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3) 세도정치의 운영 구조
  • (3) 언로와 공론

(3) 언로와 공론

 원래 조선왕조의 정치체제에서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활동은 대개 言官에 의한 言論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언관의 直諫이 조선왕조 400년의 기틀을 공고히 해 왔다는 당시의 평가들이 빈 말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전통은 비변사가 국정의 거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킨 19세기까지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서, 兩司는 홍문관과 더불어 비변사가 직접적인 인사권을 발휘하지 못하는 몇 안되는 관서로 남아 있었다. 비변사를 통해서 행사되는 독점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형식적으로나마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언론활동의 본령은 司憲府와 司諫院에 있었다.

 ‘公論’과 그것을 반영하기 위한 ‘言路’의 중요성은 조선왕조의 사림정치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던 것이었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대개 원론적인 상소의 한 조목으로 제시되고 말았을 뿐이었다. 정계에서의 첨예한 대립을 둘러싸고 언론이 문제되거나 현실적인 역학 관계를 거슬려 가면서 언론 활동이 이루어진 경우는 찾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어 순조 18년에는 그 전에 대사헌 재직중 박종경을 탄핵하다가 유배된 조득영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면서 언관의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이 매우 강조되었다. 양사는 그를 추가 처벌하라는 종래의 주장을 순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철회(停啓)하였고 조득영은 곧 풀려났다. 그러나 외형상 언론 활동의 원칙을 강조해 마지않는 것처럼 보이던 이 때의 언론은, 조득영이 순조 12년에 처벌당한 뒤로 거의 모든 관인들이 숨죽이고 있던중 박종경의 죽음을 계기로 일어난 것으로서,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반영한 것일 따름이었다.

 사림정치기에는 삼사, 특히 사헌부·사간원의 관원이 독자적인 언론활동을 하여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고 또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吏曹 낭관에 의해 주도되면서 정승과 판서에 대비될 정도의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이러한 원칙이 무시되고 언관의 독자적인 언론활동이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이미 15세기 말 성종 연간에 언론활동의 소재나 대상에 제한을 가하지 않겠다는 뜻으로서의 “말의 근원을 묻지 않는다(不問言根)”는 원칙이 굳어져 사림정치기의 언론관행에 디딤돌이 된 바 있다.369)南智大,<朝鮮 成宗代의 臺諫 言論>(≪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154∼160쪽. 그러나 순조 3년(1803)에는 탄핵을 받은 관인으로부터 언론의 진원을 조사하자는 건의가 들어오고, 臺閣의 言根을 묻지 않는다는 원칙을 들어 항의하던 언관이 오히려 파직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 시기에 굳어져 있던 언론 활동의 원칙을 재강조해야 했으며, 또 그런 원칙을 재강조하는 것이 처벌의 대상이 될 정도로 상황이 변하였던 것이다. 또, 순조 15년에 사헌부 관인 趙直永·沈厚鎭과 비변사가 언론문제로 대립하였을 때 영의정 金載瓚은 당시가 위기 상황임을 강조하여 자유로운 언론활동에 제한을 가하고, 언관에 대한 비변사의 공격을 “고위 관직자와 하위 관직자가 서로 견준다”는 원칙을 들어 합리화하였다. 원래 언관 활동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강조하던 원칙을, 오히려 그 시기 최고 권력기관인 비변사에서 언론활동을 비판하는 데 대한 논리로 내세웠던 것이다.

 위와 같은 양사 위상의 변화는 그 장관의 임명에도 나타난다. 이 시기에 와서는 고위직 역임자가 대사헌을 맡는 경우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실록의 인사기록을 정리한 바에 따르면 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대사헌에 1회 이상 임명되었던 인물은 186명이다. 이 중에서 정2품 이상 고위의 관직을 역임한 후에 대사헌에 임명된 경험이 있는 인물의 수는 148명에 달한다. 전체 대사헌 역임자 중의 약 80%에 달하는 숫자가 이미 판서·판윤 등 고위직을 역임한 후 대사헌에 임명된 경험을 지닌 것이다. 이전에도 대사헌직은 품계에 비해 훨씬 고위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판서 등을 지낸 후 대사헌에 임명되는 일이 그리 드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7세기의 인조 즉위년(1623)에서 효종 5년(1654)까지의 대사헌 역임자 74명 중에서 대략 40%만이 그와 같은 경험을 한 것에 대비해 보면 위의 비율이 대사헌 위상의 커다란 변화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대사헌은 종2품이라는 원래의 품계보다 훨씬 고위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헌부 위상의 상승을 말하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선왕조의 언론 활동이란 권력에 훨씬 접근해 있는 고위직 인물에 의하여 독점되거나 견제되는 정도가 클수록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따라서 본연의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일부 유배인들을 풀어주자는 대왕대비의 주장에 언관들이 맞서고 있던 순조 3년 11월의 예를 들면, 공조·형조의 판서를 비롯하여 광주유수·한성부판윤까지 역임한 李敬一이 대사헌에 특별히 임명되어 대왕대비의 뜻을 따라 현안 인물들에 대한 停啓를 시행하였다. 고위직 인물이 대사헌에 임명됨으로써 대왕대비의 뜻을 받들었던 것이다.

