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1. 양역의 편성과 폐단
  • 2) 양역의 모순과 폐단

2) 양역의 모순과 폐단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국방체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중앙군의 개편인 5군영 설치를 통해 편성된 양역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민생과 국가 등 사회 전반에 커다란 폐단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먼저 양역제의 문제점을 ① 양역제도 자체의 모순, ② 양역제 편성상의 모순, ③ 양역 징수상의 문제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① 양역제도 자체의 모순이란 양역이 이미 부세화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군역적인 遺制에 따라 인정을 단위로 포를 거두고 있음을 말한다. 力役의 징발이라면 당연히 人丁이 단위가 되어야겠지만 物納의 경우라면 경제력에 기초하여 징수해야 마땅하였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 말해지는 양역변통론 중의 結布論者는 바로 이 점을 들어 토지로 징세 단위를 전환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인정 단위의 수포라 해도 그 부담이 얼마되지 않았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사실 良丁 한사람에게 평균해서 2필 정도의 부담이란 그렇게 무겁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족으로 본다면 부담의 중압감은 달라진다. 한 집안에 父子, 兄弟 3∼4인이 양역을 진다면 쌀로 환산해 5∼6석, 돈으로 계산하면 20냥이 초과되었다.139)≪肅宗實錄≫권 60, 숙종 43년 8월 신해. 후일 균역법 제정의 주관자였던 洪啓禧의 말을 빌리면 이 당시 양역을 부담하던 應役戶의 경제적 상황은 대개 並作農으로서 토지에서의 1년 수입이 평균 10석 정도 되지만 田主에게 반을 바쳐야 했으므로 실질소득은 5석(25냥) 정도였다고 한다.140)洪啓禧,≪均役事實≫. 물론 홍계희의 이 계산이 균역법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데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또 조선 후기에는 농가 부업이나 상업적 농업 등으로 다른 수입이 있어 반드시 5석 정도밖에 안될 정도로 영세하였다고만은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거운 세금이라고 말해지던 토지 1결에서의 법정세액이 대개 米 20斗 정도이고 당시의 관행인 養戶防結141)養戶防結이란 농민이 田賦를 바침에 있어 자신이 일일이 운반해 납부하는 고생을 피하고 또 收納色吏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잡다한 징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戶首를 정하여 그 호수에게 每 結當 租 100斗씩을 주어 일체의 상납에 응하게 하고 그 나머지를 호수가 차지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호수는 주로 土豪·吏胥 무리가 되었으며 이들은 지방관아와 결탁하여 이를 통해 중간 이득을 취하였으며, 한편 농민으로서는 結當 米 40斗(租 100斗)만 호수에게 내면 토지에서의 세금납부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게 됨으로써 이 양호방결은 조선 후기 농촌사회에서 관행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관한 기록은≪承政院日記≫1070책, 영조 27년 6월 4일의 蔭武 李彦熽의 上言에 자세하다.에 의하더라도 미 40두(租 100두) 남짓했던 것으로 볼 때 토지를 갖지 못한 병작농이 대부분이라는 응역자에게 5∼6석의 부담은 바로 생계의 파탄을 초래하는 원인이었다.

