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2. 양역변통론의 추이
  • 3) 양역변통론의 전개

3) 양역변통론의 전개

 현종 말년의 갑인예송으로 논의 대상에서 밀려났던 양역변통론은 숙종대에 들어와 다시 일어나게 된다. 그대로 방치하기에는 양역으로 인한 민생의 피해가 너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숙종 이후는 西人과 南人, 그리고 老論과 少論사이에 政爭이 심하였고 그런 만큼 朋黨단위의 정권교체도 빈번하였다. 양역변통론이 물론 민생문제의 해결 방안으로서 여러 사람에 의해 개별적으로 제기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결국은 집권세력의 양역 대책 수립과정에서 검토되고 논의되게 마련이므로, 그것의 전개도 이러한 정치 상황의 변동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전기(숙종 1∼20년)·중기(숙종 20∼36년)·후기(숙종 36∼46년)의 3단계로 나누어진다.

 전기는 남인정권에서 시작하여 庚申黜陟·己巳換局·甲戌換局의 정국 변화를 거쳐 서인정권으로 귀착되는 정치적 격동기였다. 숙종 초의 집권세력이던 남인들은 아약·백골징포를 양역폐의 기본 요인으로 보고 이것의 해소를 양역 대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183)이하의 서술은 주로 정만조,<肅宗朝 良役變通論의 展開와 良役對策>(≪國史館論叢≫17, 國史編纂委員會, 1990)과 鄭演植, 앞의 책을 참조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양역변통론도 자연히 이런 방향에서 제기되고 검토되었다. 그것은 크게 두 갈래로 나타났다. 하나는 아약·백골징포가 결국 양정 부족 때문에 왔다고 하여 양정의 확보를 위한 良丁搜括策의 방법과 관련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약·백골징포를 줄이거나 면제하여 없애는 데서 오는 경비 부족을 충당하는 방법과 관련되었다.

 앞의 양정수괄과 관련해서는 먼저 남인계 산림으로 정계에 처음 나와 여러 개혁안을 제시했던 윤휴가<五家統法>및<紙牌法>을 제안하였다. 5가통이란 다섯 집을 하나의 統으로 묶어, 統(首)-里(正)-面(都尹·副尹)-邑(守令)으로 조직되는 최말단의 행정단위로 삼는 종전의 5가작통법을 보완한 것이며, 지패법이란 한 지역 거주자에 대해 面里統의 소속과 統首를 밝힌 아래 戶主와 소속 개인의 인적 사항(특히 군역 관계)을 기록해 놓는 일종의 등록증 내지 신분증을 말하는 데, 이를 통해 호구 이동에 관한 파악을 쉽게 함으로써 도망하거나 몸을 숨기는 폐를 방지하여 賦役을 균등히 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당시의 영의정 許積을 위시한 집권 관료세력은 현종 말의 경신대기근의 여파로 民의 유망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의 타개를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양정수괄책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윤휴의<오가통>주장은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對民統制보다는 閑丁색출과 漏丁적발의 측면이 보다 강화되어 숙종 원년(1675) 9월<五家統事目>184)≪肅宗實錄≫ 권 4, 숙종 원년 9월 신해.으로 확정되어 시행에 들어가게 된다. 반면<지패법>은 서식의 기록 방식이 양반의 체통을 떨어뜨린다 하여185)≪肅宗實錄≫권 6, 숙종 3년 3월 정축. 채택되지 않았다.

 같은 양정수괄론을 펴면서도 영의정 허적 등 집권세력의 핵심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수많은 궐액을 보충할 양정의 획득을 일차적 목표로 하고 있었다. 숙종 2년 6월 병조에서 올린<양정사핵절목>186)≪肅宗實錄≫권 5, 숙종 2년 6월 병인.은 바로 이들 집권세력(영의정 허적, 좌의정 權大運, 병조판서 金錫冑 등)의 양역문제에 대한 의견을 집약한 것이었다. 모두 10개조로 된 절목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양정수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담고 있었다. 궐액의 수는 많고 閑丁은 적으므로 부득이 11세 이상은 양역을 지게하고 과거급제자의 자제나 中庶의 자제 중 有蔭者를 가려 有廳軍으로 삼되 無蔭者에게는 역을 지게하며, 각 관청의 生徒로 이름을 걸어 놓은 자와 軍官·武學·業武들은 忠壯衛로 삼고 校生은 眞僞를 가려서 군역에 속하게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양정사핵절목>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으나 이를 전담하는 기구로 설치된 都案廳을 통해 양정수괄에 적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윤휴의 지패법이 양반의 체통을 떨어뜨린다 하여 반대하던 허적은 신분을 직접 노출시킴으로써 양민의 파악에 가장 효과적인 호패법의 시행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숙종 3년<호패사목>187)≪備邊司謄錄≫33책, 숙종 3년 정월 8일.으로 성립하였다.

 숙종 초의 양정수괄책으로 제기되었던 위의 여러 논의들은 각기<5가통사목>·<양정사핵사목>·<호패사목>으로 확정되어 실시되었다. 그 결과 앞서 현종 말년의 경신대기근 당시 5만 명에 달했던 양역의 궐액은 숙종 3년에 1만 8천 명으로 줄어드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전례가 그러했듯이 이 때의 양정수괄도 민원을 야기하였다. 11세 이상을 군역 충정의 대상으로 삼은 자체가 아약의 폐를 시정한다는 본래의 목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교생·군관 및 서얼 등 한유하던 층들의 군역 충정에 따르는 불만이 크게 일어났다. 자신의 본래 의도와 달라진 5가통법과 호패법을 비판하던 윤휴가 양정수괄과 같은 무리한 방식에서 보다 근본적인 대책으로서 호포론을 제기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였다.

 윤휴의 호포론은 그 전모를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호포시행에 따르는 구체적인 절차와 내용들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실록에 나타난 호포론에 대한 그의 주장과 비판 의견에 대한 반론을 통해 살필 수밖에 없다.

