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3) 세도정치의 운영 구조
  • (2) 중앙 군영

(2) 중앙 군영

 세도정치기에도 국가의 군사력과 군사제도는 권력을 장악한 개인이나 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힘으로 작용하였다.368)이하 세도정치기 권력집단의 무력기반에 대해서는 오종록,<중앙 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앞의 책), 425∼490쪽 참조. 그 시기 정치 상황에 따른 군사력의 변화는 순조 원년에 壯勇營이 혁파된 것으로 시작되었다. 장용영은 국왕의 친위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조에 의해 설치되어 튼튼한 재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순조 즉위 직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시파가 장용대장을 맡아 중앙 군영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조 장례와 공노비 혁파로 발생한 경비를 장용영에 떠넘겨 그것을 무력화하려 하였으나, 성과가 여의치 않자 상당한 부담을 무릅쓰고 장용영을 혁파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권력과 군영의 관계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당시의 중앙 군영으로는 龍虎營과 扈衛廳, 訓鍊都監, 御營廳, 禁衛營, 摠戎廳이 있었다. 이 중 호위청은 규모가 가장 작은 군영이고, 용호영은 군사력은 적지 않았지만 병조판서가 군사 지휘권을 갖고 재정운영도 병조에서 관장하였으므로 병조판서가 자주 바뀌던 당시 상황에서 특정 정치세력의 관여가 어려운 편이었다. 그것에 비해 훈련도감은 재정과 군사력 양 측면에서 가장 강력한 군영이었고, 금위영과 어영청도 재정에 상당한 여유가 있었으며, 총융청은 提調制의 적용을 받지 않아서 국왕과 직결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 네 군영이 정치적인 의미를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권력집단의 군사력 장악 현상은 군영의 지휘체계에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용호영은 조선 초기부터 있어 온 부대였지만 이 때는 국왕의 명령이 용호영의 군사 개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에 병조판서와 別將이 끼어드는 등, 국왕 직속 군사라는 성격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가장 강력했던 훈련도감을 보더라도 그 군사 행정은 대체로 비변사를 거쳐 국왕의 승인을 받아 행하여졌다. 그 중에서도 실제로 지휘체계를 장악한 것은 훈련대장이었으며 비변사에서의 결정이나 국왕의 승인을 받는 일도 거의 항상 그가 담당하였다. 훈련대장은 재직기간이 길고 소속 장교에 대해 인사권을 거의 가지고 있었으므로 독자적이고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한 훈련대장직은 김조순·조만영을 비롯한 권력집단의 핵심 인물들이 장기간 맡고 있었다.

 중요 4군영의 군사 지휘권과 재정 운용권은 모두 각 군영의 대장에게 속하였다. 그들은 또 비변사 제조를 자동적으로 겸하여 정치 행정 기구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군영대장의 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권한을 행사하는 기관은 군영대장 후보자를 결정할 권한을 지니고 있던 비변사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군영대장 후보자의 모집단을 선발할 권한은 훈련대장이 지니고 있었다. 즉 훈련대장과 비변사는 군사력의 장악과 운영에서 물고 물리는 한 덩어리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군영대장들은 무신 출신이라 하더라도 김조순 가문 등과 같은 권력집단과 밀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 초년 벽파가 시파를 공격할 때 파직당했던 무장들은 후일 김조순이 훈련대장으로 재직할 때 스스로, 또는 그 자손들이 군영대장이나 포도대장으로 중용되었다는 점이 그 사실을 반영한다. 반대로 순조 4년(1804) 이후 벽파가 시파의 공격을 받을 때 함께 처벌받는 무장이 발견되지 않음은 정계에서 숙청당하는 벽파가 무장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후로 권력집단의 변동이 일어나면 대개 그것과 관련되어 일부 무장이 처벌되거나,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순조 12년과 13년에 무장인 李堯憲·李海愚·李得濟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전은 조득영의 박종경 공격으로 불거진 김조순 가문 및 박종경 가문 사이의 대립과 관련된 것이다. 또한 순조 30년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죽은 뒤 金鏴 등이 축출당하는 과정에서 무신 李惟秀가 파직당하고 공격받았으며, 철종 즉위 후 조병현이 죽음을 당할 때는 李應植·申觀浩·李能權·金鍵 등의 무장이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권세가와 무장들의 연결은 순수한 군사력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군영 운영에서 얻어지는 재정적 이익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때로는 박종경·조만영 등이 주도하여 훈련도감·금위영 등에서 대량의 화폐를 주조하였던 것이 그것을 나타낸다.

 국왕의 군사통수권은 군인의 收布軍化와 군영체제의 발달로 五衛體制와 五衛都摠府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으므로 명목에 그쳤다. 국왕은 고위 무장에 대한 인사권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각 군영대장과 병조판서의 인사권을 비변사에서 관장하는 데다가 포도대장을 포함하여 각 군영의 대장직 후보자의 모집단은 훈련대장이 선발권을 행사하였는데, 비변사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집단에서 훈련대장직을 독점하거나 그에 추종하는 무리들만이 훈련대장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왕들이 군사력을 장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정조의 장용영 창설을 모범으로 삼아 독자적 군사력을 확보하려 했다. 순조는 別技軍을 훈련도감을 통하지 않고 선발하여 새 軍門의 창설을 시도하였으나 좌절하였고, 철종도 武藝別監을 60명 증액하려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헌종은 조만영 가문의 협력을 얻어 摠戎廳을 摠衛營으로 개편하고 무예별감과 禁軍의 일부를 흡수 운영하는 데까지 일단 성공하였으나 갑자기 죽음으로써 총위영도 곧 폐지되고 말았다. 또한 세 왕은 오위도총부의 기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공통으로 기울였으나, 궁궐 숙위를 강화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을 뿐 군영체제의 장벽에 막혀 좌절하고 말았다. 그 밖에 국왕이 무신들과의 유대와 친분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중앙 군사력의 인사권이 비변사를 장악한 권력집단에 의해 행사되고 있는 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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