉜 것은 개인의 군대가 되는 家兵의 폐단과 통솔이 어려운 多門의 근심으로 나타나서 정치적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면서, 5군영이 체계적으로 통할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혁하여 일원적인 군영체제로 개편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는 軍權은 군주권 아래에서 일원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의지였는데, 7년 후인 정조 9년에 壯勇營의 설치로 나타났다.117)장용영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조된다.
李泰鎭,<三軍門 都城守備體制의 確立과 그 變遷>(≪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77).
裵祐晟,<正祖年間 武班軍營大將과 軍營政策>(≪韓國史論≫24, 서울大, 1991).
그러나 정조가 정치의 첫째 원칙으로 내세운 척신계의 정치간여 금지는, 군영대장의 경우 예외적인 경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장용영은 처음부터 군사권의 일원화를 표방하지는 않았다. 첫 출발은 장용위란 소규모 금위부대였고, 이를 점차로 확대하여 결국 도성과 화성(수원)에 각각 내영과 외영을 두면서 기존 5군영보다 훨씬 큰 규모를 가진 군영으로 확대하였다. 그런데 이는 또한 5군영 규모의 점차적인 축소와 병행되고 있기도 했다. 드러나지 않도록 점진적으로 군사권의 일원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또한 장용영은 국왕의 아버지를 기리는 뜻을 지녔던 정조 8년의 慶科 실시 및 수원성의 축조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정비되어 갔다. 정조 8년 경과는 무과 합격자가 2,9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조 9년 장용위를 시작으로 이들을 바탕으로 국왕을 호위하는 禁衛부대인 장용영의 창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곧 군주권 권위의 재확립 의도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친위부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결국 경과의 성격은 규장각 설치를 통해서 붕당이나 척신의 이해관계와 연결되지 않는 친위 관료세력을 양성하려는 목적과 똑같이, 중견 무반들 역시 붕당이나 척신계와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인재로 키우려는 시도였다.

 정조 연간에 군사적으로 설치된 새로운 기구로는 처음에는 宿衛所가 있었다. 김구주와 홍인한, 정후겸으로 대표되는 척족세력의 방해를 뚫고 대리청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 정조는, 당시의 공신이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아 모든 정책 결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그를 수어사·총융사에 임명하였다가, 곧 이어 궁궐 숙위를 담당하는 금위영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호위군관과 결탁하여 왕의 숙소를 침범했던 洪相範사건을 계기로 숙위소를 설치하였다. 곧 이는 척신계 등의 위협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숙위체제의 강화였다. 그런데 숙위대장은 금위영 대장이 겸임했으며, 단순한 궁궐 숙위만이 아니라 도성 전체의 경비를 총령하였고, 더 나아가서 5군영까지 총괄하는 위치에 이르기도 했다. 또한 숙위소는 병조나 오위도총부의 관할에서 벗어나 있었다. 곧 숙위대장이 독자적으로 대장패와 전령패를 가지고 궁성 내외의 숙위군병 절제를 장악하고 있었다.118)≪正宗記事≫권 5, 원년 11월. 동시에 그와 유사한 기구였던 호위청의 규모를 3청에서 1청으로 대폭 축소시켰다. 그러나 홍국영 역시 자기 누이를 元嬪으로 궁궐에 들여서 척신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는 한편, 숙위소를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한 기구로 이용하였다. 이에 정조는 원빈이 사망한 후인 정조 3년 9월에 홍국영을 정계에서 은퇴시켰다. 이 때 동시에 숙위소도 혁파되고 말았다.119)≪正宗記事≫권 7, 3년 9월.

