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1) 세도정치의 성립
  • (2) 왕권의 약화와 붕당의 퇴조

(2) 왕권의 약화와 붕당의 퇴조

 권세가의 권력 독점은 국왕권의 약화와 짝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매우 낮았던 것으로만 치부되어 온 세도정치 시기 국왕의 위상은 그리 쉽사리 재단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형식의 측면에서는 앞 시기 탕평정치하보다도 국왕의 절대적 위상이 한층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을 정도이다.

 그 예로 먼저 선대 국왕에 대한 世室의 의례를 들 수 있다.350)조선의 경우 태조의 신위 밑에 현 국왕의 4대 先王까지를 二昭二穆으로 宗廟 正殿에서 祭享하다가 代數가 다한 왕의 신위를 정전에서 永寧殿으로 옮기게 되어 있었으나, 공적이 큰 임금의 신위는 親盡하여도 위 원칙에 따르지 않고(不祧) 특별히 정전에 계속 제향하던 제도를 世室이라 한다. 16세기 선조 이전까지의 국왕들 중에는 재위 기간이 짧은 임금은 물론 태종·명종과 같이 긴 기간 동안 재위한 임금으로서도 제외된 이들이 있지만, 선조 이후 영조까지는 실제로 재위를 인정받았던 임금은 경종을 제외하고 모두 세실로 받들어졌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런 현상은 계속되어 왕으로서의 위상이 극도로 위축되었던 철종을 제외하면 정조·순조·헌종이 모두 세실로 받들어졌고, 대리청정을 하였을 뿐인 효명세자까지 고종대에 가서는 그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국왕의 공적에 대한 평가가 훨씬 너그러워지면서 그들을 존숭하는 정도가 점점 높아졌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세실로 정하여지는 시기의 면에서 더욱 확연하게 나타난다. 역대 국왕이 죽어 세실로 모셔지게 되는 것은 뒷 시기로 내려올수록 점점 빨라지는 추세를 보이나 숙종까지만 하여도 몇 대 뒤에 결정되었으며, 다음 왕인 정조 연간에 결정이 된 영조의 경우에도 사후 6년의 기간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정조의 경우 죽은 해에 바로 결정되었으며 순조의 경우에도 사망 다음 해인 헌종 원년에 결정되었다. 헌종의 경우에는 철종 10년(1859)에 이루어져 늦은 감이 있으나 특별한 공적으로 들 만한 것이 없고 재위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18세기까지의 경우에 비해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351)역대 임금들이 世室로 받들어진 시기는 ≪增補文獻備考≫권 40, 帝系考 1 참고.

