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3. 균역법의 시행과 그 의미
  • 3) 균역법의 의미

3) 균역법의 의미

 17·18세기에는 농업생산력이 발달하고, 상품화폐경제가 확산되고, 지주제가 변화하고, 신분제가 동요되고 있었다. 이러한 제반 사회경제적 변화는 부세제도 및 재정제도의 개편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결과 18세기 중엽 영조조 중반에는 국가재정의 재정비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영조 24년(1748)≪良役實摠≫의 간행·반포, 25년≪度支定例≫의 편찬, 26년의 감필로 시작된 균역법의 제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漁鹽船稅 조정, 28년의 貢弊釐正, 31년의 奴婢貢 감하 등 일련의 정책들이 잇달아 시행되었다. 이와 같은 영조 중반의 시책들은 재정기구를 구조적으로 개편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대개 운영상의 문제점들을 개선하여 기존의 제도를 보완하려는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 균역법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큰 변화였고 국가재정에 미친 파급효과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구조적인 개편이 필연적으로 동반되었다. 결국 균역법은 제도의 고수와 개혁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시책이었으며, 중세사회의 발전적 해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함께 지닌 시책이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국가재정에 닥친 변화를 균역청의 설립과 중앙재정 및 지방재정의 변화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재정기구로서 균역청의 등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균역청은 영조 26년(1750) 7월에 전의감에 설치되어 그 곳에서 급대 재원의 확보 방안이 논의되었고, 영조 27년 6월 결전의 징수가 확정되던 날에 舊수어청으로 옮긴 뒤<원사목>을 완성했다. 이듬해 6월에 사목을 제정한 후로는 균역청의 주된 기능은 70여만 냥에 이르는 전곡의 징수·급대·운영이었다. 균역청은 영조 29년에 선혜청에 소속되어 상진청과 합쳐졌으나 재정규모에서 선혜청과 호조에 다음가는 기구로 부상하였다. 또한 급대 수요에 비해 수입이 월등히 많아 재정에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따라서 양역의 감필급대를 담당한 후 균역청은 給代衙門으로 자리잡아 각종 부세제도 개편 때마다 급대를 담당하였다. 영조 31년 노비공 반필을 감할 때에 그 급대를 떠맡아 약 44,000냥분의 급대를 담당한 뒤로 영조 연간에만 총 9회에 걸쳐 각종 급대를 담당하였으며, 정조 연간에도 高陽郡軍役給代 등 3회의 급대를 담당하였고, 순조 연간에도 소액의 잡다한 급대가 계속되었다.310)≪萬機要覽≫財用篇 3, 均役, 給代. 그러나 영조 45년에는 이획이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정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어염세 수입이 11만 냥에서 8·9만 냥 정도로 줄어들어311)金玉根,≪朝鮮王朝財政史硏究 Ⅱ≫(一潮閣, 1987), 245쪽. 재정 형편이 예전 같지는 않았다. 그 결과 순조 원년(1801)의 내시노비 혁파 때에는 균역청에서 감당할 수 없어 호조에서 급대를 담당하였다.

 한편 국가재정 자체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우선 중앙재정에는 감필로 인한 커다란 손실은 없었다. 중앙재정에서 순수한 결손이 있었다면 감혁으로 인해 삼군문과 각 사에서 약 2만 냥의 재정긴축이 단행된 것이었다. 비록 급대에서 제외된 부분도 있었지만, 앞서 밝혔듯이 자보·자망보 등에 해당된 것이었으므로 중앙 소속기관의 재정에는 손실을 초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정부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재정손실은 아니었지만 중앙의 기구 가운데 균역청에 재정수입을 넘겨주어야 했던 곳들이 있었다. 궁방·아문은 해세로 인해 어염선세를 균역청에 빼앗겼고, 선혜청은 이획으로 인해 균역청에 약 66만 냥의 재정수입을 넘겨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 기구들은 여러모로 사정이 참작되었다. 어염선세 부분은 일부나마 급대의 형식으로 되돌려 받았다. 선혜청은 균역청에 넘겨주었던 것들을 부분적으로 돌려 받기 시작하여 영조 45년에 이르러 전액을 되돌려 받게 되었다.

