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3. 균역법의 시행과 그 의미
  • 1) 균역법의 제정 경위
  • (2) 급대재원의 마련

(2) 급대재원의 마련

 감필 결과 필요한 給代財源 총액은 약 80여 만냥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237)≪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14일·15일. 이듬해 영조 27년부터 감필이 시작되므로 그전까지 급대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급대재원의 확보를 어렵게 한 것은 不犯戶結, 즉 家戶와 田結을 과세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호전은 이미 포기하였고 결미는 영조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加賦’라 하여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선의 방책은 경비를 줄이는 것이었다.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거나, 군현을 통합하는 등의 갖가지 방안이 제기되었다. 이미 5월 말에 守禦使는 廣州留守를 겸하게 하여 도성 밖의 남한산성으로 나가게 하고, 摠戎使는 京畿兵使를 겸하게 하여 북한산성 蕩春臺에 營을 두어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게 하였다.238)≪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5월 경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재정 절감으로 엄청난 액수의 급대가 해결될 수 없었다. 결국 대규모의 재정 개편이 불가피했다.

 감필이 공포되기 하루 전인 7월 8일, 영의정 조현명이 그 첫 번째 시안으로서<良役變通節目>을 내놓았다. 주된 내용은 감필·급대를 관장할 기구로 經濟司를 설치할 것,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제를 개편할 것, 어염세를 징수할 것, 8도 각 읍의 환곡 중 50만 석을 경제사로 이관하여 환곡으로 운영할 것, 水軍布 급대를 위해 일부 鎭堡를 혁파할 것, 監司의 率眷을 혁파할 것, 校生·院生 및 군관을 대상으로 考講·試射를 시행하여 罰布를 징수할 것, 선혜청 稅作木과 충훈부 忠翊木을 경제사로 이송할 것 등이었다.239)趙顯命,≪歸鹿集≫권 18, 良役變通節目. 이 절목은 비록 구체적인 액수를 밝혀놓지 않은 막연한 계획안이었으나, 이 때부터 균역사목의 윤곽이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했다.

 <양역변통절목>이 제시된 이튿날 감필이 반포되면서부터 제반 급대재원 마련 방안이 하나 둘 결정되었다. 우선 8도 감사의 솔권이 혁파되었고(移劃)240)이하 ( )안의 내용은<原事目>에 등재될 때의 조항 이름이다., 7월 11일에는 ‘경제사’ 대신 ‘균역청’을 임시로 전의감에 설치하도록 하고 三相이 총괄하게 하였다(設廳). 당상으로는 申晩·金尙魯·金尙星·趙榮國·홍계희 등을 차출하여 이들에게 급대책을 강구하는 임무가 주어졌다.241)≪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11일.

 7월 하순에는 절목에 수정이 가해져서<良役變通條目笏記>가 마련되었다. 영의정 조현명에 의해 제출된 笏記 17개 조에는 절목에서 막연하게 제시되었던 급대와 그 재원 마련 방안이 액수와 함께 한층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주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242)≪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23일.

 우선 병조 기병·보병과 별기병의 番次를 8番에서 6번으로 줄여 인원을 감축하고, 군포는 16개월에 2필을 내던 것을 12개월에 1필로 줄인다(減革).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正軍 외에 잡다한 역은 모두 餘保로 만들어 本營의 급대에 충당한다(감혁). 선혜청의 詳定米·軍餉耗米·常賑耗米 등과 감사솔권을 혁파하여 절약된 營需米 등으로 三軍門 米保의 급대에 충당한다(移劃). 삼남·경기도의 軍作米 10만 석을 半分還穀으로 운영하여 耗穀을 軍餉米 급대에 보충한다(會錄). 이 밖에도 米保와 木保의 교체 등 급대에 관한 사항이 결정되었다.

 홀기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점은 급대 수요를 줄이기 위한 조항이 최초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 京各司 匠人保와 정군 자보 및 정군이 스스로 선정하여 채우는 自望保의 감필 부분에는 급대하지 않기로 하였다. 예컨대 어영청·금위영의 자보는 1保를 더하되 정군 스스로 찾아내어 더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의 급대수요는 스스로 해결하라는 방침이 정해졌다. 부족한 給代木은 감사가 어염세와 收布軍官의 군포 등 잡다한 수입으로 충당하라는 것이었다.243)漁鹽稅는 균역청으로 이관되기 이전의 것을 말하며, 軍官布도 選武軍官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상의 조항들은 모두 영조의 재가를 얻었다. 영조 28년<壬申原事目>의 10개 조항 가운데 設廳에 이어 이획·감혁·급대·회록 등 5개 조항의 기본틀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급대를 보장할 수 없었다. 또한 시행 세칙이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후속 조처가 계속되었다.

 8월 초에는 홀기를 바탕으로<給代節目>과<別單>이 대강 작성되었다.244)≪承政院日記≫1059책, 영조 26년 8월 4일. 이 절목에서 비로소 漁鹽·陳田·隱結·軍官이 재원으로 등장하였다. 조현명·金若魯·鄭羽良 등 三相은 절목과 별단을 올리는 聯箚에서 절목의 취지를 밝히면서 어염세의 관장 기구를 일원화하고, 진전을 개간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고, 良丁의 役을 고르게 하여 양역변통의 ‘根基’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45)≪英祖實錄≫권 72, 영조 26년 8월 을해.

