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3) 세도정치의 운영 구조
  • (1) 비변사

(1) 비변사

 정치구조의 측면에서 세도정치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비변사이다.366)이하 비변사의 조직 및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는 모두 오종록,<비변사의 조직과 직임>·<비변사의 정치적 기능>(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앞의 책), 491∼574쪽 참조. 16세기에 임시기구로 설치된 비변사는 그 직임이 늘어나고 정치적 기능이 덧붙여져 19세기 전반기에는 명실상부한 국가의 최고 관부가 되어 있었다. 비변사는 군사, 국가재정, 주요 관직의 인사, 지방 행정 등에 대해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청으로부터 보고되는 사안에 대해 논의하여 처리 방침을 결정하고 그것을 국왕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방침이 결정된 각종 사안은 다시 행정 실무 기관인 각급 관청에 내려져 시행되었다. 따라서 비변사를 장악한 정치세력은 사실상 통치 실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비변사는 전직·현직 議政이 맡는 都提調, 例兼과 專任職으로 구별되는 提調와 副提調, 그리고 郞廳 및 吏胥로 구성되어 있었다. 최상층을 이루는 도제조는 전직·현직 議政 모두가 임명되는 직책으로서 비변사를 대표하였다. 그러나 전직 의정들은 능동적으로 국정에 참여하기보다는 필요한 경우에만 국정을 자문받는 위치에 있었고, 실제로 도제조로서 직임을 수행하는 것은 현직 의정들이었다. 현직 의정의 도제조 중에서도 임금을 대하는 次對 席上에서 비변사를 대표하는 것은 대개 한 사람이 맡았다.

 도제조와 함께 비변사 회의와 차대 등에 참석할 자격을 갖는 비변사의 제조와 부제조를 통칭하여 비변사 당상이라고 하였다. 그 수는 17세기에는 20명으로도 너무 많다고 지적되었지만 18세기 중엽에는 30명에 이르렀다. 정조대에 20명 안쪽으로 줄었지만, 순조 연간에는 10∼30명의 규모로, 헌종대에는 20∼35명, 철종 연간에는 때로 50명을 넘기도 하였다. 예겸당상과 전임당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본래의 직책에 따라 자동적으로 비변사 당상을 맡는 예겸당상은 공조를 제외한 육조의 판서, 대제학, 四都 留守, 4군영대장 등 모두 14개의 자리로 구성되었다. 專任당상은 녹봉을 받으며 재직하는, 관직의 변화에 관계없이 장기적으로 비변사 당상으로 근무하는 직임으로서, 해당 인물의 능력이나 정치적 중요성에 의해 비변사 당상에 선임된 인물로 구성되었다. 전임당상에는 각기 특정한 도의 직무를 주관하는 八道句管堂上, 비변사의 전체적인 업무를 주관하는 有司堂上이 있었다. 이 밖에 貢市堂上·堤堰司堂上·舟橋司堂上들과, 특정한 소관 업무가 따로 없는 無任所堂上이 있었다.