 우선 해세로 인한 궁방·아문의 재정손실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조·성균관·사옹원·기로소·종부시 등의 아문에는 약 5,600냥의 어염세가 급대의 형식으로 환급되었다. 불가피한 부분에 급대한 것이다. 다만 궁방이 장악했던 어염세는 환급되지 않았다. 어염세 급대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毓祥宮의 경우, 호조로부터 호조의 어염세 수입 가운데서 祭需錢 500냥을 지급받다가 호조의 어염세가 균역청으로 이속되자 균역청으로부터 공급받게 된 것이지 육상궁이 직접 징세하던 부분을 균역청에 넘긴 것은 아니었다.

 한편 선혜청은 균역법으로 인해 가장 큰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특히 삼남의 저치미 이획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 저치미 이획은 초기부터 선혜청의 반대가 있었는데, 결국 영조 36년에는 저치미의 무상 이획이 취소되고 稅作木 100同의 이획도 함께 취소되었다. 비록 이획의 명목은 남아 충청도·전라도의 저치미는 계속 3군문으로 이획되었으나 이획된 만큼 균역청에서 선혜청에 돈으로 갚아야 했던 것이다. 균역청에서 米條 급대에 사용할 쌀을 선혜청에서 사서 군문에 지급한 셈이다. 영조 45년에는 감사의 솔권이 복구되어 營需米 1,000석조차 균역청 수입에서 제외되었다. 영조의 특별 명령으로 지급되던 月令米 약 175석마저 선혜청 京畿廳의 미곡이 충분치 못하여 균역청에 이급되지 않았다.312)≪萬機要覽≫財用篇 3, 均役, 移劃. 선혜청은 결국 균역법이 시행된지 10년도 채 안된 영조 36년의 시점에서 균역청에 빼앗겼던 세입의 약 90%를 되돌려 받게 되었고, 그로부터 약 10년 뒤에는 나머지 10%마저 완전히 돌려 받아 균역법 이전의 상황으로 복구되었다.313)<표 6>참조.

 급대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중앙기구는 감필로 인한 재정결손을 거의 대부분 균역청에서 보상받았다. 급대 총액 중에서 병조·삼군문·각 사 급대가 차지하는 부분은 약 80%에 달했다. 이 가운데 삼군문과 각 사는 감혁에 의해 약간의 결손이 있었지만, 규정된 필요액은 모두 급대받았다. 나머지 18%가 조군·수군 등에 급대되었는데314)<표 9>참조. 이들은 지방에 소속된 군역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중앙의 관할하에 있는 이른바 京案付良役이었다.

 이처럼 중앙 재정은 감필로 인한 급대 재원 조달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지 않았고, 또한 손실 부분에는 부분적으로 급대 조치가 행해졌으며, 선혜청의 경우는 후에 완전히 복구되기도 하였다. 또한 급대에 있어서도 전액을 급대받았다.

 그러나 지방은 중앙과 전혀 사정이 달랐다. 초기의 사목에서 分定이 말썽을 빚은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결국 균역법의 감필은 지방재정의 희생으로 뒷받침되었다.315)鄭演植,<均役法 시행 이후의 地方財政의 변화>(≪震檀學報≫67, 1989). 지방의 영·진·읍은 급대 재원의 확보 과정에서 많은 세입을 내어놓아야 했고, 또 지방 기관에는 일부만 급대하거나 전혀 급대하지 않았다.

 우선 급대 재원 마련책에서 살펴보면 은여결의 색출(餘結), 어염세의 이속(海稅), 선무군관의 징발(軍官), 兩西 監·兵營木 등과 경기·삼남 軍作米 모곡의 회록 등으로 인해 인해 지방의 재원들이 잠식되었다. 이 가운데 은여결의 약 10만 냥은 그 전액이 지방 군현의 수입을 박탈한 것이었고, 어염세는 전액은 아니지만 그 가운데 일부가 지방 영읍의 수입으로 채워졌다. 선무군관은 직접적으로 지방재정을 잠식한 것은 아니지만 잠재적 재원을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록은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재정운영의 여유를 박탈당하여 압박을 받게 되었다.