 국가 전례상의 존숭과 더불어 임금에 대한 매우 높은 평가가 일반화되었다. 앞 시기 영조가 신하들로부터 요와 순에 비견된다는 의미의 堯明舜哲이라는 존호를 받아낸 것은 강요하다시피 했던 어려운 일이었으나352)李泰鎭,≪奎章閣小史≫(서울大 圖書館, 1990), 20쪽. 19세기에는 君王을 동양 전래의 이상적인 인물에 직접 비겨 높이는 일이 빈번해졌다. 순조 즉위년 11월에 李秉模는 정조의 치적을 일컬어 “요순과 짝하며 三代만큼 탁월하다”고 하였다. 조만영은 헌종 즉위년에 순조를 세실로 모시자고 하면서 그를 추키기를, “堯舜의 道心에 접하였고 曾參과 閔子蹇의 효를 갖추었으며 禹王·文王·湯王의 미덕을 겸하였다”고 하였다. 철종 10년에 헌종의 世室禮를 건의한 金汶根도 헌종을 요와 순에 직접 비견하였다. 숙종 9년(1683)에 효종의 세실례를 요청한 송시열과 인조의 세실례를 건의한 金德遠이 올린 상소의 경우, 효종의 ‘北伐大義’와 인조의 反正을 지적할 뿐 그러한 높임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에 비교해 보더라도 임금에 대한 존숭이 매우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 시기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데에도 국왕의 권위는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물론 19세기의 권력자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명분과 세력을 누려 온 가문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힘과 권위만으로 그만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조순·조인영 등은 물론, 그 후손들까지도 그들이 국왕의 인척이거나 그 유촉을 받았다는 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慶州 金氏 金觀柱 가문 중심의 벽파세력이 정조 후반의 열세에서 벗어나 순조 초년에 그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영조의 왕비를 배출한 이후로 적지 않은 세력을 모아 온 것도 사실이지만,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대왕대비의 지위가 가장 직접적인 바탕이 되었다. 대왕대비가 가졌던 권위의 성격은 왕권과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실제 세력의 측면에서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는 왕권이 강력한 힘을 행사하곤 하였다. 즉위 직후의 어린 순조가 한동안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왕의 권한이 곧바로 권세가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모든 정치행위의 중심은 수렴청정하는 정순왕후에게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스스로 女主·女君을 칭하였으며, 신하들도 그녀에 대해서 北面이라는 표현을 쓴 데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수렴청정기에 그녀는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53)金用淑,≪朝鮮朝 宮中風俗 硏究≫(一志社, 1987), 359쪽. 그러한 권위와 힘은 개인적인 정치력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당시 정치 구조상에서의 위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정순왕후의 경우 중앙정국을 그토록 강력히 주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수렴청정을 철회하자 그 세력은 미약해져서, 국가의 대사에는 계속 참여하겠다고 撤簾할 때 천명한 내용까지도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순조도 때때로 정치운영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 조정 관인들 간의 정쟁에서 순조 4년(1804)부터 6년까지의 僻派 축출이 가장 급격한 변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고비였던 權裕에 대한 공격과 축출에 순조의 개인적인 의지가 강력히 작용하였다. 또 순조가 친정하면서 시작된 벽파세력 축출에 제동을 걸려 하던 洪在敏의 상소에 대해서도, 그가 명분상 대왕대비에게 의지함으로써 처리하기가 매우 미묘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반대를 끌어내어 그 주장을 무력화하였다. 그는 벽파세력의 의리를 재천명하여 정치적 수세에서 벗어나려 한 金達淳의 주장이 나오고 그것에 동조하는 건의가 올라오는 상황 속에서, 徐邁修 등 대신들의 의견을 꺾고 벽파에 대한 신하들의 반대를 도출해 냄으로써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는 재위 8년경부터 국정을 주도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이고 다방면으로 기울였다. 헌종의 경우에도 성과는 거의 거두지 못하였으나 정국 주도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실천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와 같은 명분이나 형식상의 높은 위상이 실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계속되어 온 군주체제의 관성에 의하여 시행되었던 세실례 등의 전례가 국왕의 실제 권력을 보장해주는 것일 수는 없었다. 선왕을 세실로 모시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추진하는 인물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이용되는 하나의 관례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당시의 정치 행위는 선왕의 권위에 많이 의지하였으며, 또 끊임없이 그것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김조순의 위치와 권한은 상당한 부분이 선왕 정조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었으며,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선왕의 대우를 강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안으로 삼았다. 벽파세력의 정치행위 역시 선왕의 권위를 크게 이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순조 초년에 벽파세력이 時派세력을 축출할 때, 정조가 죽기 직전에 金履載를 처벌하면서 내린 하교(五晦筵敎)에서 벽파의 정당성을 인정했다고 끊임없이 강조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적을 축출하는 경우에도 많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헌종 6년(1840) 대왕대비가 李止淵·李紀淵 형제를 쫓아낼 때 그들이 익종의 죄인이었다고, 헌종 부왕의 권위를 끌어다 그 처벌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정치 현실에서 국왕의 권위는 관념적으로 상당히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선왕에 대한 것으로서, 화석화된 선왕의 강조가 재위중의 국왕에게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할 소지가 컸다. 그리하여 순조 32년에는 임금이 군신간의 의리(君臣之義)를 제쳐두고 스스로 신하와 ‘대대로 서로 친한 사람’(世好者)임을 자처하는 파격적인 경우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沈象奎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초기에 자신을 처벌했던 것에 불만을 표시하며 사직할 때 순조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까지 하였다.

