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1) 세도정치의 성립
  • (1) 권세가의 권력 독점

(1) 권세가의 권력 독점

 19세기 전반의 정치를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처음으로 ‘世道’라는 용어가 쓰여진 것은 朴齊炯의 ≪近世朝鮮政鑑≫에서였다.346)세도정치에 대한 기존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윤정애,<정치사 연구의 동향과 과제>(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조선정치사 1800∼1863≫, 청년사, 1990), 37∼57쪽 참고. 즉 “조선에서는 政權을 世道라고 하며 어떤 사람이나 집안이 그것을 가지는데, 왕이 세도의 책임을 명하면 지니고 있는 관직에 관계없이 의정 판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고, 국가의 중대사와 모든 관료의 보고를 왕보다 먼저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은 대개 그대로 이어져, ‘勢道政治’가 순조·헌종·철종 연간의 정치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다만 ‘세도정치’의 ‘세도’는 ‘世道’라는 말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勢道’라고 표기하여 趙光祖·鄭仁弘·宋時烈 등의 정치적 역할을 설명하는 데 쓰인 ‘世道’와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원래 世道란 세상을 세상답게 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이 지켜 가는 길을 가리키는 말로, 조선 건국 이후 유교적 왕정 관념이 강화되면서 국왕이 세도의 책임자로서 더욱 중요해졌다.347)이하 세도의 개념과 주체에 대해서는 박광용,<정치운영론>(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위의 책), 688∼693쪽 참고.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士林이 정치 주도세력이 되자 세도에 대한 책임도 국왕에게서만 구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져나갔고, 특히 유학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山林’이 정치 운영의 중심축으로 떠올라 제도적으로 그들이 정책 결정권을 나누어 갖는 것을 보장하게 되었다. 나아가 송시열 단계에 이르러서는 세도의 담당자는 ‘義理主人’인 산림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붕당정치적 질서에서는 勳臣과 더불어 戚臣의 정치 참여가 적극적으로 견제되었다. 그러나 노론의 권력 독점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산림세력과 왕실 외척 가문의 결합을 바탕으로 정권이 유지되는 하나의 정치 형태가 이루어졌다. 붕당 및 정파 사이의 경쟁과 대립이 격화되면서 훈척세력이 兵權을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348)洪順敏,<肅宗 初期의 政治構造와 「換局」>(≪韓國史論≫15, 서울大, 1986), 129∼199쪽. 그것은 扈衛大將의 경우 훈척만이 임명될 수 있다는 규정이 새로 만들어진 데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공식화되기도 하였다. 특히 척신의 정치적 비중이 점점 커졌고, 사도세자의 장인 洪鳳漢과 영조의 처남 金龜柱를 중심으로 한 영조 말년 왕실 외척 사이의 대립은 순조 즉위 후 貞純王后에 의해 義理를 근간으로 한 정당한 것이었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정조는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고자 왕권의 강화와 유교적 관료제의 정착을 추구하면서, 국왕 스스로 세도의 담당자이며 책임자로 나섰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정치체제로 정립시키지 못한 채 죽음으로써 탕평정치하에서 군주 중심의 정치 운영 질서를 하나의 체제로 정립시키는 데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순조 초년까지는 국정에서 훈척의 의미를 중시하는 인식과 함께 훈척의 정치 참여를 경계하는 전통적인 인식도 강하게 존속되고 있었다. 金祖淳은 국구가 되기 전인 순조 즉위년(1800)에 壯勇大將職을 사양하는 상소에서 훈척 양면으로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장용대장과 같은 군문대장의 경우도 훈신 또는 외척으로서의 신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김조순은 이조판서를 사직하면서도 같은 논리를 개진한 바 있다. 그러나 반대로 순조 즉위 직후의 논의에서 沈煥之는 김조순을 두고 순조의 외조부인 朴準源과는 처지가 다르므로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외척의 국정 참여에 한계를 두는 입장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모순은 순조 즉위 직후 僻派세력이 주도권 장악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을 당시에 대왕대비가 박준원·김조순을 戚里 또는 척리에 준하는 위치 때문에 서용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정조 연간에는 척리를 쓰지 않았음을 강조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척신의 공식적인 정치참여가 점점 자연스러운 것으로 굳어져 갔다.349)이하 세도정치기의 정국운영과 정책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은 오수창,<권력집단과 정국 운영>(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앞의 책), 575∼633쪽 참조. 순조 17년에 죽은 朴宗慶에게 붙인 史評에서는 그의 氣槪와 더불어 국왕 외조부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단시간에 정경에 승진하고 훈련대장[元戎]을 맡은 것을 당연시하였다. 한편 척신의 비공식적인 활동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칭송되었다. 헌종 2년(1836) 潘南 朴氏 朴周壽가 죽었을 때에도 대왕대비는 그가 안에서 담당한 역할은 밖에서 다 알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여 내밀한 활동을 추켰던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당시 정권을 잡았던 척신들 대부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순조·헌종·철종대에 정권을 장악한 외척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의 가문, 순조 친모의 아버지인 박준원의 가문, 孝明世子의 처가인 趙萬永 가문 등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순조대, 특히 순조 11년의 홍경래란 이후로 김조순이 정권을 오로지하고 있었음은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며, 김조순 사후 헌종 6년까지는 金逌根이, 헌종 친정기에는 趙寅永 및 趙秉龜가, 헌종 11년에 조병구가 죽은 뒤로는 趙秉鉉이, 철종대에는 金左根이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당시 권력가들이 세력을 행사하던 양상은≪근세조선정감≫의 내용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다음과 같은 순조 당시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관작을 홀로 거머쥐고 맑고 화려한 관직[淸華職]들을 주무르기를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된다고 하며, 일이 권한에 관계된 것이면 자기의 물건으로 여기고, 사방에 근거를 굳혀 한 몸으로 모두 담당하려 합니까? 세간에서 칭하는 바 문관의 권한, 무관의 권한, 인사의 권한, 비변사의 권한, 군사의 권한, 재정의 권한, 토지세의 권한, 주교사의 권한, 시장 운영의 권한을 모두 손안에 잡아 득의양양해 하며 왼손엔 칼자루를, 오른손엔 저울대를 쥐어 거리낌이 없습니다(≪純祖實錄≫권 16, 순조 12년 11월 병자).

 이것은 순조 12년(1812) 趙得永이 박종경을 공격한 내용의 한 부분으로, 정적에 대한 개인의 평가이기는 하지만 그 이후 이른바 ‘權奸’들에 대한 설명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권세가의 행태는 김조순을 비롯한 집권 외척의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19세기의 권력자는 비변사를 주도함으로써 일반 국정을 장악하되 대신직에 있는 측근 관료로 하여금 주요 정사를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활동할 필요는 별로 없었다. 다만 국가에 특별한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공개적으로 정상의 권력을 행사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 순조 11년에 홍경래란이 일어나 그 토벌군 지휘관을 뽑아야 할 때와 같은 경우 김조순은 빠지지 않고 나타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외척 권력가가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음은 정국의 중요한 고비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순조가 孝明世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명령을 내릴 때에 김조순은 이미 왕명에 앞서 측근 관인들을 불러 모아 의견을 조정하였다. 또 효명세자가 죽은 후 그 시기에 세력를 모았던 인물들에 대한 공격이 가해질 때 김조순은 세자의 지문을 쓰면서 자기 딸인 왕비의 말을 빌어 자기 세력의 활동을 정당화하고 관인들의 활동을 조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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