 양정수괄의 강행으로 물의가 일던 숙종 3년 11월, 그는 당시의 양역이 “生民의 巨害요 王政의 大弊”라 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담은<寬恤事目>을 올렸다.188)≪肅宗實錄≫권 6, 숙종 3년 11월 갑오.<寬恤事目>에 관해서는 韓㳓劤,<白湖 尹鑴 硏究>(≪朝鮮時代思想史硏究論攷≫, 1996), 160∼162쪽 참조. 여기서 그는 逃亡·物故·아약자에 대한 징포의 탕감이나 감면을 주장하면서 그에 따른 경비 부족은 각 관청에 저축된 것으로 보용하되 다음 해부터는 호포법의 시행으로 근본을 바로 잡고 장기적인 재정책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위의 기록만으로는 그의 호포론이 양역제 자체의 철폐를 전제로 한 대변통론인지, 아니면 도고·아약징포의 탕감·감면으로 인한 부족 재정만을 확보하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의 호포론에 대한 조정의 검토에서 그가 “물고·아약에서의 징포를 먼저 탕감하고 관청을 하나 세워서 호포법을 행하며 나아가 軍兵·公私賤의 제도까지 모두 변통할 것”을 말하자 영의정 허적·병조판서 김석주·호조판서 吳始壽 등이 모두 놀라면서 “지금 논의하는 호포론은 아약·도고의 폐단을 변통하자는 데 불과한데 만약 윤휴의 지금 말대로 한다면 국가의 제도를 통틀어 고치자는 것이니 결단코 행할 수 없다”189)≪肅宗實錄≫권 6, 숙종 3년 12월 계축.고 한 것을 본다면 윤휴의 본래 의도는 대변통을 지향한 것으로 보이나, 그의 호포설을 옹호한 부제학 李堂揆가 당시의 도고·아약의 숫자가 많아야 4, 5만 명에 불과하며 이를 포로 헤아리면 10만 필 정도인데, 양민 가운데 역을 지고 있는 자나 공사천의 納貢者, 홀아비나 獨戶 등을 제외하고 역을 지지 않고 놀고 있는 20만여 호에서 1필씩만 징수하여도 그 수가 배나 되므로 매년 호포를 징수하지 않아도 재정이 충분할 것이라 하면서 出布는 당연히 公卿大臣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면, 양역제는 그대로 두고 도고·아약 징포의 탕감·감면에 따른 부족 경비를 충당하려는 제한적인 의미의 호포론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양역제에 대신할 호포제를 지향하되 시론적으로 그 의미를 한정시켜 발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윤휴의 호포론이 제한적인 것이든 대변통론적인 것이든 호포 부과의 대상 속에 양반사족이 포함되는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호포설에 대한 반대도 사족의 수포문제에 집중되었다. 의정부의 의견을 대변하여 우의정 許穆은 호포에 대한 원성이 아약이나 물고에게서 징포하는 원성보다 클 것이라고 반대했으며, 심지어 대사헌 李袤는 이로 인해 赤眉·黃巢의 난과 같은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극론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허적은 호포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면서 다만 어린 임금이 새로이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안정이 필요한 이 때 민심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호포제를 실시하기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선조 이후 처음 집권하여 아직은 정치 기반이 취약한 상태였기에 사족의 여론 향배에 보다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남인정권의 정치적 이해 타산에 아마도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허적의 시기 부적절론은 대다수 조정 신하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반대론에 직면한 윤휴는 이제 자신의 주장을 보다 명백히 하였다. 반대론의 핵심인 민심동요설에서 말하는 民의 실체를 양역민(小民)과 遊士·倖民(豪右)으로 나누면서 유사·행민의 사소한 원망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아약·백골징포에 시달리는 양역민의 처지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민생문제 해결에 임하는 小民 위주의 이러한 개혁 자세는 사족 중심의 민심동요설을 앞세운 반대론자의 그것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윤휴의 호포설에 반대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李堂揆 외에 왕의 외척으로서 당시 정계의 실력자이던 병조판서 김석주가 이를 찬성하였다. 그는 민원이 다소 우려되는 바이지만 임금께서 행하기로 정하여 남의 말에 끌려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시행한다면 호포법 자체는 편리한 제도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윤휴와 같은 시기에 戶布議를 지어 당시의 京外 經費 60여 만 필을, 完戶와 弱戶로 나눈 40만여 호의 實戶에서의 징포로 충당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통계까지 제시했던 그의 호포설190)金錫冑,≪息庵遺稿≫권 17, 議行戶布議.
여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0세 이상의 남녀를 대상으로 하여 8口 이상의 호는 完戶로 하고 7口 이하의 호는 弱戶로 한다. 兩界와 개성·강화·제주를 제외한 6도의 총호수가 약 100만 호인데 그 가운데 公私賤·驛吏·驛奴·柳匠·鮑尺·廢疾·流丐 등을 제외하면 호포를 부과할 수 있는 호가 대략 48∼49만 호가 된다. 여기서 騎兵·訓鍊別隊·御營軍·精抄軍·漕 軍·水夫·烽軍 등 正軍·戶首가 약 7∼8만 호이므로 이를 제외하면 實戶가 대략 40만 호이다. 京外의 경비가 대략 60여 만 필이므로 完戶에서는 봄·가을로 나누어 1년에 2필을 거두고 弱戶에서는 가을에 1필을 거둔다.
은 그러나 군사력 강화를 위한 군사재정의 확보에 기본 목표를 둔 것이어서 윤휴의 그것과는 목적 자체가 달랐다. 그러므로 그는 호포론 자체에는 찬성하면서도 그 실시에는 적극적인 의사를 보이지 않았고 諸臣의 호포불가론에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위에서 살핀대로 호포를 지지하는 소리는 약하고 시기부적절을 앞세운 반대론의 기세만 드세어지자 윤휴 스스로 호포법을 서서히 강구하자고 후퇴함으로써 좌의정 권대운의 건의에 따라 절목을 마련하는 선에서 논의는 그치고 말았다.