 구체적인 정치 운영 전반에서 국왕이 그 관념상의 지위에 상응하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음은 순조나 헌종의 국정 주도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데서 뚜렷이 드러나는 바이다. 먼저 정치세력으로서 실세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력의 장악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정조의 경우 그러한 노력이 건실한 규모와 체제를 갖춘 壯勇營의 설치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순조 초년 벽파가 집권함으로써 장용영은 일시에 혁파되었고, 자신의 친위 군병을 강화하려는 순조의 노력은 김조순 가문 인물의 반대에 부딪혀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헌종 12년(1846)에도 국왕이 비공식적으로 설치한 궁중안의 부대(內營)가 문제되었는데, 그 곳의 구성원들은 정규부대 출신도 아닌 ‘민간의 의지할 곳 없는 자들’에 불과했다. 특히 “전 해의 역모사건을 겪은 후로 혁파하기가 주저된다”는 헌종의 발언은 국왕이 정규군을 믿지 못하고 신하들의 역모에 대비하여 자신의 사적 군사력을 어렵게 마련해야 했던 상황을 토로한 것이다. 헌종은 이후 摠戎廳을 摠衛營으로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철종이 즉위한 후 즉시 폐지되고 말았다.

 관념상 왕실의 고유한 행사라고 할 수 있는 국왕, 왕자의 혼사가 신하들에 의해서 좌우되었음은 널리 지적된 바이다. 어느 때라도 왕실의 결혼은 정치적 역학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순조의 결혼까지만 하여도 부단한 벽파세력의 반대 공작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남긴 뜻이 관철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국정 주도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뒤 효명세자의 결혼이, 순조가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없는 조득영 가문과 이루어진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득영이 맺고 있던 김조순 가문과의 굳건한 협력관계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354)趙得永은 벽파세력의 축출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종경세력을 견제하여 김조순 가문의 ‘세도권력’ 장악에 큰 공을 세운 바 있다. 효명세자의 결혼은 박종경이 죽고 조득영이 유배에서 풀린 뒤 5개월만에 이루어졌다. 순조는 조득영의 처벌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풀어주는 데도 강하게 반대하였다. 헌종·철종의 결혼은 당시 수렴청정하고 있던 대왕대비가 결정하였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김조순 가문의 이해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헌종 연간 조만영 가문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 金在淸의 딸이 후궁 慶嬪으로 들어온 것도 신하들의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이 순조·헌종·철종대의 세도정치는 국왕권의 약화라는 현상을 중요한 요소로 하여 성립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조선 중기 이후 지배계층 내 정치적 대립의 기본적인 범주였던 朋黨의 퇴조를 중요한 요소로 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권력을 쥔 집단이 서인, 좁게는 노론에서 나왔으므로 노론의 정치적 입장이 많이 강조된 것은 사실이다. 노론세력의 가장 중요한 명분인 辛壬義理가 기회있을 때마다 거듭 천명되었으며 앞 시기 노론의 핵심 인물에 대한 褒獎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때는 그가 신하들을 앞질러 노론 의리를 강조하는 것이, 집권세력의 당파적 입장에 대하여 기선을 제압함으로써 그들을 견제하는 정책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 소론이나 남인으로 활동하다 처벌받은 주요 인물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과거 합격을 취소하는 등 관직으로의 진출 자체를 막는 일이 많이 있었다.355)일례를 들어 순조 31년 趙泰億의 후손과 金益淳의 종제가 감시 초시에서 삭제되었다. 순조 12년에 李眞儒의 동생인 李眞儉의 현손 李鐸遠이 사헌부의 관직후보자(臺望)에 올랐다가 柳鼎養 등의 탄핵을 받고 결국 현달하지 못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노론·소론의 당파적 대립은 헌종 9년과 철종 5년(1854)에 조정으로 확대된 바 있다. 헌종 9년 11월, 徐箕淳이 지방 과거의 시제로 윤휴가 송시열을 비난한 문구를 내고 金麟厚 문집의 간행을 방해했다 하여 화양동서원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이 그를 격렬히 공격하고 노론의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 때에도 붕당간의 명분 대립이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고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서기순이 비록 소론의 당색을 띠고 있었지만 당시 집권자들은 그의 행위가 소론의 당파적 행동이라는 비난을 하지 않았다. 헌종의 서기순 두둔에 대하여 좌의정 權敦仁도 찬성하였고, 서기순은 유생들의 공격에 의해 한때 유배당했지만 곧 풀려났으며 얼마 안 있어 그 딸이 헌종 계비 간택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였다. 서기순을 둘러싼 당파적 논란이 중앙정국의 차원에서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았던 것이다.