 양역제 자체의 모순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문제점이라면 人丁 단위의 수포라면서도 신분적 요소가 작용하여 양반이 제외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양역이 양민만의 身役으로 규정되었기에 양반의 군역 이탈이 새삼 문제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양반의 군역 이탈이 양역을 져야 할 양민의 피역을 유발하는 데 있었다. 양역을 부담한다는 것은 양민신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바였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사회에서는 그런 길이 완전히 막혀 있지는 않았다. 쉽지는 않았지만 양반 신분을 취득하거나, 합법적으로 면역의 특전을 부여받은 유생이나 교생 등을 冒稱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다만 사족지배체제가 향촌에서 위력을 발휘하던 17세기에는 그 길에 상당한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 시기에는 양역에서의 완전한 이탈보다는 보다 부담이 가볍고 덜 천시되는 이른바 歇役處로 투속하는 것이 더 보편적이었을 것이다.142)이를테면 숙종 15년에 마련된<各衙門軍兵直定禁斷事目>(≪備邊司謄錄≫43책, 숙종 15년 정월 24일)이나 30년의<軍布均役節目>(≪肅宗實錄≫권 40, 숙종 30년 12월 갑오) 제정 등이 헐역처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노력의 일단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족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사회경제적 변화가 본격화하는 18세기 이후 모칭 幼學이 크게 늘어나면서 호적상으로 양반을 모칭함으로써 피역하는 길이 일반화되었다.143)이 시기의 피역 방법에 대해 金容燮교수는 幼學·儒生의 冒稱, 校·院生의 모칭, 軍官·將校로 投屬, 璿派·勳族의 모칭과 族譜 위조와 같은 적극적 방법과, 부분적인 피역으로서는 私冒屬으로서 歇役處에 投屬하는 소극적 방법을 들었다(金容燮, 앞의 글, 215쪽∼227쪽). 양민의 피역과 헐역처 투속은 그만큼 양역을 져야 할 양정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홍계희의 말에 따르면 62만 호가 져야 할 양역을 10만 호가 부담해야 하는 모순이 나타나게 되었으며144)洪啓禧,≪均役事實≫. 이것이 바로 양역폐 발생의 직접적인 요인인 양정 부족을 초래하여 백골징포·황구첨정 등의 양역의 폐단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② 양역폐 편성상의 모순이란 임진왜란 이후 군제편성에서 초래된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왜란 당시의 훈련도감·속오군 설치도 그러하였지만, 인조 이후의 계속된 군영창설은 전쟁의 위기 속에 급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처음부터 계획적일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재상으로서 軍門 하나 장악하지 못하면 부끄러이 여겼다는 말145)≪顯宗改修實錄≫권 22, 현종 11년 7월 임술의 史臣의 말.에서 보듯이 집권세력간에 벌어진 軍權 경쟁으로 군영의 설치가 좌우되는 상황에서 서로 자기 계열의 군영에 대한 지원과 특혜를 부여하였다. 특히 군문의 유지를 위해서는 군병과 보인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던 만큼 각 군문은 양정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었다. 그래서 나온 超法的인 조치가 直定과 自募였다. 직정이란 정상적인 행정체계를 거치지 않고 각 군·아문들이 지방관을 제쳐두고 직접 군보를 지정하여 군문에 예속시키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李貴가 인조 초에 어영군을 抄募할 때 中軍·參議官·別將 등을 지방에 보내면서 처음 시도되었는데 이후 다른 군영에서도 그대로 채용하였다. 자모란 정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보인을 스스로 모집하게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보인의 부담을 다른 역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게 해야 하였고 이것은 해당 군영에서 처리해 주었다.

 이런 직정과 자모같은 방식은 당장 군사 調發과 양역제 운영에 혼란을 가져왔다. 조선 전기의 5위제하에서는 예컨대 義興衛에 경기·충청·강원·황해도, 龍驤衛에 경상도하는 식으로 어느 도는 어느 위에 속한다고 규정되어 있어 통제가 쉬웠다. 그런데 이제 직정·자모가 시행되다 보니까 도는 말할 것도 없고 군현마저 각 군문·아문에 소속된 군사와 보인이 뒤섞여 있게 되었다. 충청도 沃川郡을 예로 들어 본다면 훈령도감·어영청·금위영·병조는 물론 掌樂院·尙衣院·司僕寺·中樞府 등 15개의 군문·아문에 모두 29종의 양역 명목146)≪良役實摠≫권 2, 忠淸左道 沃川郡.이 혼재되는 복잡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숙종 때의 신완은 만약 전쟁이 일어나 군사를 조발하게 되면 각 군문마다 자기 소속 군사를 징발하도록 수령을 독촉할 터이니 수령이 여러 군문으로부터 명령받는 것만 해도 혼란스러울텐데 어찌 이를 일일이 분간하여 그 소속처로 나누어 보낼 수 있겠으며 7·8일이나 보름씩 걸려 요행히 군문을 찾아간들 군사 조발의 기일을 놓쳐 아무 쓸모없게 되리라고 그 허구를 격렬히 비판했던 것이다.147)申琓,≪絅菴集≫,<進八條萬言封事箚>五曰定軍制. 군사확보의 방법으로 나온 직정과 자모가 도리어 군사 조발과 양역 징수의 혼란을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정과 자모는 결과적으로 군제와 役種편성의 無定制性을 부채질하며 양역 행정의 혼란을 가중시켰던 것이다.148)直定과 自募의 실상과 문제점에 관해서는 백승철, 앞의 글, 525∼532쪽 참조.