 양역변통론이 재발되기는 경신출척으로 정권을 쥐게 된 서인에 의해 남인세력의 청산이 완료된 숙종 7년(1681)부터였다. 이 때는 마침 흉년으로 재정부족이 심각하여 賑政을 펴는 데도 궁색함을 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당시 大老라 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정치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던 송시열이 救民活國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면서 그 기본방향으로 改貢案·變軍制를 제시함으로써 양역 논의를 열었다.

 송시열의 변군제론의 내용은 養兵에 호조의 재정 3분의 2가 되는 8만 석이 소요되어 항상 국가재정의 부족이 초래되니, 훈련도감의 長番給料軍을 점차 줄여 없애고 어영청의 번상병으로 대체하여 어영군이 늘게 되면 2개 군문으로 나누어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이러한 변군제론은 김석주를 비롯해 金萬基·閔維重·金壽恒 등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척신계의 즉각적인 반발을 받았다. 그들은 왕의 숙위를 單弱하게 할 수 없으며 반란으로부터의 도성방어에 필요한 군사력의 확보를 위해서도 훈련도감은 폐지될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양병으로 국가재정의 소모가 많다는 문제점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를 번상체제로 대체하는 것은 12만 명의 새로운 양정이 필요하므로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결국은 양병에 필요한 재정을 별도의 稅源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요컨대 수포범위의 확대를 의미하였고 이는 사족에게서의 出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악화일로에 있는 양역의 폐를 변통하는 길이기도 했다. 앞선 시기에 여러 차례 거론되었다가 중단되곤 하던 호포론이 김석주와 김수항, 그리고 李師命 등 외척세력에 의해 재론되어 몇 달간 격렬한 찬·반논쟁을 야기했던 사정은 여기에 있다.

 이 시기 호포론의 발단은 숙종 7년(1681) 12월 평안감사 柳尙運과 병사 李世華의 평안도에 대한 호포시행을 요구함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영의정 金壽恒과 좌의정 閔鼎重은 평안도와 황해도에 먼저 시험해 보기로 하고 이를 전담할 사람으로 평소 군사재정 확보책으로 호포론을 주장하던 병조판서 김석주를 천거하였다. 그러자 司諫 宋光淵이 이튿날 바로 호포를 “백성을 동요하게 하는 정책”으로 몰아 반대론을 폈다. 조선 후기에 나온 호포론의 대표라고 할 만한 병조참판 이사명의 호포상소는 바로 그 닷새 후에 나왔다. 이사명은 김석주의 처조카이면서 동시에 娚姪女胥이기도 하였으며 또 그에 의해 保士功臣에 책봉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정치적으로 성장해왔던 만큼191)≪肅宗實錄補闕正誤≫권 12, 숙종 7년 12월 을미. 李師命의 母와 金錫冑의 처는 모두 黃一皓의 딸로 자매간이며 또한 李師命은 김석주의 매부인 趙顯期의 사위였다. 그의 호포상소의 내용이 김석주가 앞서 숙종 3년에 만들었다는<戶布議>를 충실하게 따랐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長文으로 된 그의<戶布疏>192)≪肅宗實錄≫권 12, 숙종 7년 12월 갑오.는 특히 그 때까지 호포반대론의 핵심적 요소였던 사족 출포로 인한 명분 붕괴설을 辨破하는 데 역점을 두었는데, 그것은 요컨대 人丁은 신분을 반영하지만 家戶는 田結과 마찬가지로 그것과 전혀 무관하며 전결에서의 出租가 하등 명분에 저촉되지 않듯이 가호에서의 출포 또한 君子·野人의 명분을 전혀 문란케 하는 것이 아님을 힘써 주장한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각종의 병폐를 유발하는 양역의 징포를 일체 폐지하고 양역은 번상과 부방 등의 군사적 활동만으로 국한시키며 그에 따른 소요 경비는 호포에서 마련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즉 전국의 100만여 호 가운데서 노비와 병들고 유랑하며 밥 빌어먹는 등 포를 거둘 수 없는 40만여 호를 제외한 70여만 호를 둘로 나누어 8명 이상으로 된 完戶에서는 2필씩, 8명 이하의 弱戶는 1필씩 내게 한다면 1년에 80∼90만 필을 거둘 수 있으며, 이것으로 良布폐지에서 오는 경비 부족을 충당하고 지방 군사의 군사비도 마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아울러 군제도 변통하여 3개의 군영에 모두 12만 명의 번상군을 예속케 하여 12번에 걸쳐 2개월마다 교대하게 하되 3천 명은 번상하고 3천 명은 赴防케 하며 이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를 호포수입으로 감당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호포론은 양역민에게서의 징포에 따르는 도고·아약의 양역폐를 구해야 한다는 양역변통론과 국가재정을 위협하는 양병제의 철폐인 송시열의 군제변통론, 그리고 왕과 척신세력의 군사력 강화론 등 상반되기조차 하는 여러 주장들을 호포제의 실시를 통해 일거에 해결하려 한 대변통론이라고 하겠으며, 따라서 그것의 실현 여부는 오로지 양반사족층의 반응 여하에 달려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명도 처음부터 호포가 양반사족의 신분적 우월에는 하등 영향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바로 이 점, 즉 사족의 출포가 호포제 실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사명의 호포론을 포함하여 역대의 호포론 논의에서 나타난 사족출포 반대론은 대개 3가지 논리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 첫째는 신분적으로 우월한 양반사족이 평민과 같이 포를 낼 수는 없다는 특권의식에서 나온 명분론이고,193)이것은 숙종 7년에 나온 大司憲 李端夏의 성리학적 명분론을 원용한 戶布 反對䟽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肅宗實錄≫권 11, 숙종 7년 4월 병술). 둘째는 대다수의 양반이 극히 곤란한 생활을 하고 있어 호포의 부담을 지기 어렵다는 實情論,194)이것은 영조 26년 知敦寧 李宗城이 올린 兩班의 困窮相을 밝힌 글에 잘 드러나 있다(≪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6월 계사). 셋째는 징포의 강행으로 인한 양반사족층의 불만으로 국가의 안위가 우려된다는 민심동요설이었다.195)이것은 앞서 尹鑴의 호포론에 대해 대사헌 李袤가 赤眉·黃巢와 같은 반란이 있지 모른다고 한 것(≪肅宗實錄≫권 6, 숙종 3년 12월 무오)이라든가 위의 이종성의 발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핀 이사명의 호포론이 조정의 여러 신하들 사이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좌절되자 호포론을 막후에서 지휘하던 병조판서 김석주는 송시열계의 군제변통론을 일부 수용하면서 실질적인 군사력 강화를 꾀하는<군제변통절목>을 올렸다.196)≪肅宗實錄≫권 13, 숙종 8년 3월 갑자.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합하여 번상병으로 이루어진 금위영을 신설, 훈련도감·어영청과 함께 3군영체제를 갖춤으로써 숙위와 도성 방어체제를 정비 강화하면서, 한편으로서는 훈련도감군 707명을 감축하여 米 6,780석과 布 127통을 절약하고 그 만큼 양정의 여유를 얻게 하며, 정초청의 보인 5,870명을 병조로 옮겨 포 235통을 거두게 하는 내용이었다. 김석주는 호포법의 주장도 취소하였고 훈련별대·정초청의 2개 군영이 금위영으로 합쳤으므로 군문 혁파가 이루어졌으며, 또 상당수의 군액감축으로 양정의 확보도 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으나 실은 보다 정비된 금위영을 설치하게 됨으로써 군사력 강화를 꾀한 그 본래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양역변통은 이후에도 계속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호포론이 아닌 군문 혁파와 군액 감축을 주장하는 군제변통론 위주였다. 물론 이 때의 군제변통론은 금위영의 혁파를 내용으로 하고 있어서 훈련도감을 대상으로 했던 송시열계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점에서 갈라서게 된 송시열 및 척신계의 노론과 달리, 朴世采를 앞세운 趙持謙·南九萬 등 젊은 사류중심의 소론쪽에서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금위영 혁파론에 대해서는 국왕 숙종의 반대가 확고하였다. 2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숙종은 정치에 강한 의욕을 보이며, 특히 군사권을 쥐고 있던 척신 김석주가 죽은 다음에는 국왕 스스로 군사권을 장악하여 군사력의 강화에 비상한 관심을 드러내었다. 陵幸을 빌어 중앙군에 대한 잦은 점검 및 훈련을 실시한 것이 그 하나의 예였다. 왕의 이러한 군사력 강화 의욕 앞에 소론측의 군제변통론은 더 이상 거론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숙종 13년(1687)에는 양역폐의 완화와 군사력 강화에 필요한 양정의 확보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앞서 숙종 8년의 査正廳 설치 후 12년에 일단 마무리되었던 양정 색출 작업이 다시 추진되는가 하면, 각 군문의 재정이나 보인 확보와 관련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묵인해 오고 있던 사모속에 통제를 가하는<各衙門軍兵直定禁斷事目>197)≪備邊司謄錄≫43책, 숙종 15년 정월 24일.을 제정, 양역보다 부담이 가벼운 역(歇役)으로의 투속으로 인한 양정 부족현상을 방지하고 양정 확보를 기하려는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상이 숙종 초에서 20년에 이르는 전반기의 양역변통론이라 하겠는데 그것은 전 시기에 걸쳐 양정 확보를 위한 양정수괄책이 진행되면서, 아약·백골징포의 폐단 제거나 군사력 강화를 위한 재정 확보에 목적을 둔 호포론이 제기되어 조정에서 활발히 논의되었으나, 결국 양반사족층의 반대로 시행 불가가 확인되는 상황이었다고 요약되겠다.