 반면에 지방 기구는 급대에서 소외되었다. 중앙의 기관이 감필로 인한 부분을 전액 급대받았음에 비해 수군은 반밖에 급대받지 못했고 나머지는 전혀 급대받지 못했다. 각 영·진·읍 소속의 양역에 대해서는 급대할 수 없다고 이미 사목에서 밝혀 놓았다. 급대액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채 20%가 되지 못했다. 그나마 조군·수군 등의 경안부양역을 제외하면 중앙의 관여 없이 영읍에서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지방 군역으로 급대받은 것은 부산진의 4色軍과 안흥진의 기병 뿐으로, 급대 총액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를 약간 넘어 6,300여 냥이 전부였다.

 물론 지방재정이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급대 재원 조달 과정에서 손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경우에는 균역청에서 급대를 통해, 또는 급대와 유사한 경로를 통해 일부를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 통영에는 어염세를 가져간 대신 1만 냥을 획급하였고, 황해도에는 은여결을 가져간 대신 선혜청을 통해 상정미 1천 석을 획급하였다. 통영의 경우에는 1만 냥을 지급한 것은 지나친 처사라는 비판이 일어 다시 박탈되기도 하였다.316)1만 냥은 영조 29년에 박탈되었다가, 39년에는 다시 돌려주는 대신에 삼남의 統營 소속 耗米 2천 석을 균역청에 이속하게 하였고, 동 45년에 이르러 耗米의 이속을 파하는 등 몇 차례의 개정이 있었다(≪萬機要覽≫財用篇 3, 均役, 給代, 庚午給代). 그러나 나머지 경우에는 이런 조처를 기대할 수 없었다.

 많은 수입이 중앙의 군영·각 사 급대를 위해 감축되고, 지방 군역에 대해서는 급대가 시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에서는 나름대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원을 찾아야 했다. 결국 그 부담은 다시 민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어염세와 군관에 대한 비난이 균역청에 쏟아졌을 때 균역청 당상 金尙星은 균역법에 대한 비판들이 균역법의 지엽적인 문제점에 집착하여 본질적인 문제점을 외면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率眷을 없앤 불편은 감사에게 있고, 隱結의 불편은 수령에게 있고, 別軍官의 불편은 遊民에게 있고, 어염선세의 불편은 각 宮家·衙門에 있다. 그런데 지금 염려하는 점들은 제대로 짚어 논하고 있지 못하다. 내가 필경 폐단이 있으리라는 것은 營邑의 재정을 깎아 내었으니, 깎인 후로는 지탱할 수 없을 것이므로 侵漁하는 폐해가 장차 民에게 미칠 것을 말하는 것이다(≪承政院日記≫1068책, 영조 27년 5월 23일).

