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2) 세도정치의 성격
  • (2) 권력의 주체

(2) 권력의 주체

 세도정치기에는 정치권력 담당자들의 사회적 기반이 전체적으로 축소되고 중앙 정치 권력이 특정한 소수 가문에 집중되는 사정을 배경으로 극소수의 권세가들이 국왕을 능가하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러한 권세가들은 한 시기의 世道를 책임진다는 명분으로 합리화되었다. 원래 붕당정치하에서 산림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던 세도를 정조는 탕평정책을 추진하면서 자신이 장악하려 하였다. 그 후 19세기 초반까지만 하여도 외척 인물이 아닌 인물들 중에도 세도를 자임하는 자가 나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순조 초년 徐瀅修에 대한 공격에서 그가 세도를 주장했다는 평이 나오고 있었으며, 金履翼이 세도를 주장하려 했으나 남들이 밀어주지 않아서 불평이 많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김조순 등 국왕의 선택을 받은 척신들의 독점 권력이 오랜 기간 계속된 결과, 산림이 외척 권세가의 보조자로 격하되는 등 여타의 인물들이 세도를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360)산림의 격하에 대해서는 유봉학,<18, 9세기 老論學界와 山林>(≪한신대논문집≫3, 1986), 40∼42쪽 참조.

 19세기 전반 권력가들의 정권 장악과 유지에 공식적으로 가장 큰 기반이 되었던 것은 국왕 또는 왕실의 권위였다. 물론 그들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온 거대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러한 가문적 바탕을 지닌 많은 가문 중에서 몇 개의 특정한 가문들만이, 혹은 가장 유력한 가문이라 하더라도 특히 이 시기에 와서 전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권력의 독점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은 역시 그들이 국왕, 왕실의 권위를 바탕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순조 초년 김조순의 이념적 기반이나 군사적 기반까지도 무력화시킨 상황에서 벽파세력, 특히 대왕대비의 專擅으로도 김조순을 끝내 도태시키지 못했던 까닭은 대왕대비가 매양 강조하는 대로 그에 대한 정조의 유촉 때문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왕 정조의 뜻을 정면으로 어긴다는 것은 중세적인 권위를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대왕대비 스스로의 기반을 허무는 일이 되리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은 당시 대왕대비를 축으로 하여 권력을 휘두르던 벽파세력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조인영과 그 가문이 헌종 연간에 김조순 가문을 강력히 견제하면서 커다란 권력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 역시, 순조가 정조의 선례를 따라 그 가문에서 중심인물을 골라 헌종을 補導할 책임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왕실 외척 권력가들은 국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접할 수 있는 특별한 신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순조 연간 이후로는 임금이나 왕실의 고위 인물들이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약원제조 등 외에 왕실의 가까운 인척들이 ‘別入直’이라는 명목으로 궁궐에 들어가 대기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국왕에게 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권세가의 권력 독점에 힘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관인에게 공평히 군림해야 할 임금의 위상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또 왕실의 전례를 주도함으로서 권력 장악에 대한 이념적 기반을 튼튼히 하려 했다. 순조의 世室禮는 헌종의 외조부인 조만영이 건의하여 실시하였고 헌종에 대해서는 그의 국구인 김문근이 발론하여 시행하였다. 이러한 정치 행위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세실로 모셔지는 국왕의 권위라기보다는 국가 최고의 전례에 대한 추진 주체의 중요성이었을 것이다. 김조순은 領敦寧府使로서 순조 21년(1821) 3월 정조의 묘인 健陵의 이장을 공식적으로 처음 발론한 뒤 줄곧 그 사업을 주도하였고 순조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혜경궁과 효명세자가 죽었을 때 지문을 쓰기도 하였는데 국왕의 지문을 외척 권세가가 쓰는 경우도 전대에는 별로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조선 후기의 정치를 주도해 온 가문들로부터 배출된 인물들이란 점에서 세도정치기 권력가들은 서인 우위의 정치가 계속된 인조반정 이후 17세기부터 계속되어 온 정치 상황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고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중세적 정치 체제의 전통적 권위 위에 서 있었던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바탕에서 이 시기 권력집단의 동질성이 설명될 수 있다. 지금까지 주로 안동 김씨 가문과 풍양 조씨 가문 간의 권력 교체를 중심으로 정국의 운영을 설명하여 왔으나, 당대 핵심 가문 사이의 차이나 대립에 앞서 동질성에 더 유의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순조 초년 벽파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김조순·박종경·조득영으로 대표되는 그들 가문 사이에 긴밀한 협력 관계가 맺어졌거니와, 효명세자 대리청정 때 새로운 세력의 결집과 김조순 세력 견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조만영이 세자 사후의 정치적 반전에서 별 문제없이 지위를 보전할 수가 있었던 것도 그들 사이의 동질성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조만영은 순조 33년 4월에 김조순을 정조의 묘정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여 실현시켰고, 새로 건립된 김조순 사당에 사액이 이루어진 후 약 반년만인 순조 34년 4월에는 김조순 계열의 관료인 심상규의 건의에 의하여 조득영에게 시호가 내려졌다.