 다음은 숙종 20년에서 36년경에 이르는 중반기의 양역변통을 보기로 한다. 이 시기는 전반적으로 소론이 우세한 가운데 소론내의 남구만·申翼相·柳尙運·尹趾完·尹趾善 등의 온건론자 및 특히 박세채와 그 문인들인 申琓·金構 등의 탕평론자들이 정국을 이끌고 있었다.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의 중립적 자세로 인하여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음으로써 정치기반이 굳지 못하였던 그들은 애초부터 사족의 불만을 불러올 대변통론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小變則小益’이라는 입장의 군제변통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군문 혁파와 같은 경장책은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임진왜란 이후 별다른 통제없이 군문별로 제각기 달리 편성된 군액이나, 특히 효종 이후의 군비확장 때 군사 재정의 확보를 위해 군문별의 양정 모집을 허용함으로써 오게 된 양역 부담의 심한 차이와, 이로 인한 양역민의 避苦趨歇하는 혼란을 시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우선 각 아문의 양역수를 정하는<各衙門良役定額數>와<六道良役存減數>198)≪備邊司謄錄≫50책, 숙종 25년 8월 25일.가 작성되었다. 이로써 京各司의 경우 총 27,794명 가운데 17,436명을 그 인원으로 확정하고 나머지 10,358명을 줄여서 각 도·각 읍의 궐액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5군영과 水軍 등에 대해서도 軍額釐正과 裁減을 내용으로 하는 군제변통이 시도되었다.