 이와 같은 군영 설치와 양역 편성의 무원칙·무정제성은 多歧한 役種의 명목설정과 군액의 과도한 증가, 그리고 苦歇의 편차가 심한 역 부담상의 차이를 가져왔다. 앞의<표 4>에서 보듯이≪양역총수≫에 적힌 명목만으로도 70종에 이르는데 이것은 그래도 숙종 30년(1704)의 良役釐正廳과≪양역총수≫편찬당시의 良役査正廳에서의 査減을 거쳐 정리된 것만이었다. 숙종 28년 신완의<均身役>條에 보면 관서지방의 경우 군병 명목이 100종에 가까웠다고 한다.149)申琓,≪絅菴集≫,<進八條萬言封事箚>. 양역 명목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방의 영·진·읍 또한 각종 군관·牙兵 등의 명목으로 군보를 모으고 있었다. 이들 명목은 불법적이고 은밀히 이루어져서 중앙의 통계에는 잡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런 양역 명목의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양역 명목에 따른 輕重苦歇의 양역 부담의 차이를 가져왔다. 병조의 기보병이 16개월에 한 번 번상하거나 出布함에 비해, 어영청의 騎士는 15개월에, 步軍은 48개월에 한 번씩 번상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숙종 28년 우의정 신완이 군역 가운데 가장 무겁다는 수군·조군·館軍의 부담이 1인당 3필인데 비해 가장 가볍다는 각종 명목의 군관은 3인이 1필을 낸다고 하여 무려 9배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 것150)위와 같음., 그리고 실제로도 같은 시기에 양역이정청에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수군·조군의 5종목이 3필 역이고 司僕寺 諸員이 2필 반, 기보병의 戶·保, 훈련도감의 포보 등 37종은 2필, 定虜衛·漁夫保 등은 1필의 차이를 보인 것이 그 예가 된다.151)收布疋數의 차이에 따른 구체적인 役名은 백승철, 앞의 글, 523쪽 참조. 명목이 다양함과 出役의 차이는 양역 행정의 난맥상을 초래하였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는 헐역처로의 투속을 불러 일으켰다. 양역에서 빠지지 못할 바에야 누구나 부담이 가벼운 역을 지려는 것이 人之常情이기 때문이다. 또 바로 이런 점을 노려서 각군·아문들은 새로운 명목과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 군정을 불러모으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상호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가운데 투속자는 날로 늘고 그에 따라 각종 명목에 속한 군액은 엄청나게 증가하여 이미 숙종 28년(1702)경에 앞서 제시한<표 4>에서 보듯이 100만 명을 넘었던 것이다. 실로 피역과 헐역처의 투속은 역의 명목을 갖지 아니한 양정의 씨를 말리다시피 하여 양정의 부족현상을 가져오게 하는 기본요인이었고,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생하게 마련인 궐액의 代定을 어렵게 하여 어린아이와 죽은 자의 백골까지도 군역의 명단에서 빠지지 못하게 하는 참상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③의 양역 징수상의 문제란 摠額制를 말한다. 조선시대는 각 지방에 일정한 군액의 총숫자를 배정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군액에 해당하는 군보를 확보하여 번상시키거나 혹은 포를 상납해야 했다. 이를 軍摠이라 불렀다.152)이 군총제의 原形은 世宗 때부터 찾아진다(金鍾洙,<17세기 軍役制의 推移와 개혁론>,≪韓國史論≫22, 서울大, 1990, 162쪽). 그래서 각 읍은 궐액이 발생하면 다른 양정으로 이를 채워 넣어야 했으며 이를 위해 나온 것이 앞서 말한 세초였다. 그런데 양정이 없으면 결국 그 지역에 할당된 군포의 책임량을 채우지 못하게 되고 그 책임은 수령에게로 돌아오므로 수령들은 불법임을 알면서도 백골징포·황구첨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때로 거두지 못한 身布를 일부 탕감해 주기도 하고 농민의 流離로 호구가 줄어든 이른바 軍多民少한 군현에 대해서는 특별히 군총수를 줄여 주거나 민다군소한 고을의 양정을 옮겨 주기도 했으나 군총제 자체를 폐기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숙종·영조 때의 여러 차례에 걸친 약간씩의 군총 조정을 거쳐 영조 24년(1748)의≪良役實摠≫으로 확정된 지방 군현별 군총은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153)鄭演植교수는 앞의 책에서 良役弊의 원인이 役摠의 過多에 있다고 보고 論旨를 전개하였다.

 양역의 폐는 신분적인 모순과 정치적 목적에 의한 군영 창설 및 운영에서 빚어진 피역과 헐역이 원인이 되어 양정의 부족을 자초하였고 이것이 양역의 폐를 격화시켰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鄭萬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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