 어염세는 5월 박문수의 호포론에서 호포제를 보완할 세목으로 거론되어 양역변통과 연계되어 논의되었다. 어염세는 일정한 과세 규정이 없고 징세기구가 다양하여 어민들이 重稅와 疊稅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이미 오래 전부터 세제 개편과 수취 기구의 일원화가 요청되고 있었다. 따라서 균역법 제정과는 별도의 당위성과 필요에 의해 개정 작업이 추진되었던 바, 7월에 박문수를 삼남에 漁鹽使로 파견하여 기초 작업에 착수하게 하였다가, 8월 초에 어염사를 均稅使로 명칭을 바꾸고 金尙迪과 李王厚를 추가로 파견하여 6도의 어염세 개정을 분담하게 하였다.246)≪承政院日記≫1059책, 영조 26년 8월 4일. 그러던 중<給代節目>에서 균역청의 재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두 번째, 陳田 항목은 진전의 降等·續田化 등을 통해 묵은 땅의 경작을 유도하여 세수입을 늘리려는 것이다. 세 번째, 은결은 收稅實結을 장부에서 누락시킨 것으로서 수령이나 이서배의 사사로운 용도에 쓰이기도 하였지만 지방재정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은결을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자수케 하여 색출해 냄으로써 그 결세를 급대에 활용하자는 것이다. 네 번째, 군관은 경제력을 이용하여 양역에서 빠져나간 양인 閑遊者들에게 군관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포를 거두려는 것이다. 사목에 이처럼 여러 항목이 수록된 것은 초기에 가호와 전결에 세를 부과할 수 없다는 원칙이 확고하여 자질구레한 것들을 긁어 들여 세입을 늘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목에 대해 李宗城은 모래알을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평했고, 영조는 ‘烏合’이라 평했다.247)≪承政院日記≫1059책, 영조 26년 8월 5일.

 결국 호와 결에 세를 부과하지 않은<均役事目>이 완성되었다. 최초로 시행되었던 이 사목은 이획·漁鹽船稅·隱餘結·軍官布·分定 등 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영조 27년(1751) 사목이 반포되자 여러 가지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어염세와 군관포에 대해서는 반발이 커서 중앙과 지방에서 모두 어염세와 군관포를 개정, 또는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조항들은 명분에 흠이 없고, 재원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모두 강행되었다.

 그러나 分定은 그렇지 못했다. 분정은 각 도 감영·병영·수영·통영 및 각 읍에서 재량껏 재원을 마련하여 지방군, 특히 수군의 급대를 채워 넣으라는 조항이었다. 당시 분정의 비중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현명의 계획안에 따르면 지방의 각 營邑에 할당된 분정 총액은 1,144同(57,200疋)으로서 錢으로는 약 11만 4천 냥에 달했다.248)趙顯命,≪歸鹿集≫권 18, 均役或問. 그런데 이렇게 많은 액수를 어떤 방법으로 조달하라는 것인지 사목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감영과 병영에는 재량껏 할당된 錢·木을 마련하라 하고, 각 군현에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거두는 쌀’로 감필로 부족해진 수군의 粮米를 채우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므로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균역사목>이 반포되자마자 각처에서 원성이 빗발쳤다. 특히 경상감사 閔百祥이 통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사목의 분정 조항에서 규정한 ‘각 읍에서 거두는 쌀’은 주로 雜役價(雉鷄柴炭價) 명목의 官需米를 지목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 8,400석이나 할당된 경상도에는 전라도나 충청도와는 달리 잡역가를 거두는 읍이 거의 없었다. 민백상은 경상도의 긴요하지 않은 鎭堡 8군데를 혁파하여 그 곳의 군보들이 내던 미·포로 분정을 해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249)≪承政院日記≫1064책, 영조 27년 정월 4일. 영남의 진보들을 혁파하자는 주장은 이미 전부터 박문수·조현명 등 여러 사람에 의해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던 바였다. 결국 민백상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8진보 가운데 龜山鎭을 제외한 나머지 甘浦·漆浦·丑山浦·永登浦·尙州浦·曲浦·豊德浦가 혁파되었다.250)≪英祖實錄≫권 73, 영조 27년 정월 을묘. 경상도의 경우는 이렇게 부분적으로 해결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뚜렷한 대책이 없었다. 분정은 균역청에서 끝내 해결하지 못한 재정 결손 부분을 지방의 감사·병사나 수령들에게 떠넘긴 것에 불과했다. 분정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지방재정이 파탄에 이를 것이 명약관화했다. 균역청 당상들도 분정이 언젠가는 폐지되어야 할 것임을 자인하고 있었다.251)≪承政院日記≫1068책, 영조 27년 5월 7일.