 良役釐正廳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여 이를 전담할 句管堂上까지 두어 가면서 강구하여 거둔 성과는 일련의 절목형태로 마련되었는데199)이 때 만들어진 절목은≪肅宗實錄≫권 40, 숙종 30년 12월 갑오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五軍門改軍制節目>,<水軍變通節目>,<軍布均役節目>,<海西水軍變通節目>,<校生落講者徵布節目>. 그 내용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즉 ① 군제개편에 대해 지금까지 군문마다 달랐던 부대편제를 통일하여 용병의 효율성을 높이고 三軍門都城守備 체제를 갖추게 했다는 점, ② 군제개편 과정을 통한 군액의 재감으로 36,793명의 양정을 얻어 각 고을의 도고에 代定케 함으로써 백골징포·황구첨정의 폐단을 일시적이나마 완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 ③ 水軍의 番布 3필을 2필로 줄여 騎步兵과 같게 하였다는 점, ④ 군포의 질을 6升布 40尺으로 통일한 점, ⑤ 1필에서 3필에 이르는 각종 명목의 수포의 양을 대개 2疋로 균일화한 점, ⑥ 校生에 대한 考講을 강화하여 피역자를 색출하되 罰布 2필을 징수, 감영에서 관리하여 백골징포를 감면하는 데 보충하도록 한 점 등이다. 지금까지 논의에만 그치던 데서 처음으로 가시적 성과를 낳게 된 것이나 본질적인 개혁이라기 보다는 양역제의 모순과 폐단을 부분적으로 시정하고 제거한 데 불과하다고 하겠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①의 군문편제의 통일과 ④·⑤의 군역균일화는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무질서하게 성립했던 군문과 그에 따른 양역 편성의 불합리 및 불공평을 가능한 한 정리, 통일성과 均制性을 부여하였다는 면에서 종전의 이정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성과로 평가되며, 후일 영조떄 시행된 균역법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숙종 중기에 소론과 탕평론자들의 양역변통론이 거둔 이러한 성과는, 그러나 추진세력 스스로 인정하듯이 일시적인 데 불과하였다. 몇 년을 가지 못해 도고·아약폐에 대한 지적이 다시 빗발쳤다. 소변통책으로 치유되기에는 양역폐의 골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양역 논의는 숙종 후반기에도 계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의 양역변통론은 숙종 37년(1711)과 40년의 두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논의의 계기는 두번 다 왕에 의해서였다. 먼저 숙종 37년 정월 새해를 맞은 왕은 백골징포의 참상을 들어 묘당에 대하여 救弊策의 마련을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6개월여의 논의를 거친 끝에 나온 묘당의 결론은 다름아닌 호포였으며, 그나마 오늘날의 형세로는 시행하기 어려울 듯하다면서 종전대로의 양정수괄이 그래도 실현 가능한 방안이라고 하였다. 숙종 후반기의 양역변통 논의를 빛나게 한 李頤命의 丁布論은 바로 이 때 나왔다.200)≪肅宗實錄≫권 50, 숙종 37년 8월 갑술.

 이이명은 우선 소변통론으로서의 양정수괄이나 군액감축 따위는 고식적일 뿐이요, 柳鳳輝가 주장한 감필론은 재정부족의 난점이 있고, 遊布論은 사족·품관·閑散·군관·교생의 여러층 가운데 어디까지를 징포대상으로 할 것인가를 정하기 어려우며 호포는 等戶不均의 문제점이 있다고 하여 당시에 제기된 양역변통론을 하나하나 비판하였다. 그런 뒤에 양역제의 철폐와 그에 대신해 丁布制를 주장하였다.

 그것의 주된 내용은 양반을 포함한 모든 남녀의 成丁(여자는 남편에 합함)에게서 2人 1疋씩을 징수하되, 공사천·功臣嫡長·종친·문무이품 이상, 老弱·病廢, 當番軍卒 등은 면제하고, 정포법 시행을 위한 호적제의 엄격한 운용과 정포의 징수 관리를 맡을 별도 기구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정포론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 훈련도감의 양병제를 번상병으로 대체하는 군제변통과 노비종모법의 부활을 통한 양민 인구의 증가, 어염세의 국가 관리에 의한 군사재정의 보충 등 숙종 초 이래 제시되었던 여러 방안이 같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이이명의 정포론은 숙종일대에 제기되었던 제반변통론을 사족까지 포함된 남녀 성정에게서의 수포를 골자로 하여 종합한 것으로서 사족수포론의 총결산이란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같은 시기에 右尹 朴權은 이이명의 이 정포론을 수정하여 남녀 구별없이 각기 60문, 30문씩의 돈을 내게하는 口錢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용을 정비했다고 하여도 이 정포론 내지 구전론이 사족수포불가론의 심한 반대를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반대론의 기본 논리는 반란우려설이었고 이번에도 그것은 효력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대변통 중심의 양역 논의는 일단 유보되었으며 그 대신 묘당의 제2안이던 양정수괄의 방법이 강구되었다. 그 결과는 숙종 37년(1711)의<良役變通節目>과 39년의<良役査定別單>이었다.201)≪備邊司謄錄≫63책, 숙종 37년 12월 26일 및 66책, 숙종 39년 7월 18일·67책, 숙종 40년 2월 7일. 이 중 후자는 군·아문의 액수를 査減定額한 것이어서 새삼스런 것이 없으나 전자는 里定法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크게 주목된다. 도고의 파악과 그 대정을 수령으로부터 면·리로 넘겨 尊位이하 有司·色掌 등으로 하여금 수행케 하는 방안인데 관의 일방적인 도고대정에서 오는 백골·아약징포의 비리를 막고 피역의 방지와 그 색출의 편의에 목적을 둔 양역 행정의 개선과 강화를 도모한 대책이었다.