 또 순조나 효명세자는 정국 주도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였지만 그 경우에도 외척 세도가들과의 노골적인 대립관계를 조성하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현실 역학 관계상으로도 가능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세자는 대리청정기에 김조순 가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순조 27년 執義 趙璟鎭이 김유근의 처신을 공격했을 때는 본심이야 어쨌든 김유근을 간곡히 두둔하고 조경진에게 조정을 시험하려 했다(嘗試)는 죄를 들어 파직하였던 것이다.361)단, 헌종·철종의 경우에는 특정 가문과의 연합을 논할 만한 입지 자체를 갖추지 못하였다고 판단된다.

 물론 외척 가문들 사이의 연합성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져 그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그 때의 대립이 특별한 논리적 기반이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순조 11년 평안도 농민전쟁 이후 나타난 박준원 가문과 김조순 가문의 경쟁관계나, 헌종 7년(1841) 이후 격화된 김조순 가문과 조만영 가문간의 대립 역시 개인적인 권한 남용과 탐학 등을 빌미로 공방전이 벌어진 것이었지 정치적 입지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헌종·철종 연간에는 김조순 가문과 조만영 가문의 핵심인사 한두 사람을 둘러싸고 극렬한 대립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양 가문의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철종 초년에 조병현은 權奸이라는 공격을 받고 사사당하기까지 하였으나, 약 3년 후인 철종 3년(1851) 8월에는 그 아버지 조득영이 순조의 배향신이라는 명분 아래 죄명을 자세히 아뢰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양사의 반대를 통한 얼마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다음 해 10월에 시행되었다. 일단 힘의 우위를 확보한 후에 반대세력의 죄명을 씻어 주었던 것은 그들이 동일한 정치 기반 위에 서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현상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지배계층 내부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신하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국왕권을 이용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왕실 외척의 정치적 역할이 커졌으며, 나아가 유력자가 외척으로서의 신분을 얻으려 노력하게 된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훈신이 영향력을 늘리지 못하고 18세기 후반 이후로 녹훈조차 없었던 데 비하여 조선 후기의 유력 가문은 척신으로서 권력을 집중시켜 나갔다.362)임금의 인척으로 內戚이 있으나 그들에게는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척의 권력집중은 곧바로 왕통의 동요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정치운영에서 그들을 배제하는 것은 19세기까지도 잠재적인 동의를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에서의 내척 배제는 조선 왕조체제의 틀이 계속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척 권세가의 권력이 임금의 공식적인 동의를 바탕으로 국왕의 권위를 이용하고 있었던 점은, 이른바 ‘세도정치’가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에서 적어도 형식적인 정당성은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김조순에 의해서 시작된 세도정치가 비록 지배계층의 일부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집권세력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것도 주목하여야 할 사실이다. 金澤榮은 세도정치기 전반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김조순이 사대부의 지지를 크게 잃은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363)金澤榮,≪韓史綮≫권 5, 순조 29년. 黃玹까지도 ≪梅泉野錄≫에서 김조순의 능력과 품성을 평가하였고 외척이 망국을 초래하게 된 책임을 그 자손에게 돌렸다.

