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2) 세도정치의 성격
  • (1) 정치 참여층

(1) 정치 참여층

 세도정치에서의 권력 집중은 여러 사회세력들을 중앙 정치로부터 크게 소외시킨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356)세도정치기 중앙 정치세력의 구성과 성격에 대한 연구는 남지대,<중앙정치세력의 형성구조>·<중앙정치세력의 성격>(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앞의 책), 129∼198쪽 참조. 그러한 상황은 文科의 운영 및 그것을 통하여 중앙 정치로 진출한 文臣들을 계량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잘 나타나 있다. 19세기 전반의 문과는 운영상의 여러 폐단에도 불구하고 급제자의 규모가 거의 커지지 않았으며 급제자의 평균 연령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이 형식적인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정치가가 문과에 급제한 때와 중앙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때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그 시기를 올려 잡아 정조대부터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 때부터 철종대에 이르기까지 ≪國朝文科榜目≫을 통해 파악되는 문과급제자의 총수는 2,755명이었다. 급제자들의 거주지를 볼 때 式年試의 경우는 평안도가 26.2%, 경상도가 22.2%, 서울이 18.9%, 충청도가 10.3%의 비율로 나타나지만, 別試의 경우는 서울이 53.1%, 경기도가 12.9%, 경상도가 8.6%, 충청도가 8%로서 서울 일원에 대한 집중도가 매우 높았다. 또한 식년시의 경우라 하더라도 서울 출신들은 상위인 갑과와 을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한 추세는 都堂錄의 운영에도 그대로 나타났다.357)都堂錄이란 弘文館에서 자체적으로 작성한 弘文錄을 바탕으로 고위관직자들이 참가하는 의정부의 會圈을 거쳐 이루어진 홍문관원의 후보자 명단이다. 도당록은 19세기 전반까지는 문과급제자를 대상으로 당상관이 될 일차적인 후보집단을 걸러내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조 4년∼철종 연간의 문과급제자 중 도당록에 든 인물들은 모두 871명으로서 그 중 52.8%인 460명이 당상관이 되었던 것에 비해, 도당록에 들지 못한 1,884명의 급제자 중에서는 7.3%인 137명만이 당상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당록에 든 인물들의 거주지를 볼 때 서울이 75.8%, 경기도가 8.8%, 경상도가 6.8% 순이어서, 서울 일원에 84.7%가 집중되어 있었다. 도당록에 들어 중앙 정치 무대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문과급제자의 3/4은 문과 응시 당시에 이미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황해·평안·함경도 지역의 거주자로서 문과에 급제한 인물은 도당록에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근거지를 서울에 둔 세력과 지방에 둔 세력 사이에 분화가 뚜렷하게 진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철종 연간의 문과급제자 수에 대해 도당록 입록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지역별로 따져보면, 서울이 65.9%, 경기도가 27.6%로서 17.4%의 충청도나 15.4%의 경상도에 비교해 확연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강원도의 경우는 30.8%로서 비교적 높은 비율을 보이지만, 급제자수가 65명의 소수에 그쳤기 때문에 그 비율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시기 서울 출신 문과급제자 1,042명 중에 당상관에 올랐음이 확인되는 인물은 505명으로서 당상관 승진 비율이 48.5%였음에 비해, 경기도를 포함한 지방 거주 급제자 1,706명 중에 92명이 당상관에 올랐음이 확인되어 그 비율은 5.4%에 불과했다. 서울 출신 급제자의 당상관 승진 비율이 지방보다 9배나 되었던 것이다.

 고위 관직자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지역적으로 서울에 집중되었던 것과 짝하여, 소수의 유력한 가문에 집중되는 현상이 강하게 드러났다. 정조∼철종대에는 全州 李氏·安東 金氏를 비롯한 15개의 성관 출신들이 문과급제자의 31.9%를, 도당록 입록자의 53%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358)유력한 성관의 기준은 정조∼철종대 문과 급제자의 1% 이상, 도당록 입록자의 1% 이상을 배출하는 동시에, 그 성관 문과급제자 중에서 도당록에 뽑히는 비율이 전체 평균(33.3%)을 넘는 것으로 하였다. 그것에 해당하는 성관은 全州 李, 延安 李, 韓山 李, 慶州 李, 安東 金, 潘南 朴, 豊壤 趙, 南陽 洪, 豊山 洪, 大邱 徐, 靑松 沈, 坡平 尹, 海平 尹, 東萊 鄭, 平山 申氏들이다(남지대, 앞의 글, 171쪽). 특히 그들의 거주지는 서울에 집중되어, 문과급제자와 도당록 入錄者들의 압도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던 서울 지역 거주자들 중에서 이들 성관의 인물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문과급제자의 54.6%, 도당록 입록자의 60.8%에 달하였다. 또한 이들 성관이며 서울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전체 수에 대해 도당록에 오르는 수의 비율도 71.1%라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또한 그들의 문반 당상관 전체에 대한 비율은 51.8%, 가장 유력한 관서인 비변사 당상 전체에 대한 비율은 63.8%로서 역시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상의 수치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서울에 사는 유력한 가문 출신이라는 조건이 중앙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매우 유리한 요소가 되었던 동시에, 특정세력에 대한 정치 권력의 집중을 구조화시켰다. 조선의 정치제도가 오래 유지되어 오는 동안, 그 중심부를 장악한 중앙 정치 집단은 그것에 익숙함을 바탕으로 자기의 정치적 재생산을 구조적으로 이루어 내면서 각각 자기 가문의 기반을 넓히고 굳혀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 후기에 토지 소유를 근거로 한 전통적인 양반 지주 사회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사회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부의 원천이 생겨남에 따라 지역적으로 서울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세도정치기 정치 권력 담당자의 집중 현상은 그 시기의 당상관들을 분석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졌다.359)세도정치기 중앙 정치집단의 구성과 성격에 대해서는 홍순민,<정치집단의 구성>·<정치집단의 성격>(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앞의 책), 199∼256쪽 참고. 순조∼철종대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들이 정2품 이상의 고위직으로 집중되었다. 관서로 볼 때 권력 집중의 중심은 비변사였다. 그 구성원은 都提調, 경제관계 堂上, 운영당상, 例兼堂上, 軍門大將의 다섯 부류였는데, 이 중에서 정치적 의미가 별로 없는 단순한 예겸당상과 무반 군문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약 300명 정도가 권력을 장악한 정치 집단의 실질적 구성원이었다. 그러한 정치 집단의 구성 요인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갖게 된 것은 혈연이었다. 실록에 등장하는 문신 당상관 737명 중에서 출신 가계가 확인되는 675명을 검토한 결과, 그들의 성관 전체는 56개였으나 그 중 安東 金, 大邱 徐, 豊壤 趙, 延安 李, 豊山 洪, 潘南 朴氏의 6개 성관이 당상관의 29.9%, 비변사 당상의 40%, 중신(종1품, 정2품) 및 운영당상의 47%를 차지하였다. 그 안에서도 점유율에 심한 편차가 있었고 정치 집단의 핵심부로 갈수록 집중의 정도가 가장 심했다. 구체적으로는 안동 김씨의 점유율이 가장 높았는데, 그 중에서도 金尙憲의 후손 및 金尙容의 후손들 두 가문이 두드러져서, 56명의 안동 김씨 당상관 중에서 김상헌계가 38명, 김상용계가 18명을 배출하였고 비변사당상은 전체 37명 중에서 각각 29명과 8명을 배출하였다. 이렇게 하나의 성관 내에서도 특정 소수 가문에 고위 관직자가 집중된 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위의 다른 성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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