 유보되었던 양역변통론은 3년 후인 숙종 40년 왕에 의해 다시 촉발되었다.202)≪肅宗實錄≫권 55, 숙종 40년 9월 기미. 왕은 그 동안 논의된 소변통론의 제방식은 일단 배제하고 호포·구전의 두 가지 중에서 그 이해 득실을 따져 강구하도록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에 약 1년여에 걸쳐 묘당의 諸臣은 물론 朝野의 疏章에서 이를 언급치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의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논의가 끝나는 단계에서 분명해진 것은 호포를 포함한 新法을 쉽게 시행하기는 어렵다는 결론뿐이었다. 그리하여 겨우 도고이정과 軍丁民戶均齊論과 같은 양역제 운영상의 문제점을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소변통론을 취하는 선에서 그쳤다. 초기와 중기의 양역 논의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사족에게서의 수포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당시 집권세력의 공통된 판단이었고, 따라서 왕에 의해 촉발된 이 때의 논의는 단지 그것을 재삼 확인한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점차 권력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노론은 한편으로는 왕의 양역변통촉구에 응하면서도 그 주된 관심을 숙종 36년을 고비로 본격화한 소론과의 집권경쟁에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치적 변동기에 처하여 자파에 대한 여론의 악화를 초래할 것이 분명한 사족수포를 강행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사정은 소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양역 논의의 말미에 유봉휘의 감필론이 양인포 형태로서 잠시 제시되었던 사실은 후대의 균역법 제정과 관련하여 이 시기의 양역 대책이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결국은 그런 방향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주는 좋은 예였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숙종대의 양역변통론은 그 다양한 방법론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정치상황의 불안과 권력향방의 불투명에서 오는, 그 추진세력의 권력기반 취약성으로 인하여 양역폐의 궁극적 해결책이 사족수포에 있다는 결론에는 누구나 동의하면서도 결국은 소변통에 의한 일시적 구폐책으로 시종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숙종대의 호포·구전·유포·결포 등의 양역변통 논의를 통하여 하나 분명하여진 사실은 양역폐의 시정을 위한 어떠한 근본대책의 수립도 현실적으로는 극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와 같이 대변통론이 양역 논의에서 점차 후퇴하고 있는 경향은 경종·영조대를 지나면서 노론이나 소론을 막론한 정권참여자들의 양역변통론에서 보다 확연해지게 된다. 특히 영조는 양역변통론이 단지 상하의 한가한 이야기거리로 되어 실효가 없음을 탄식하고 良謀善策이 있으면 진언하되 호포·결포·구전은 오늘날의 인심으로는 결코 시행할 수 없으리라고 하여 대변통의 불가를 스스로 표명하기까지 했다.

 이에 숙종 37년 柳鳳輝의 良人布論에서 처음 주장되었던, 양역체제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다만 2필을 1필로 하여 양역민의 현실적 부담을 줄이는 감필론이 경종 연간부터 유력해지기 시작하였다. 감필론의 강점은 무엇보다 양반층의 반발을 야기하지 않으면서도 감필로 인한 實惠를 표방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탕평의 가시적 성과를 양역문제의 해결 속에서 드러내고자 하던 영조가 후일 이 감필책에 토대하여 균역법의 제정에 착수하였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감필론에는 하나의 큰 문제가 뒤따랐다. 바로 감필에 따르는 재정부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부족한 만큼 재정지출을 줄인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실제로 경종 원년 洪州목사이던 李廷濟는 양역변통에서 새로운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하며 단지 1필의 포만 거두고 부족한 것은 절약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역설하기도 했다.203)≪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윤 6월 병자.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감필론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제시되기 보다는 언제나 그 부족한 재정의 보완책을 함께 수반하여 제안된다. 그 선구가 경종 원년 좌의정이던 李健命에 의해 주장된 結役論이었다.

 이건명은 1필로 감하는 것은 양역 자체가 무겁기 때문이며 또 이로써 헐역처와 같게하여 결국 균일한 데 이르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하고는, 감필에 따르는 재정보완책은 앞서 숙종 말에 金楺가 잠시 거론했던 결포론에 근거하여 전결에서의 잡역가를 전용함으로써 마련하면 된다고 하였다.204)≪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8월 임술·갑술. 잡역가란 흔히 雉鷄柴炭價라고도 불리우며 수령에 대한 供上이나 지방관아에서 필요한 物種을 현물로 바로 거두는 대신 토지에 별도로 붙여서 징수하는 하나의 관행이었다. 이 잡역가는 일정한 원칙이 없이 지방 수령이 임의로 징수했으므로 지방에 따라 3∼4두에서 많으면 8∼9두에 이르렀다. 당시 민전에서의 법정세액이 전세·대동미·삼수미를 합해 20두가 채 못되었던 점으로 볼 때 이 잡역가의 징수량은 상당하였다.205)田賦總計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숙종 43년 8월의 신해조(≪肅宗實錄≫ 권 60)에 보이는 忠淸監司 尹憲柱의 狀啓에는 “大同一結納米十二斗 稅米及三手粮六斗許 其他雜費二斗許 本邑雉鷄價三斗 四等柴草炭炬價一斗許 總計一結一年應役 不過米二十四斗”라 되어있다. 그리고 영조 27년 6월 4일(≪承政院日記≫ 1070책)의 公州進士 閔友夏의 上言에는 “田畓每一結 春秋大同十二斗 田稅四斗 三手粮一斗二升 合爲十七斗二升 而以其雜役 無定限之故 各邑合三稅十七斗二升及雜役價 而所捧米 自二十餘斗 至三十斗之多”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건명은 바로 이 잡역가를 감필로 인한 경비부족을 보완할 재정자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종래의 잡역가는 戶役으로 돌려 1호에 2∼3전씩만 징수하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이 감필결역론은 비변사의 동의를 얻어 그것의 시행이 초래할 예기치 못한 폐단에 대비한다는 뜻에서 삼남의 한두 곳에 시험해보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같은 노론계의 正言 柳復明과 병조판서 李晩成의 심한 배척을 받았다. 반대의 논리는 토지에서의 세금납부가 너무 많아진다는 것과 감필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부담을 전결로 전가시킨 데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데다가 그 주장자인 이건명마저 곧이어 壬寅獄에 걸려 죽임을 당함으로써 감필결역론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 주장은 후일 균역법 제정을 주관하였던 홍계희에게 직접 영향을 미쳐 균역법의 내용 구성에 뼈대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양역폐의 시정과 관련하여 실현가능하고 일정한 범위 내에서나마 성과를 거둘수 있는 방안으로서의 감필에 대한 관심은 노론에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된 소론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吳命峻·李眞儒의 주장 이후 처음 우의정에 오른 李光佐는 그 初政으로서 감필문제를 주로 논의하기 위한 良役廳의 설립을 추진하고 李台佐·柳鳳輝·沈壽賢·趙泰億·李眞淳·金始煥 등을 그 담당자로 하여 감필에 따른 給代財源을 강구하게 하였다.206)≪景宗實錄≫권 13, 경종 3년 9월 임오. 그리하여 영조 즉위 직후 소론계 여러 관료들에 의해 감필을 전제로 한 군제개편(訓鍊都監·御營廳체제, 守禦廳·摠戎廳·禁衛營혁파)·戶錢論 등이 주장되게 된다.