 김상성의 疏는 사태의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예전 규모의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군현민에 대한 징세를 강화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일이었다. 그 양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우선 군보의 수를 늘려 더 많은 인원에 양역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영조 26년(1750) 7월의<良役變通條目忽記>에서 나타났다. 금위영·어영청 자보의 감필에는 급대하지 않고 1保를 더하되 군보 스스로 선정하여 채워넣게 한 것이다.317)≪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23일. 군보 스스로 자보를 마련하지 못할 경우 그 부담은 본인이나 또는 소속된 군현의 부담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한편 전라도 陪持保는 진상 상납시의 잡비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것인데 감필 후 급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1,100명을 추가로 각 읍에 배당하여 해결하였다.318)≪承政院日記≫1071책, 영조 27년 7월 15일. 군보를 늘리는 방법은 특히 순천·무안·강진 등 전라도 어촌에서의 進上物種 마련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균역법 이전에 읍에 어염세를 납부하던 바닷가나 포구의 어민들에게는 양역이 부과되지 않았는데, 균역법 이후에는 어민들이 균역청에 어염세를 납부하게 되어 읍의 재정에 도움이 못되는 존재가 되자 영조 30년부터는 읍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양역이 부과되기 시작하였다.319)≪英祖實錄≫권 81, 영조 30년 6월 갑인. 진상물종은 저치미에서 會減하여 해결하고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民結이나 良人保에 부과하여 채우도록 하였는데, 浦民 중 無役者들을 늙은이고 어린이고 가리지 않고 무더기로 進上軍에 充定시키고, 더구나 규정된 인원 이외에 과다하게 충정시켰던 것이다.320)영조 25년 창설 당시 규정된 進上保 액수는 順天 100명, 務安 50명, 康津 20명이었는데 각기 650명, 412명, 786명으로 늘어났다(≪英祖實錄≫권 81, 영조 30년 5월 병오). 이는 어촌으로 도망한 피역자들을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감영의 허락을 얻어 시행되었으나, 상급기관에 알리지 않고 행해진 사례들이 낱낱이 밝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균역법은 환곡을 늘리는 데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경상도 浦項倉은 어염세 수입으로 別將·군관·下人·庫子들의 급료를 해결하였는데 어염세를 균역청에 넘기게 되자 창고에 남은 환곡 2,000석을 加分하여 그 모곡으로 급료를 해결하였다.321)≪承政院日記≫1071책, 영조 27년 7월 6일.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지방의 감영·병영이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환곡을 주관하는 아문으로 독립되었고, 더욱이 대부분 半分穀이 아니라 盡分穀으로 운영하였는데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균역법은 지방의 재정을 잠식했을 뿐 아니라 지방 토호들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다. 어염선세가 그러했고 선무군관이 그러했다. 어염선세의 이속으로 궁방과 아문이 주된 피해자로 지목되었으나 향촌의 양반토호들도 무시할 수 없는 피해자들이었다. 염전·포구·어장 등 곳곳에 있던 사족·토호들의 수입원이 박탈되었다. 그러므로 어염선세를 비방하는 자들로 지방의 토호들이 지목되었다. 선무군관도 마찬가지였다. 향청·서원 등에 私募屬으로 들어가 있던 부유한 양인들이 중앙정부의 독촉을 받고 있던 수령들에 의해 선무군관으로 선발되었을 것이다. 급대 재원의 확보 과정에서 폐지된 분정을 제외한다면 어염세와 선무군관에 가장 반발이 컸는데 특히 충청도에서 그러했다. 영조는 그 이유로 충청도에 京華士夫가 많았던 점을 지적하였으며,322)≪承政院日記≫1067책, 영조 27년 4월 23일. 이에 대해서는 충청도의 어염세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御史 韓光肇의 보고 내용도 동일하였다.323)≪均稅行覽≫御史韓光肇書啓.

 균역법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도 음미할 만한 부분이다. 균역법 제정 당시 각 도의 반응을 살펴보면 평안도와 강원도가 가장 환영하고 그 다음이 황해도이며 충청도와 전라도가 가장 불만이 많았다.324)≪承政院日記≫1067책, 영조 27년 4월 21일. 평안도의 양역은 이미 경종 원년(1721)에 모두 1필역으로 통일되어 감필의 혜택도 없었는데325)≪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8월 계해.
≪承政院日記≫1071책, 영조 27년 7월 6일.
균역법을 가장 환영하고 있었다. 이는 평안도는 토착 사족세력이 없는 지역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많은 재원을 박탈당한 곳은 삼남인데 그 가운데 영남이 반발세력으로 지목되지 않은 것도 토착 사족세력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경상도의 경우는 어염세가 본시 가볍게 책정된 데다가, 가장 큰 문제였던 통영에는 右沿 7處의 어염세가 배당되고 어염세를 대신하여 균역청으로부터 1만 냥이 획급되었다. 그러므로 충청도나 전라도에 비하면 훨씬 손실이 적었다. 또한 선무군관의 경우 가장 큰 피해자는 부유한 양인 한유자들이었다. 그 불만의 요체는 부담이 아니라 군포를 내는 양역에 징발된다는 사실이었다. 즉 신분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영남에서는 사족과 비사족의 구분이 비교적 엄격하여 양인 한유자들이 사족 행세를 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선무군관에 징발되더라도 충청도나 전라도에서와 같은 반발은 적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균역법을 중세사회의 발전적 해체과정에서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 균역법이 제정된 18세기 중엽의 시점에서 양역변통은 이미 100여 년을 끌어온 숙제였다. 중앙정부는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양역으로 인해 농가경제는 피폐되고 이는 국가재정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현명과 함께 균역법의 제정을 주도했던 홍계희는≪均役事實≫에서 균역법 제정의 당위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양역에 응하는 자는 10여 만 호뿐인데 10여 만 호로 50만 양역을 담당하게 하니 한 집에 4·5인이 있어도 모두 면할 수 없다. 그런데 한 사람의 身布가 돈 4·5냥인즉 한 집 4·5인에 모두 20여 냥이 든다. 이들은 世業도 없고 토지도 없는 무리로서 모두 남의 땅을 갈아 먹고 사는 바, 1년에 거두는 것이 많아야 10석을 넘지 않는데 그 반은 田主에게 돌아가니 나머지가 얼마나 된다고 20여 냥의 돈을 마련한단 말인가. 날마다 채찍질을 가해도 낼 방도가 없으니 마침내 죽지 않으면 도망한다(洪啓禧,≪均役事實≫).