 철종 5년(1854)에 일어난 노·소론간의 분란은 비교적 규모가 컸다. 경상감사 曺錫雨가 그 고조부 曺夏望의 문집을 간행하려 했는데, 그 내용 중에 효종과 송시열의 명분을 모욕한 부분이 있다는 여론이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지방과 성균관의 유생들에 의하여 제기되었고 三司를 중심으로 한 중앙 관인들까지 분란에 참여하여 조하망과 조석우를 극렬하게 공격하였다. 나아가 소론 출신 원임대신 鄭元容도 조석우 등을 배격하는 데 소극적으로 처신했다하여 不敍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 때에도 중앙 관직자들은 논란에 적극 가담하기보다 그것을 가라앉히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예를 들어 노론세력의 움직임에 대하여 소론인 徐念淳 등이 유생들을 무마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내, 일을 진정시키려 하였던 것은 과거 노론·소론 사이의 대립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처벌받은 정원용에 대해서도 석달만에 서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철종 5년 12월에 유배된 조석우는 다음해 6월에 한때나마 풀려나는 등, 중앙 정부의 처벌은 그리 절실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후 철종 9년 10월에 원자가 탄생하였을 때 곧바로 조하망을 복작하고, 조석우도 철종 13년에 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까지 오르는 것을 보더라도 이와 같은 붕당의 문제가 그 외형적인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국에 심각한 의미를 지니거나 별다른 여파를 끼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인의 활동이 또한 간헐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문제가 되었다. 남인이 순조 초년 벽파세력에 의해 도태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후 남인들의 활동은 대개 핵심 인물에 대한 처벌을 취소하고 그들을 높일 것을 건의함으로써 자기 세력의 존재를 인정받거나 정계 진출의 발판을 삼으려 하는 것이었다. 순조 연간에는 정조대 남인의 종장이었던 蔡濟恭의 伸冤運動이 계속되는 중, 때때로 그들의 정치논리가 함께 개진되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지극히 비판적인 인식 위에서 병농일치에 기반을 둔 오위제도의 복구를 주장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결국 임금의 마음가짐으로 귀결시킨 순조 22년(1822) 9월 鄭元善의 상소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전통적인 남인들의 논리를 거듭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순조가 국정을 주도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인 순조 8년의 柳遠鳴이나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의 睦台錫과 같이, 집권세력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을 때면 국왕의 권한을 강력히 세워 국정을 운영할 것을 강조하곤 하였다.

 그 밖에 철종 6년 3월에는 호군 柳致明이 상소하여 사도세자에 대한 합당한 전례를 올릴 것을 주장하였다가 유배당한 후, 곧 이어 영남 유생 李彙炳 등이 사도세자를 군왕으로 추숭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남인들의 활동이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노론·소론에 비하여 서인·남인의 이념적인 차이가 더 컸기 때문에 이 때에도 남인들은 집권세력에 비판적 의미를 지닌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임금에게 피력하곤 하였으나, 국왕 중심의 정치질서를 재정립하고자 한 영조나 정조의 노력에도 꺾이지 않았던 노론 핵심 가문 출신 외척의 권력 독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당시의 집권세력은 비변사 중심의 국정 운영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자신들 나름대로의 정치질서까지 정립시킨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철종대에 사도세자 추숭을 주장했던 것은 정조대 남인의 논리를 답습한 것이었지만, 정조대와 달리 그것은 이미 정국운영의 핵심적인 문제일 수가 없었다. 사도세자 추숭은 이 때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유치명이 11월에 放送되고 12월에 직첩을 환수받은 사실에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그 사건 역시 정국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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