 숙종 후반기 이후 노론·소론간의 정치적 대립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격화되고 있었지만, 양역문제에 관한한 숙종 말 경종대를 지나면서 어떠한 대변통론도 실시가 불가능하다는 점과 그 대신 감필이 현실적으로 가장 시행성이 높은 변통론이라는 데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하겠다.

 영조대는 흔히 탕평책이 추진되어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이 함께 벼슬하였고 그런 만큼 당쟁도 많이 가라앉은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막상 영조대의 정치현실에 들어가 보게 되면 반드시 그렇지마는 아니한 것을 알 수 있다. 각 붕당들이 조정에 함께 벼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국의 주도세력은 엄연히 구별되었다. 즉위 초 노론·소론이 번갈아 가며 한번씩 정권을 잡던 시기를 거친 후 탕평책이 추진되면서 영조 16년(1740)의 庚申處分을 경계로 그 이전은 소론출신의 탕평파가, 그 이후는 노론 명분 아래 탕평의 정국이 운영되다가 균역법이 시행되는 영조 27∼28년경 이후는 노론출신의 탕평파 곧 탕평당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소론탕평·노론탕평이란 말이 세상에 전해지기도 하였던 것이다.207)鄭萬祚,<英祖代 中半의 政局과 蕩平策의 再定立>(≪歷史學報≫111, 1986, 9).

 영조대의 양역문제 역시 이러한 정국 주도세력의 변화와 직접 연결되어 그 해결방안이 모색되고 논난되었다. 다만 전시대와 달리 양역변통 논의에 임금의 의사가 보다 크게 작용한 점이 달랐을 뿐이다.

 영조 즉위 후의 양역변통론은 감필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대사헌 李明彦은 금위영·수어청·총융청을 혁파하는 군제변통을 통해 감필을 단행할 수 있다고 하였고, 修撰 金弘錫은 戶錢의 실시를 병행하는 감필을 주장했으며, 승지 金東弼·前判官 金萬翊 등도 이명언과 유사한 군제변통을 통한 군액감축으로 감필이 가능하다고 하였다.208)≪英祖實錄≫권 1, 영조 즉위년 9월 갑자·10월 계유·기묘 및 권 2, 즉위년 11월 임술. 이런 논의들은 앞서 경종 때 설치되어 이 때까지 존속하던 양역청에 수렴되어 감필에 따른 재정보완책의 강구에 참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감필논의는 곧 이은 乙巳換局으로 노론정권이 들어서면서 중단되었다. 민생문제보다 정치명분이 우선이라는 노론의 정치논리로 소론에 대한 정치공세가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소론의 건의로 설치되었던 양역청마저 폐지되었다. 물론 노론측으로서도 양역대책이 없을 수는 없었다. 戶·口·遊·結의 이른바 良役四條가 시행하기 어려움으로 閑丁搜括에 힘쓸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과 함께 특히 산림으로 徵召된 韓元震에 의한 호포론의 제기가 있었고,209)≪英祖實錄≫권 10, 영조 2년 8월 을해. 영조 3년(1729) 초 당시의 노론 영수이던 閔鎭遠의 서얼과 액외교생에 대한 1필 징수 주장을 계기로 양역 논의가 일어나는 듯 했다. 그러나 다시 소론에 대한 공격이 재발되면서 뒷전으로 밀렸으며, 丁未換局으로 정권은 소론으로 넘어갔다.

 소론정권이 들어서면서 양역 논의는 활기를 띄게 된다. 그리하여 호포·구전·유포·결포의 대변통론과 군문혁파·군제변통·군액감축·직정금지·도고충정과 같은 소변통론이 모두 거론되었다.210)≪英祖實錄≫권 14, 영조 3년 11월 갑인·정사·계해 및 권 15, 영조 4년 2월 병술. 특히 영조 3년 11월에는 영의정 이광좌의 요청에 의해 조정 諸臣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그 때까지 거론된 모든 양역변통론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논의의 최종적인 결론 역시 앞선 시기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인심이나 世道로 보아 결코 실시할 수 없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며, 다만 감필에 대해서만은 감필에 따르는 선후책 마련이 당부되는 속에 도고대정의 충실한 이행이 지방 수령에게 신칙되는 몇 차례 거듭된 과정을 되풀이 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趙文命의 호포 때문에 고려가 망했다는 주장으로 인해 임금의 호포에 대한 집념이 포기되었다.