 한편 언관, 특히 사헌부 대사헌의 경우 단순한 명예직으로 운영되는 경우도 매우 흔해졌다. 예를 들어 산림 李直輔는 순조 즉위 후 11년까지 대사헌에 20번 가량 임명되었으며, 산림 宋穉圭는 순조 16년부터 헌종 3년(1837)까지 30번 이상 임명되었다. 이들은 물론 직책을 수행한 일이 없다. 예전에 南臺라 하여 극히 드물게 장령이나 지평을 대우직으로 주던 관례가 있었지만, 그것이 대사헌직에까지 일상의 일로 행하여졌던 것은 정치활동의 최전선 역할을 하던 대사헌, 나아가 사헌부의 역할이 그만큼 유명무실해졌음을 뜻한다.

 여기에 비해 사간원의 위상은 다른 방향으로 변화를 겪었다. 역시 실록의 인사 기록에 따르면 순조·헌종·철종대에 대사간을 1회 이상 맡았던 인물은 모두 340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대사간직 품계보다 높은 정2품 이상의 관직으로 승진한 사실이 나타나는 인물은 131명에 지나지 않는다. 대사간을 역임한 인물 중에서 60% 이상의 인물이 대사간보다 비중있는 고위 관직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비율은 인조 즉위 후 효종 5년까지의 대사간 역임자 101명 중에서 같은 성격의 인물이 약 35%에 지나지 않는 것과 명백한 대비가 된다. 특히 인조대와 효종 초년의 대사간 역임자 중 1/4 이상의 인물이 이미 대사헌을 역임한 상태에서 대사간에 임명된 경험이 있었던 것에 비하여 이 시기에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 것도 같은 상황을 반영한다. 대사헌이 고위관직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던 상황과 짝하여 사간원은 심각한 위상의 저하를 겪었던 것인데, 그 두 현상은 언관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없다는 공통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속에서 언론활동은 극도로 위축되어 대왕대비나 고위 당국자로부터 오히려 그에 대한 우려가 자주 나타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언관들이 할 말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은 수시로 발견되는 일이다. 특히 대간 활동이 임금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이지 관인 상호간의 경계가 없다는 진술은, 권력의 극단적인 집중을 초래한 정치 상황에서 언관이 임금에 대한 의례적인 활동만으로 자기 책임을 면하려 하고 있을 뿐임을 지적한 것이었다. 순조 29년(1829)에는 언관이 언관을 공격하여 체모를 어그러뜨렸다는 죄목으로 대리청정중인 세자에 의해 처벌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 때 그들은 세자로부터, 자신의 뜻에 영합하려 했다는 언관으로서의 입지에 치명적인 비판을 받기까지 했다. 나아가 헌종 14년(1848) 金興根에 대한 공격이 제기되었을 때는 국왕이 그것이 公議인가를 물었는데 兩司 관원은 왕의 부름을 어기면서 논의에 참가하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국정의 최고 현안에 대해서 임금의 문제 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관이 권력가의 위세에 눌려 논의를 회피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만 순조 초년까지는 비교적 언론활동의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것은 양사의 활동에 대한 대신의 간섭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나, 停啓 여부는 公議에 따를 뿐이지 위로부터의 명령은 부당하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대왕대비로부터 과도한 말을 하였다는 비난을 듣고 겨우 처벌을 면하는 처지에 처하거나, 정계 명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대사간이 유배당하는 상황이 뒤따르곤 하였다. 순조 6년 4월에도 언관의 논의는 임금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지 말고 公議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언관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미 그들이 정국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활동에 대한 국왕이나 고위 관리들의 직접적인 간섭을 피하려는 노력에 그치는 것이었다. 그나마 헌종·철종 연간으로 들어가면서는 언관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이 정도의 발언도 쉽게 발견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양사가 더 이상 정쟁의 일차적 담당 기관 구실을 하지 못하고 국왕이나 고위 관직자가 직접 정치적 대립을 주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예를 들어 순조 초년부터 철종대에 이르기까지 정국에 큰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언관이 먼저 발론하여 주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순조 원년의 경우에는 삼사가 벽파세력 쪽에 서서 많은 주장을 하였지만, 영의정 沈煥之가 그 내용을 재론하여 평가와 함께 결론을 도출한 후 대왕대비의 재가를 얻어 처리하는 형식을 밟았다. 尹行恁에 대한 공격은 대왕대비가 먼저 발론하여 신하들의 공격을 이끌어 냈으며, 정조 국상이 끝난 직후에도 대왕대비가 신하들 사이의 논의를 기다리지 않고 그들의 의리에 어긋나는 인물들에게 자수할 것을 명함으로써 격렬한 정쟁을 초래하였다. 순조 친정이 시작된 후 벽파를 제거하는 金達淳의 옥사에서도 국왕 순조와 형조판서 조득영의 상소가 정국의 변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김달순에 대한 언관의 공격은 그가 배격을 받아 도성 밖으로 나간 다음에야 시작되었다.