 이후 정조는 훈척계열의 중용을 피하기 위한 새로운 군영의 설치를 계획했는데, 이것이 壯勇衛였다. 그 기본 정신은 영조와 마찬가지로 중앙군을 조선 초기처럼 5위체제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정조 9년 국왕의 호위만을 전담하는 장용위라는 새로운 부대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는 숙위소 혁파 이후 새로운 숙위체제를 모색했던 정조가 정조 6년에 무예출신 및 무예별감 중에서 장교를 역임했던 자를 대상으로 30명을 선발하여 번갈아 임금의 숙위를 담당시켰던 체제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장용위는 정조 11년경에 50명으로 보강되었고 여타의 各色標下軍과 作隊軍을 갖추면서 壯勇廳 체제로 정리되었다. 이는 다음 장용영 체제의 과도기적 단계였다.

 장용위는 숙위전담 장교 집단과 諸色軍에서만 京·鄕의 馬步軍을 확보하기 시작하였고, 정조 12년(1788)이 되면 장용영으로 호칭되면서 계속 확대되다가, 17년 내영·외영제가 선포되면서 제도적으로 대폭 정비되었다.

 이 때 장용내영은 수도인 한성부에 설치되었는데, 제색군·마보군과 牙兵을 합쳐서 5,000명으로 계획되었다. 이 중에서 馬軍은 善騎隊 3哨 345명이었고, 步軍의 경우 京軍은 1司 5초 615명으로 편성하고 鄕軍은 4사 20초 2540명으로 편성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제대로 실시되지는 못해서, 순조 2년(1802) 혁파될 때까지 대체로 마군은 1대 2초, 보군은 좌·중·우 3사 19초의 체제를 유지하였다고 판단된다. 특히 보군 향군의 경우 정조 19년까지는 좌·우 2사 10초만이 차출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양한 계기를 통해 계속 확대되어 정조 21년 전후 시기에는 좌·우 2사 16초가 되었다고 한다.

 장용외영은 정조 17년 수원에 華城이 축조되고 유수부로 승격하면서 수원부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수원유수가 장용외사를 겸임하게 하였고, 도성의 본영을 장용외영으로 부르게 되었다. 곧 사도세자의 무덤인 顯隆園과 국왕 행차시에 머무는 행궁지역에 설치된 외영은 실제로는 내영보다 중요시되었다. 외영은 화성 행궁과 성을 지키는 正軍과 守城軍, 그 수성을 돕는 4방 각읍의 協守軍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기존의 馬步軍을 정비한 다음, 수원부 인근 지역의 入防軍과 협수군 체제를 정비하였고, 마지막으로 인근 5읍의 군총을 이속시키면서 5위-속5위로 편성하였다. 장용외영은 정조 13년 10월 그 편제를 국초의 五衛法으로 해서 완성된 것이 특징이다. 화성의 5위는 長樂衛라고도 불렸는데, 前衛(八達衛)·左衛(蒼龍衛)·中衛(新豊衛)·右衛(華西衛)·後衛(長安衛)로 구성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이제까지 군 편제에 사용되었던 戚繼光法을 버리고, 병농일치를 특징으로 하는 5위법을 이용하여 더 많은 군사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또한 京司에 소속되어 있던 납포군을 장용외영에 소속시킴으로써 실제 군사로서 활동할 수 있게 조처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3,000여 명 규모의 상근부대와 유사시 동원되는 수성군으로 구분되어 편제되었다. 이는 국초의 강력한 권위의 회복을 의미하는 편제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화성 주변의 군대 정원상의 虛額을 없애고, 京司 소속을 분리함으로써 중간 수탈을 축소하였으며, 전체적인 군비 강화를 도모하였다.

 숙위체제를 비롯한 궁성 호위군의 체제를 새롭게 모색한 것은 금군 자체가 질적으로 저하되고 있는 한계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과출신자로 임용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이는 사도세자를 기리는 慶科에서 선발된 무사를 모두 군대에 편입시키기 위한 목적과 결합되면서 장용위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장용영은 그 운영비가 기본적으로 왕실 경비에서 지출되었지만, 처음 규모를 확대해 나갈 때는 주로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총융청·수어청·軍器寺 같은 타 군영의 재정과 군사를 이동시킴으로써 최소한의 경비로 설치하였다. 이는 여타 5군영의 규모가 실제적으로 축소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 가장 정예부대였던 훈련도감에서 이동된 군사는 2,2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또한 수어청은 군영의 의미를 상실할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어영청과 금위영도 400∼500명에 달하는 軍額 감소가 있었다. 곧 장용영은 그 규모 면에서 내영 하나만으로도 다른 5군영의 규모와 동일할 정도가 되었다. 이 때 호위청 역시 장용영에 합쳐졌다. 경기도 안의 군사를 하나로 묶어서 대군영을 만들려 했던 정조의 목표가 드러난 것이었다.