 조선 후기 유력가문의 세력이 실질적으로는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었으나, 자신이 성장해 온 체제 자체를 뛰어넘을 성격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시대의 변화에 전진적인 세력이 될 수는 없었다. 국권을 농단하였던 주요 권세가들이 국왕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왕조의 지배계층 내부에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거나 체제 자체를 변혁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 어려웠다. 국왕이 외형적으로 점점 높이 평가되었던 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오랜 시간 계속되어 온 당시 체제가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세기 외척 가문의 전권을 당시의 관념에 비추어 볼 때 파행적인 것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으며, 조선왕조 지배체제가 밟아 온 변화의 귀결로서 차분히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이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키고 국력의 고갈을 가져왔다면, 그것 역시 조선 후기 사회 정치적 변화의 귀결로서, 역사적 생명을 다한 체제의 말기적 현상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체제 동요의 근저에 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세력의 성장이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위와 같은 왕실 외척 권세가의 권력 장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왕권 쇠퇴의 의미를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영조와 정조가 실시하였던 탕평책은 신하들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표면적으로나마 진정시킴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이룩하는 데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으나, 국왕권의 새로운 전형을 수립한다는 목적은 달성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조선 중기 이후로는 국왕에 대한 사족의 강력한 제한이 체제화되었던 데다가, 지배세력의 당파적 결집과 주도 가문의 성장은 국왕의 전통적 권위와 능력으로 제어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왕은 혼인관계에 있는 가문의 힘을 빌린다는 전통적인 방식을 재사용하게 되었다. 특히 정조가 말년에 세자를 당대 제일의 명문가 출신인 김조순에게 맡긴 것은 국왕의 보호를 자임하던 노론세력의 집권이 계속된 결과 빚어진 것이었지만, 이 때에 와서는 국왕이 신하에게 장래 임금의 장인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전 시기와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신하들의 세력다툼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서 그들을 조정해 나갈 자신을 잃고 유력한 인물의 힘에 의지하여 권위를 보전하여야만 했던 18세기 후반 군주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나아가 순조가 김조순 가문의 권력 장악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헌종의 보도를 그 외조부 조만영의 동생인 조인영에게 맡긴 것은 외척의 강력한 정치적 역할을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는 결국 효명세자·헌종·철종의 경우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거의 전적으로 관인들의 역학관계에 따라 국왕의 결혼이 결정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국왕의 결혼관계에 나타나는 왕권의 변화가 위와 같다면 국가 운영에 대한 국왕의 노력도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영조·정조대의 강력한 왕권강화 정책은 순조 8년(1808) 이후 국왕의 정국주도 노력, 익종 대리청정기의 새로운 권력 집단을 결집하려는 노력, 헌종 11년(1845) 이후의 정국주도 노력으로 면면히 이어지면서도 점점 약화되어 철종대에 이르면 국왕의 독자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는 단계적 변화를 보인다. 여기에는 여러 우연적인 요소도 작용하고 있었으나, 그 본질은 왕권을 정점으로 짜여져 있던 중세적 정치체제가 그 자체가 지닌 모순의 격화로 점차 무너져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순조가 벽파세력 축출에 큰 역할을 한 것은 그들이 金觀柱 가문을 중심으로 일당전제적 체제를 선택한 것에 대한 반대였지만, 그러한 순조의 행위는 결국 외척 핵심 인물에게 국가 권력이 집중되고 순조 자신을 비롯한 후대 국왕의 약화를 빚어내는 데 하나의 과정을 이루고 말았다. 순조는 단순히 어린 나이로 인해 권력가들의 꼭두각시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고, 주어진 조건속에서 국왕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였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더 이상 전통적인 국왕의 권위를 유지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점은 뛰어난 학문적·정치적 능력으로 정력적으로 탕평책을 추진했던 정조도 끝내 국왕의 전제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관련되는 것이다.