 이후에도 간간히 제기되던 양역변통론은 다시 영조 9년에 임금에 의해 촉발된다. 이 때 영조는 자기 치세의 무성과에 초조감을 나타내어 “辛壬獄事 이래 나라 일을 한결같이 포기한 채 君臣上下가 모두 당쟁하는 것외에 한 일이 없으니 나라안의 모든 폐단이 이로 말미암았다”고 신하들을 질책하면서 변통책의 강구를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소론탕평의 정국에서 영의정이던 沈壽賢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변통책 마련에 임하고 좌의정 徐命均, 우의정 金興慶, 병조판서 尹游, 호조판서 宋寅明, 이조판서 金在魯, 靈城君 朴文秀, 형조판서 李廷濟 등 공경대신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하여 논의했으나211)≪英祖實錄≫권 36, 영조 9년 12월 을축·병인·정묘·을사·계유. 결과는 양역행정의 원활한 시행을 위해 유능한 수령을 선발해야 한다는 이광좌의 擇守令論을 받아들이는 외에 前日의 논의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영조도 제신의 감필론에 대해서 반을 줄이면 백성들이 또 반을 줄여주기를 바랄 터이니 썩 그렇게 바람직한 방안은 아니라 하여 실망하는 반응을 나타내었다.212)≪英祖實錄≫권 36, 영조 9년 12월 기사. 이 때 전라감사이던 趙顯命은 대변통보다는 사모속 때문에 양역폐가 왔다고 하여 헐역처나 군문에 투속한 자 및 피역자를 색출할 것을 주장하였다.213)≪英祖實錄≫권 37, 영조 10년 정월 임오. 소론탕평의 실세이면서 권력의 혐의를 피해 외직에 나가있던 조현명의 이 주장은 양역 논의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의 해결과 관련해 8道句管堂上이 임명되며 그 결과 또 한차례의 일괄적인 양정수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214)≪英祖實錄≫권 37, 영조 10년 정월 신묘. 앞선 시기에 이미 여러 차례 시도되었고 그 성과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조처의 거듭된 시행은 양역의 폐단을 운영상의 모순에서 구하는 고식적인 견해의 소산이라고 해야겠으나, 그나마 당시의 여건에서 취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이었다는 데 당시의 정치상황이 갖는, 그리고 정치명분에서의 불리를 민생문제의 대책마련을 통해 만회하려 한 소론 내지 소론탕평 정권이 갖는 한계라고 할것이다.

 사실 앞선 시기인 경종 연간 후일의 영조이던 王世第의 반대편에 섰던 소론으로서는 영조 치세하에서는 불리한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불리를 상쇄하고 出仕의 구실을 마련해 줄 적당한 명분이 필요하였다. 탕평과 함께 당시 민폐의 제일 요인이라는 양역문제는 이런 경우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소론의 영수 이광좌가 환국 후 조정에 재진출하면서 양역문제 해결을 초미의 과제로 앞세우고,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소론출신의 탕평파가 주도한 소론탕평에서 양역문제가 활발하였던 것은 여기에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양역 논의가 상하의 閑談이 되어버렸다는 영조의 탄식처럼 논의에만 맴돌고 어떤 결말을 내기는 어려웠다. 정치기반이 약한 소론으로서는 일찍이 호전론을 주장하던 김홍석이 “오늘의 정치를 담당한 사람들이 호전 등 변통책에 대해 생각치 않은 것은 아니나 감히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更張을 꺼리는 데다가 또 오늘날의 국가기강으로는 행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라”215)≪英祖實錄≫권 1, 영조 즉위년 10월 계유.고 비난한 바와 같이 대변통책을 정책으로 추진할 역량이 부족한 데다, 정치적 목적이 우선했기에 그런 의욕이 또한 크지 않았던 것이다.

 소론탕평은 영조 16년(1740)의 庚申處分과 뒤이은 辛酉大訓으로 소론명분이 무너짐으로써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이후의 탕평책은 노론측의 정치명분 속에서 소론출신 탕평파에 의해 추진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시기 정계의 축은 노론계인 金在魯와 소론계인 조현명이었다. 앞선 시기의 이광좌 때와 마찬가지로 조현명 역시 10년 넘게 지켜온 자신의 탕평 참여 명분이 무너진 시점에서, 민생문제 해결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徐宗玉·李周鎭 등 소론계 탕평파와 元景夏·金若魯 등 새로이 등장하는 노론계 탕평파의 도움을 받아 추진된 良丁査正이었으며≪양역총수≫와≪良役實摠≫의 간행이었다.216)≪양역총수≫와≪양역실총≫의 내용과 그 의의에 관해서는 鄭演植, 앞의 논문, 103∼109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숙종 중기 이래 계속되어 온 衙門屬處別·지방별 양역인구의 조정과 확정작업의 총귀결이기도 하였다.

 영조 26년 감필의 단행에서부터 시작되어 28년의<結米節目>완성으로 시행을 보게된 균역법은 효종대 이래 계속되어온 양역변통론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감필결역론의 내용이 주된 골격을 이루면서 유포론이라든가 군제변통·양정수괄 등의 소변통론의 내용과 또 그런 논의 과정에서 군사재정 보완책으로 제기되었던 어염선세·은여결세 등을 國用으로 전환하자는 논의의 성과가 일정하게 반영되었던 것이 이를 말한다. 지금까지의 양역변통 논의를 살핀 데서 보듯이, 결국은 양반층을 중심으로한 여러 신분층의 이해관계 때문에 궁극적인 균역을 이루지 못하고 고식적인 선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균역법의 한계 또한 저절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로 보아서는 조정에서 취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타협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탕평의 구체적인 성과로서 양역문제의 해결을 열망하던 영조와, 소론탕평이 무너진 시점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명분을 민생고의 제일요인이던 양역문제 해결을 통해 확보하려한 조현명, 그리고 정치적 명분상의 우위를 확보한 노론계 탕평파들의 정국주도권 장악을 위한 시도 등이 함께 어울려 빚어낸 정책상의 산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후일 영조가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하던「吏郞」·「翰林」·「山林」과 함께 이「均役」은 탕평책의 공적으로서 기억되었던 것이다.

 균역법 실시 이후 金在魯·조현명 등의 탕평 일세대가 후퇴하고 균역법 제정에 함께 참여하였던 金若魯·金尙魯·元景夏·홍계희·洪鳳漢·申晩 등의 노론계 탕평파와 鄭羽良·鄭翬良·趙載浩·金尙星 등의 소론계 탕평파가 한데 결합하여 탕평당을 이루면서 정계를 주도하였던 것도 균역법이 大同을 지향하는 탕평의 한 측면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갖는 정치적인 성과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鄭萬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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