 영조 27년 5월 영의정 김재로는 차자를 올려 분정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고,252)≪英祖實錄≫권 73, 영조 27년 5월 임인. 심지어 어염·군관·분정 등에 문제가 많으므로 차라리 예전으로 돌아갈 것을 주청하였다.253)≪承政院日記≫1067책, 영조 27년 4월 20일.
≪英祖實錄≫권 73, 영조 27년 윤5월 병자.
영조는 舊制로의 복귀를 단호히 거부했다. 처음에는 감필을 주장했던 김재로가 復疋로 돌아선 것은 급대 재원의 확보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은 ‘不犯戶結’의 원칙 때문이었다. 결국 구제로 복귀하지 않고 분정을 폐지하자면 그 원칙을 파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호와 결 가운데 호는 이미 감필 이전의 여러 차례 논의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결국 결, 즉 토지에 세를 부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나선 인물은 바로 결포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던 홍계희였다. 김재로가 차자를 올린 그 날 홍계희는 균역법에 ‘大柱’를 세울 것을 건의하면서, 6도에서 결전 5전을 징수하여 30만 냥 가량의 給代財源을 마련함으로써 분정을 폐지하자고 하였다.254)≪承政院日記≫1068책, 영조 27년 5월 6일.

 한편 조현명은≪均役或問≫이라는 책자를 올려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제를 개혁하고 군현을 통합하여 감필로 인한 재정 결손을 메울 것을 주장하였다.255)≪承政院日記≫1068책, 영조 27년 5월 12일. 그의 개혁 방안은 지방의 어영청 군사와 금위영 군사를 모두 納布軍으로 만들고 그 대신에 서울과 경기도에서 약 1만 명의 군사를 선발하여 어영청과 금위영의 군사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한편 나머지 부분은 군현을 통폐합하여 재정 지출을 줄임으로써 해결하자는 것이었다.256)趙顯命,≪歸鹿集≫권 18, 均役或問.

 급대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이 계속 난항을 겪게 되자 6월 초에 홍계희는<均役節目變通事宜>를 올렸다.257)≪英祖實錄≫권 74, 영조 27년 6월 정유. 홍계희는 여기서 분정을 폐지하고 절목을 개정하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258)≪英祖實錄≫권 73, 영조 27년 윤5월 병자. 자신의 결전 5전 징수 방안과 함께 조현명이≪균역혹문≫에서 밝힌 금위영·어영청의 군제를 개편하고 군현을 통합하는 방안, 그리고 公州進士 閔宇夏의 결전 1냥 징수 방안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민우하의 방안은 이왕 결전을 징수할 바에야 결당 1냥을 징수하여 잡음이 일고 있는 어염세와 군관포를 폐기하자는 것으로서, 홍계희가 민우하와 개인적으로 만나서 들은 견해를<균역절목변통사의>에서 제시한 것이다.

 영조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다시 여러 계층의 여론을 수렴하기로 하였다. 영조는 홍계희의<均役節目變通事宜>가 올려진 이튿날 명정전에서 양역변통책에 대해 문신들에게 책문으로 묻고(一次臨殿), 다시 그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蔭官과 武臣 및 민우하를 불러 물었다(二次臨殿).259)≪英祖實錄≫권 74, 영조 27년 6월 무술·기해. 그 후 6월 17일 다시 명정문에서 지방의 유생·향리·향군을 불러 모아 놓고는 결전의 찬반에 대해 물었다(一次臨門). 이 자리에서 일부 유생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서울의 유생과 지방의 향리와 군사들이 모두 결전을 찬성하였다.260)≪英祖實錄≫권 74, 영조 27년 6월 임자.

 결국 영조 27년(1751) 6월 21일 결전의 징수가 결정되었다. 홍계희의 결전 5전을 거두는 방안이 채택된 것이다. 그날로 守禦使가 남한산성으로 나가면서 비게 된 舊수어청 건물로 균역청을 옮겨 청사와 창고를 마련하도록 하고 본격적으로 결전 징수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261)≪英祖實錄≫권 74, 영조 27년 6월 병진. 9월에 이르러<결미절목>이 완성되었다. 결전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에서 免稅田과 復戶田에서도 예외없이 거두되 米로는 2두, 錢으로는 5전을 내게 하였다. 이로써 균역법의 뼈대가 완성되었다.

 균역법의 뼈대가 완성되자 홍계희는 영조 28년 정월 균역법이 제정된 경위를 간략하게 적은≪均役事實≫을 왕세자에게 올렸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중에도 균역법에 관한 사항은 영조가 직접 처결하였기 때문에 세자에게 저간의 경위를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 28년 6월에 드디어 設廳·결미·餘結·海稅·군관·移劃·감혁·給代·需用·회록 등 10개 조항의<原事目>이 제정됨으로써 균역법이 완성되었다.262)壬申原事目은≪均役事目≫(奎No.1124)이란 이름으로 현재 서울大 奎章閣에 소장되어 있다. 감필로부터 꼬박 2년만이었다. 이듬해에<癸酉追事目>이 제정되어 1차 수정이 가해지고 때때로 시행과정에서 고쳐진 부분들이 있었지만 모두 사소한 것들로서 전체 구조에는 변화가 없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