 균역법은 그만큼 절박한 현실적 요청에 부응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이를 구조적인 개편으로 해결하지 않고 감필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용이한 방편을 택했다. 그 결과 균역법은 미진한 대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영조도 감필이 양역의 모순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영조는 재위 10년(1734)에 감필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감필하자 하면 제신들이 반드시 말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326)≪承政院日記≫1056책, 영조 26년 5월 19일. 김재로를 만난 자리에서는 감필이 너무 쉽게 결정되었다고 하면서 속마음을 드러내기도 하였다.327)金在魯,≪淸沙散錄≫, 答趙左相顯命論均役. 영조는 중앙정부의 양역변통 논의에 대한 民의 크나큰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호전이나 결전을 시행하지 못한다면 감필이라도 단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감필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단행된 차선의 선택이었다.328)≪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5일. 균역법은 양역제의 모순에 대한 응급처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조는 감필을 미진한 조처로 인식하면서도 감필이 결정된 뒤에는 태도를 바꿔 ‘大同之政’과 다름없는 것으로 추켜 세우고는 이를 고수할 것을 천명하였다. 균역법 제정을 주도한 인물로는 ‘均役主人’으로 일컬어진 조현명,329)≪承政院日記≫1068책, 영조 27년 5월 12일·26일. 결미징수를 관철시키고<원사목>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홍계희, 처음 호포론을 제기하고 균세사로 활약하면서 조현명과 홍계희를 도운 박문수 등이 거론되었으며330)≪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5월 경신·6월 계사., 한편 균역청 당상으로 있던 申晩·趙榮國·金尙星·鄭羽良 등도 일익을 담당하였다.331)朴光用,<蕩平論과 政局의 變化>(≪韓國史論≫10, 서울大, 1984)에서는 균역법 제정이 緩論 蕩平派에 의해 추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균역법 제정을 주도한 인물은 영조였다. 영조는 ‘均役主人’은 조현명이 아니라 자신이라 자처하면서332)≪承政院日記≫1068책, 영조 27년 5월 19일. 만년에는 균역법을 자신의 50여 년 치세에 이룩된 3대사업 중의 하나로 자부하기도 하였다.333)≪英祖實錄≫권 120, 영조 49년 6월 을묘 및 권 107, 영조 42년 10월 경신. 그러므로 영조 재위중에는 균역법에 대한 비판은 용납되지 않았다. 영조 26년 7월 감필이 결정된 뒤 보름도 채 안된 시점에서 正言 沈鏽가 감필을 반대하다가 체직됨을 필두로 하여,334)≪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19일. 이듬해 6월 명정전에서 양역변통책을 묻던 날 한성판윤 黃頲이 復疋을 주장하다가 면직되었고,335)≪承政院日記≫1070책, 영조 27년 6월 4일. 31년에는 執義 朴弘儁이 결전의 징수를 비난하여 島配되었다.336)≪英祖實錄≫권 84, 영조 31년 5월 을미. 심지어는 다시 2필로 복귀하자는 주장을 하는 자가 있으면 烹刑에 처하겠다고까지 말하였다.337)≪英祖實錄≫권 75, 영조 28년 정월 병자. 장령 姜必愼이 균역법에 대해 “돕는 자에게는 이익이 있고 공박하는 자에게는 해가 있다”라고 평했던 것은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직설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338)≪英祖實錄≫권 73, 영조 27년 윤5월 신사. 영조의 이와 같은 강경방침에 의해 균역법에서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남은 양역제의 모순은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거론되지 못한 채 잠복되었다.