 비변사는 도제조와 비변사 당상들이 참가하며 ‘籌議’ 또는 ‘籌謨’라고 불리던 회의를 통하여 해당 업무를 처리하였다. 예겸당상이 본래의 직책에 따라 참가할 자격을 받는다면, 전임 당상은 그 정치적 비중과 경륜에 의해 참가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지방 행정에 대한 전문적 지식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각 도별로 담당 당상을 두어 회의에 참여토록 한 것이나 공조판서를 제외한 모든 판서들이 회의 구성원이었다는 점에 나타나듯이 비변사 회의는 외형상 국가의 공적 이익을 위해 사안을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변사 회의는 원칙적으로 매일 열리게 되어 있었지만 이른 시기부터 간간이 열렸고 그나마 소수에 의해 주도되었다. 회의 형식은 ‘秘密公事’라 하여 비변사 관원 외에는 史官조차도 접근할 수 없었으며, 비변사당상이라도 집권세력에 속하지 않으면 회의에 참석하기가 매우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미묘한 사안이 처리되는 과정은 철저하게 감추어진 채 권력집단의 소수 인물들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변사에서 결정된 각종 사안에 대한 의견은 국왕과의 次對에서 현직 의정이 아뢰거나, 유사당상이 ‘司啓’의 형식으로 보고함으로써 처리되었다. 비변사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해 국왕이 개입하는 모습은 앞 시기에 비해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비변사는 점차 국왕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보이면서 국가 통치를 전담하다시피 하고, 그에 대하여 국왕에게 책임을 지는 기관이 되었다. 이러한 형식은 외형상 중요한 발전이었다고 해석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비변사의 운영을 실제로 장악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권력집단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행위가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공적 기구인 비변사를 통해 뜻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집단이 비변사를 장악하는 것은 인사권을 통해서였다. 먼저 비변사의 전임 당상들은 자체적으로 선임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비변사에서는 당상 상호간이나 도제조의 사이에 相避 규정을 적용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대의 권세가들이 비변사 당상의 최상석을 장기간 차지하고 그의 친인척들이 도제조와 전임 당상이 되어 정치력을 발휘함으로써, 혈연관계로 맺어진 권력집단이 중앙 정치를 좌우할 수 있었다. 예겸당상의 경우에도 그 본직의 대부분이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임명되는 자리였으므로 실질적으로 비변사에서 자체적으로 선발하는 셈이었다. 이러한 비변사의 인사 구조는 비변사가 국왕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게 된 바탕이었다. 아울러 어느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여 비변사의 주요 직임을 맡게 된 다음에는 정치적으로 몰락하지 않는 한 꾸준히 권력집단을 자체적으로 재생산해 갈 수 있는 장치였다. 특히 4都 留守·평안도와 함경도의 관찰사·義州 부윤과 같이 수도 주변이나 국경 지대의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맡는 관직자는 비변사 회의에서 논의하여 천거하게(議薦)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순조 초년을 넘기면서는 정상적인 의천이 행해지지 않고 도제조와 유사당상이 협의하여 후보자를 뽑았다. 이 과정을 통해 권력집단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비변사는 세도정치기에 조직과 기능면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실제 활동도 언관의 견제조차 허락하지 않는 독자적인 것이었다.367)이하 비변사 정치활동의 독자성과 당시의 言論에 대해서는 오수창,<권력집단과 정국운영>(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앞의 책), 604∼617쪽 참조. 예를 들어 순조 15년(1815) 趙直永이 掌令으로서 홍문록 선발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하자, 비변사가 다른 언관을 동원하는 일도 없이 직접 계를 올려 그의 언론활동을 비판하고 삭직시킨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대해 장령 沈厚鎭이 부당함을 상소하였으나 이조판서 金履陽의 교체가 허락되었을 뿐 조직영의 처벌은 취소되지 않았다. 이 때 공식적으로 비변사를 대표하던 영의정 金載瓚은 비변사의 언관 공격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강조하였다.

 나아가 비변사는 스스로 언론활동을 대신하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인 정치행위인 관인에 대한 탄핵을 언관을 젖히고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예를 들어 헌종 원년(1835) 6월 비변사에서는 진휼곡식을 낸 상인 林尙沃을 龜城府使에 의망한 것이 과하다 하여 이판 조인영을 추고할 것을 요청하였다. 조인영이 반발하자 좌의정 홍석주는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고 경계시키는 것이 비변사의 원래 직무라고 하였다. 나아가 관인들, 특히 언관직에 있지 않은 신하들의 상소에 대해서는 그것이 국정의 구체적 사안이 아니고 고도의 정치적 활동이라 하더라도 비변사에서 검토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핵심 권세가의 독점적인 권력행사가 비변사를 통하여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사나 정책의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철종 연간에 慶平君이 김조순 가문을 비난한 일이 일어났을 때 비변사가 직접 나서서 경평군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을 모아 피해액을 돌려주는 등, 행정 절차를 빙자한 노골적인 정치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독자적인 권력을 장악한 비변사를 견제하려는 시도가 때때로 행하여졌다. 특히 군주 중심의 정치체제를 복구하려는 국왕과 남인들 사이에서 비변사의 활동 방식을 바꾸어 보려는 노력이 나타났던 것이다. 순조는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일 무렵인 순조 7년(1807) 6월에 이조판서 李始源과 병조판서 韓晩裕를 인사 활동을 불성실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수십 차례씩 추고하였다. 그 회수가 파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담당 승지까지 같이 추고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와 같은 조치가 단순히 개인적인 불성실에 대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순조의 그러한 행동은 이조와 병조의 본래 업무를 강조함으로써 인사행위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던 비변사를 견제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얼마 뒤 순조가 병조판서 한만유에게 그가 담당하고 있는 모든 관직의 인사에 정성을 다할 것을 새삼 타일렀고, 한만유가 김조순 계열의 무장 李得濟에 의하여 인사활동을 견제당하는 속에서도 순조 10년 11월까지 오랫동안 그 직책을 유지하였다는 것이 그 점을 반영한다. 그러나 국왕의 이러한 노력은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전체적인 시도가 실패함과 함께 무위로 돌아감으로써, 비변사의 위상에 대한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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