 격동기 외에 일상의 정치 과정에서도 국왕이나 고위 관직자들이 직접 신하들에 대한 탄핵을 주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예를 들어 헌종 13년에 李穆淵이 趙秉鉉을 탄핵하자 국왕이 먼저 이목연에 대한 공격을 신하들에게 독촉하였고 거기에 따라 탄핵이 시작되었다. 헌종 10년 4월 고위 관원 金蘭淳·李嘉愚·李穆淵 등 67인을 宗廟 親享에 불참한 죄로 잡아다 처벌한 것도 판의금부사 조병현과 원임대신 조인영 등 실권을 쥔 고위 관직자들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철종 연간에 이르러 언관들의 무기력은 관인들이 대간직에 임명된 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직책을 수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타이름이 있어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아가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에서 기강을 담당한 가장 엄정한 관서라는 사헌부가 경제적 모리 행위의 온상이 되는 상황까지 빚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언론활동의 위축은 단순히 조정의 사정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조정의 언관 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지배계층 전반의 여론, 앞 시기에 이른바 ‘公論’이 지니고 있던 의미를 크게 상실하였다. 순조 9년 5월 김재찬은 유생의 상소가 삼사의 언론활동보다도 많다고 지적하였지만, 이 때 그가 지적한 것은 유생들이 疏廳을 만들고 상소를 빙자하여 전국의 읍으로부터 재화를 강제로 거두어들인다는 경제적 모리 행위로서의 유생 언론이었다. 순조 34년(1834) 3월에 심상규도 유생의 통문이 모리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공격하고 그 개혁안을 모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유생 언론의 실상이 이러했기에 유생 통문에 대하여 전 시기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많은 제한이 가해져 가고 있었다. 순조 16년에는 언관인 李奎鉉은 유생이 지방에서 통문을 발할 경우에는 먼저 그 지방 유생 우두머리[掌議]의 허락을 받게 하자는 방도를 내놓았다.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유생 언론에 대한 제약이, 그것도 다름 아닌 언관에 의해서 제기될 만큼 공론의 명분이 퇴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순조 20년 5월에는 통문을 돌려 조정 관인을 시비하는 자는 유배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명령은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혀 결국 22년 정월에 취소되었지만 유생 언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명령이 내려졌던 것 자체가 커다란 변화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시기에는 언관의 활동이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에 이르렀으며, 士論이라 표방되는 유생들의 여론이 지배 계층 전반의 견해를 대변하는 정도는 앞 시기보다 훨씬 축소되었다. 이것은 몇몇의 권력자가 비변사 등을 통하여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여도 그것을 견제하는 일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언관의 활동이나 유생 언론이 질적인 측면에서 그 의의를 모두 상실한 상태에 있었으나 형식적인 틀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핵심적인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을 지닌 대책이 몇 차례 시도되었으나 전통적인 지배체제의 틀은 쉽사리 변화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공론과 언로의 이러한 면모는 당시의 비변사가 왕조 체제를 위협하는 기능을 행하면서도 정책기관이라는 틀을 형식적으로나마 지키고 있던 것과 더불어, 세도정치하의 권력집단이 앞 시기의 지배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질시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통적인 틀속에서 성장해 온 세력인 동시에 그것을 벗어버리려는 의식을 지니고 있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吳洙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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