 장용영 상층부에서 지휘를 담당했던 무반 군영대장은, 전통적 무반가문 대부분이 탈락 내지 교체되고 신흥 무반세력이 담당하는 현상을 보였다. 특히 영조대 탕평당 계열의 將臣은 정조 10년(1786) 具善復의 옥사를 계기로 완전히 제거되었다. 게다가 장용대장은 처음에는 국왕의 특지로 차출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5군영이 中軍과 千摠을 통하는 것과는 달리 장용영은 대장의 군령이 직접 別將과 善騎將에게 전달되는 체제로 되어 있었다. 중간 층위를 배제한 대장의 직접적인 군대 통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장용대장은 정조 19년 이후에는 비변사의 천거를 받도록 되었으나, 3명 이상 추천제인 長望이었고 특지에 의한 임명이 불가능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국왕인 정조의 주도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대장은 대체로 정조 즉위에 공이 있는 친위 관료세력나 측근 외척의 경우는 국왕의 특지로, 신흥 무반의 경우는 장망으로 발탁되었다. 장용영의 亞將層은 각 군영의 당상 당하관이 거쳐가게 하였던 점도 주목된다. 이는 5군영의 대장으로 천거되는 자격자는 반드시 장용영 별장직을 거치도록 한 조치라고 판단된다. 이 역시 5군영이 척신계에 장악되어 왔던 경향을 장용영을 통해서 불식시키려는 의도였다고 하겠다. 곧 국왕의 친위군문으로의 성격을 강화한 것이었다.

 慶科에 합격한 군관 출신 중에는 서얼·평민이 많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이들 계층 중에서 성장하는 세력을 국왕 직속으로 재편성한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화성 축성에 부역민을 동원하지 않고 유이민 계층이 중심을 이룬 것으로 생각되는 모군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을 화성을 중심으로 경기지역 일원에 안정시킴으로써 결국 이들 중 상당수를 군사로서 편제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왕 아래 유이민을 재편제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화성의 도시화를 위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도록 정부가 상인 계층을 지원했던 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군주권 강화를 위한 친위군영인 장용영은 1800년 정조의 사망과 동시에 혁파되는 운명을 맞았다. 다음 해인 순조 원년(1801) 정월 공노비가 혁파될 때, 여기서 생기는 재정 결손분을 장용영에서 급대한다는 조치가 함께 취해졌다. 군영으로서의 기능을 대폭 위축시킨 조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정월에는 정조의 탕평정책에 적대적이었던 벽파세력의 영수 沈煥之의 발의로 장용영은 혁파되었다. 정조의 능이 역시 화성으로 결정되었음에도, 그 능묘를 호위하기 위한 장용영은 일시적인 기구이며 후세까지 이어지는 법제가 아니라는 것이 그 논거였다. 당시 관원과 군사는, 신설된 부분은 폐지하고 다른 5군영에서 옮겨온 부분은 그대로 되돌려 보냄으로써 정리하였다. 극히 일부만이 장용외영을 대신한 摠理營에 소속되었을 뿐이었다. 장용영에 투입된 왕실의 재산을 포함한 모든 재정은 선혜청과 훈련도감을 비롯한 각급 관청에 나누어 옮겨졌다. 군영대장 역시 다시 척신계의 진출이 현저해지게 되었다. 이는 군주권의 위상이 급격하게 하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朴光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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