 균역법의 문제점이 표면화되고 영조 스스로 이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영조 만년에 어사 沈履之가 직산의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실상에 대해 서계를 올린 때를 전후해서였다.339)≪英祖實錄≫권 116, 영조 47년 4월 정해. 영조 51년에는 생선 값의 폭등이 균역법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340)≪英祖實錄≫권 124, 영조 51년 3월 정축. 이 때를 전후하여 영조는 다시 鄕民들을 불러 모아 양역의 폐단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곧 이어 황구첨정·인징·족징에 대한 敎를 내리고 漁箭에 대한 사적인 수세를 엄금하였다.341)≪英祖實錄≫권 116, 영조 47년 5월 병오.

 균역법은 앞서 밝혔듯이 양역제의 병폐에 대한 응급처방이었다. 그러므로 그 효과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중앙의 통제가 이완된 틈을 타고 다시 어염세의 사적인 징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집단적인 避役의 한 형태인 契房村이 성행하여 역을 고르게 한다는 ‘均役’의 이념을 무색케 했다. 빈한한 良戶의 역부담은 다시 서서히 증가되었다. 1필 균역도 마찬가지였다. 감필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모두 ‘一疋大同’이 역의 경감과 함께 피역과 투속을 근원적으로 막는 방안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역가가 헐한 사모속이 다시 나타남으로써 1필 균역은 차츰 붕괴되었다. 균역법이 반포된 뒤에도 서원 등에서는 1필 미만의 역가를 책정하여 보인을 모으고 있었다. 사모속은 향촌사회의 수령·이서·민·사족·토호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창출된 것으로서 중앙정부의 의지나 금령만으로는 쉽게 해결될 수 없었다.

 균역법의 모순은 결국 19세기 민란에서 분출되었다. 18세기 말부터 일부 지방에서는 軍役田이나 軍布契가 관행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342)金容燮,<朝鮮後期 軍役制의 動搖와 軍役田>(≪東方學志≫32, 延世大, 1982). 한편 북쪽에서는 호포제가 지방관과 군현민들의 협의에 의해 중앙정부의 간여없이 시행되고 있었다.343)金容燮,<朝鮮後期 軍役制 釐正의 推移와 戶布法>(≪省谷論叢≫13, 1982). 이미 사회경제적 변화는 중세적 신분제에 바탕을 둔 부세체제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도와 현실의 괴리는 여러 가지 양상의 모순을 낳았고,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양역의 모순은 19세기 민란에서 중요한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세도정권은 모순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결국 호포제의 시행은 대원군집정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균역법에는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다. 감필은 비록 호포제나 결포제처럼 양역제의 완전한 혁파를 전제로 한 구조적 개편에는 미치지 못하는 조처였지만 농가경제를 적잖이 호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감필로 인한 급대 재원의 마련을 위해 결미 등의 새로운 세목이 추가되었지만 과중한 양역가의 경감은 이를 상쇄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염선세의 釐正도 높이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이미 17세기 전반기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가 균역법에서야 일단락 지어졌다. 어염세 개정은 균역법과는 무관한 독자적 당위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균역법과 맞물려 진행된 것이다. 영조 28년(1750) 6월의 윤음에서 어염과 은결은 균역법이 시행되지 않았더라도 단행되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어염선세를 良民과 海民 모두를 위한 ‘兼政’이라 표현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344)≪均役事目≫. 비록 사사로운 징세가 부분적으로 재개되기는 하였지만 균역법의 결과 해세의 징수 기관을 균역청으로 일원화시킴으로써 어민들은 궁방이나 토호의 자의적인 수탈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한편 결미는 양역의 일부를 양인의 인신에서 토지에 옮겨 부과함으로써 부세와 신분의 상호관련을 부분적으로나마 제거하게 되어 부세체제의 전근대적 성격을 약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양역의 모순이 경제력이 없는 민에게 과중하게 부과되어 빚어졌음을 고려할 때 결미는 균등한 과세를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홍계희가 양역변통을 주장하고 그 가장 좋은 방편으로 결포를 주장했던 것도 바로 그 점에 주목했던 것이다.345)≪英祖實錄≫권 70, 영조 25년 8월 계미 및 권 74, 영조 27년 6월 정유. 한편 ‘加賦’라고 거센 비판을 받았던 결미가 시행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의 농업생산력이 이를 감내할 수 있을 만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鄭演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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