 고대국가 이후 국왕은 지배체제의 정점에 자리잡은 존재였으며, 시기에 따라서 그 권한에 많은 제약이 가해지기도 하였으나 개인적 권한을 볼 때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정치권력 향방의 측면에서 19세기의 정치는 왕권의 약화 내지 붕괴로 특징지워지게 되었다. 이것은 어린 나이의 국왕이 즉위한 데 따른 우연적인 것도 아니며 왕조의 교체기나 정변기에 때때로 나타났던 바와 같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왕조체제의 해체라는 상부구조상의 근본적인 변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17세기 이후로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범주로 작용하였던 붕당도 이 시기에 와서는 국가 권력의 추이를 설명하는 데 그 의미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앞 시기 정국을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고려될 정도로 중요했던 노론과 소론의 의미가 크게 축소되었던 것에 대하여, 먼저 이 시기에 그 대립의 쟁점이 이미 해소되어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숙종 연간에 훈척의 정치 행태에 대한 선배와 후배 관인 사이의 견해 차이에서 출발한 노론과 소론간의 대립은, 경종대 辛壬獄事에서 영조 초년의 李麟佐의 반란에 이르는 격렬한 쟁투를 초래했는데 그 중심 쟁점은 경종과 영조의 왕통을 둘러싼 것이었다. 그리고 왕통을 둘러싼 대립이란 명분상 왕조체제의 극단까지 나아간 것이었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대립은 노론의 뚜렷한 승리로 귀결되었고, 그 뒤 정조·순조 연간을 거치는 동안에 경종과 영조의 왕통은 과거의 사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대립의 원래 초점이 해소되었다. 또한 왕통이라는 극단을 넘어서는 다른 쟁점이 쉽게 재생산될 수도 없었다. 이 시기에 와서 붕당간의 논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앞 시기 대립의 여진에 의한 것이었을 뿐 중앙 정국에서는 실제적인 의미를 상실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집권세력과 남인들의 정치적 관계도 근본적으로 노론·소론의 관계와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는 상대적으로 남인 실학자들이 개혁적 성격을 크게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순조 초년 노론, 특히 벽파세력에 의한 남인 축출에 많은 관심과 의미를 두어 왔다. 그것이 조선의 자체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데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남인들의 사상적 입장이 대체로 국왕권에 전적으로 귀의하는 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세도정치하에서 결정적인 좌절을 한 듯하다는 견해가 타당할 듯하다.364)유봉학,<18세기 南人 분열과 畿湖南人 學統의 성립-≪東巢謾錄≫을 중심으로->(≪한신대논문집≫1, 1983). 더구나 중앙정계에서 남인들 전체를 묶는 동류의식은 이미 무너져 버렸다. 예를 들어 순조 초년 서학 탄압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남인 인물들이 같은 당색의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탄핵하였고, 그런 경향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순조 18년(1818)에 남인 睦台錫이 丁若鏞의 放送을 취소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집권세력이 노론으로서의 강한 결집력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자기 당파에 필적할 대항 세력없이 독주해 온 결과 노론 전체의 통일된 입장조차 없어졌거나, 있다 하더라도 그 시기의 구체적인 정치현실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집권세력이 노론의 명분을 계속 강조한 것은 가능한 한 정치 기반을 늘리려는 노력의 일환이었겠지만 그것이 절실한 필요에서 행하여진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더욱이 정조대 이후 시파와 벽파의 대결은 그 이전의 서인 내부의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 사이의 대립이 재편성되는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핵심 집권세력이 당색으로 볼 때 노론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정국운영의 기본 축이 이미 소론 및 남인과 경쟁하고 대립하던 노론이라는 붕당 범주로는 설명될 수 없게 되었다. 노론 내부에서 세력의 분기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고, 자기 세력의 유지를 위해서는 다른 당색의 인물을, 그것도 붕당의 논리가 아닌 다른 기준에서 수용하는 일이 많이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정치를 ‘노론 일당 전제’라고 부르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서인과 남인, 혹은 노론과 소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 후기 정치사를 설명하던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18세기 후반 이후 19세기의 정치사를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라는 틀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시파와 벽파 사이의 대립은 정조대 후반에 격화되어 순조 초년에 대대적인 대결을 벌인 끝에 순조 7년 李敬臣의 옥사에서 시파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순조 12년 이래 金聖吉이 조부 金漢祿의 신원을 요구하는 격쟁을 몇 차례 감행하였고, 효명세자 대리청정기 愼宜學처럼 벽파 인물로 처벌받은 李書九를 두둔하고 그들 세력의 논리를 강조하는 인물이 간간이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움직임은 조정 관인들의 일방적인 반격을 받고 무위로 그쳤을 뿐 현실적인 역학관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세력싸움에서 시파가 승리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파와 벽파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처분의 정당성이나 사도세자와 정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대립하였다. 그러나 그들 세력이 왕조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없었던 상태에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마저 죽고 왕통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순조가 즉위하자 그들의 명분은 더 이상 현실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파든 벽파든 이념적으로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승리를 거두어 견제 혹은 경쟁하는 세력이 조정에 없어짐에 따라, 시파라는 범주가 기득권 수호의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하나의 붕당으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도 없었다.

 위와 같이 19세기 전반기에는 원론적으로 노론의 입장이 강조되고 때때로 집권세력에 맞선 소론·남인·벽파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과거 붕당의 활동에 대비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세도가문과의 협력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많은 인물들이 기존의 당색 관념으로는 소론 또는 남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정승까지 승진하여 정국을 이끌던 인물 중에도 李相璜·朴宗薰·鄭元容 등 소론 출신이 많이 있었다. 이 시기의 노론·소론·남인 인물의 활동은 각 당파의 병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세력이 결집하는 범주로서의 붕당이 해소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철종대에 들어가서 앞 시기 남인 및 북인 핵심 인물들의 죄목들을 크게 풀어주는 것 역시 붕당의 의미가 해소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왕조체제에서 성장한 붕당이 그 체제에서 가장 깊은 문제인 왕통을 둘러싸고 극단적인 대립을 벌이고 권력의 집중을 초래한 결과, 승패가 명백해지고 쟁점의 재생산이 멈춰지면서 정치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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