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세력 일각에서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기 전에 반대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미리 제거함으로써 권력기반을 튼튼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전직 현감 洪履猷의 사주를 받은 전직 군수 趙鎭井 등이 정조 연간에 김구주를 공격했던 徐有寧과 그 아들 좌의정 徐龍輔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그 한 예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때의 노력은 서용보가 순조 초년에 벽파세력과 타협했던 까닭에 당시 당국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받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上疏와 儒通에 연관되어 趙鎭井·洪履猷·李東萬·李榮復·金元喜·鄭在民이 유배되었다. 그러던 중 순조 4년 정월에 순조가 직접 정사를 돌보게 되면서 정국은 크게 바뀌었다.
순조 4년 4월, 전에 시파세력 축출의 선봉이었던 강진 현감 이안묵을 貪鄙의 죄목으로 공격해 유배함으로써 벽파에 대한 시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5월에는 순조가 김조순가와의 국혼에 반대했던 권유의 상소를 次對 석상에서 제시하면서 공격을 이끌어 낸 후, 권유·이안묵 등 시벽 분쟁의 초점을 이루었던 인물들이 먼저 제거되었다. 이 때 권유는 물고당했고, 이안묵과 유생 沈魯賢·鄭在民·韓海玉 등이 처형되었으며 玄重祚·鄭彦仁·李晦祥·尹致行·洪在敏 등이 유배당했다. 권유가 탄핵받을 때 김노충이 그 배후로 지목되자 대왕대비가 다시 수렴청정할 것을 시도하였으나 그것은 김관주 등으로서도 반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군주체제의 정치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한편 순조 초년에 처벌받았던 시파세력이 5년 3월과 7월 등 몇 차례에 걸쳐 대폭 풀려났다.
순조 5년(1805) 12월에 김달순은 우의정에 임명되자 곧 정조 연간에 사도세자 추숭을 주장했던 李土禹 등 영남만인소의 주모자를 처벌하고 그것을 공격했던 朴致遠·尹在謙을 褒獎하자고 주장하는 등 ‘벽파 의리’의 재정립을 시도하였다. 그 주장에 따라 처음에는 이우와 홍지섭에 대한 유배의 명령이 내려지는 등 상황이 유동적이었으나, 형조 참판 趙得永이 김달순을 공격하고 나선 것을 계기로 벽파세력이 패퇴하게 되었다. 김달순의 중심 죄목은 신하로서 감히 언급할 수 없는 내용을 말하여 정조의 의리를 위배했으며 과거 정조의 요청으로 영조가 파기 명령을 내린 기록을 함부로 인용하였다는 것이었다. 김달순은 中途付處되었다가 사사당하였고 金漢祿이 대역률로 追削된 것을 비롯하여 심환지·정일환·김구주도 추삭되고 金龍柱·김일주가 유배당했으며 김관주는 유배중에 죽었다. 영의정 徐邁修 역시 김달순에게 동조했다는 공격을 받아 조정에서 축출당하였다. 그 밖의 관인으로는 김달순을 공격하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臺臣 李寅采 李廷輪·尹濟弘·金處巖·黃基天이 유배당하였다. 또한 李東馨은 그 기회를 이용하려는 협잡을 부렸다 하여, 李魯春은 김달순의 窩主라 하여, 張錫胤·李選·金履秀는 권유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趙秀民은 김달순을 두둔했다는 이유로, 서매수의 아들 徐有恂과 친척 徐淇修는 서매수가 김달순을 두둔한 발언의 기록을 고치려 했다는 이유로, 李翊模는 김달순의 무리로 지목되어, 徐瀅修는 그들의 謀主라고 지목되어 유배당하였다. 한편 朴英載는 심환지를, 尹致永·尹亨烈은 韓用龜를 무리하게 공격했다는 이유로, 李基慶은 섣불리 토역을 告廟하자고 주장하다 유배당했다.
그 후 순조 7년에는 김달순의 행위가 逆이 아니라는 등의 흉언을 했다는 李敬臣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세력의 이념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金鍾秀·金鍾厚 형제의 관작이 추탈되었으며, 김종수는 정조의 廟庭에 배향되었던 것에서도 축출됨으로써 순조 초년 시파와 벽파의 정치적 분란은 명분상으로도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처벌과 짝하여 한쪽으로는 서유린에게 직첩이 환급되고 홍낙임이 복관되는 등 시파에 대한 처벌이 대폭적으로 취소되고 많은 사람들이 정계에 복귀하였다.
순조 5년 정월에 정순왕후가 사망하여 벽파세력의 유력한 후원자가 사라진 상태에서, 순조는 재상들에게 김달순 처형에 대한 의견을 묻는 등 김달순을 공격하는 쪽을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그리고 벽파 몰락의 첫 신호가 김조순 가문과의 국혼을 방해하였다는 권유를 처벌하는 것이었고, 이후로도 권유의 행위가 벽파세력에 대한 공격에서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었던 것에서 김조순이 당시 정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조순 세력은 벽파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순조 생모 綏嬪 朴氏의 친정인 박준원 가문의 협력을 받았다. 척신이므로 조정일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순조 초년 박준원의 발언이나 7년 10월 그 아들 朴宗輔의 죽음에 붙인 실록의 사평에 따르면, 순조 초년 벽파세력의 전횡에 대해서는 그들이 방관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순조 6년의 정국 변화에서는 벽파세력을 축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376)유봉학,<徐有榘의 學問과 農業政策論>(≪奎章閣≫9, 서울大, 1985), 28쪽 참조. 이리하여 5년 2월에 순조가 천연두에 걸렸을 때 別入直으로 궁궐에 들어가는 인물들이 김조순·박준원·박종보·朴宗慶 등 김조순과 박준원 가문만으로 구성된 데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들이 국왕 측근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다만 박준원 가문은 한동안 김조순 세력과의 경쟁 관계에 놓이는 것을 피한 듯하다. 순조 10년에는 박준원의 손자 朴周壽가 그 아버지 박종보의 유언에 따라 김조순이 장악하고 있는 규장각에 들어가는 것을 극력 피하다가 한때 군수에 좌천되기까지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은 ‘가득차는 것을 피한 것’이라는 순조의 평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박종보가 후손들로 하여금 김조순의 권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조득영은 김달순 공격에 앞장섬으로써 벽파세력의 전횡으로부터 의리를 지켜 냈다는 확실한 명분을 공인받게 되었고, 김달순을 공격한 직후인 순조 6년 2월 순조에 의해 병조판서로 발탁되고 4월에 비변사 제조가 되었으며 10월에는 이조판서에 오르는 등 파격적인 승진을 계속하면서 커다란 세력을 행사하였다. 이것은 조득영 개인의 득세에 그치지 않고, 김조순 가문과의 협력관계 위에서 훗날 그의 8촌 형제인 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들이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김조순이 권력의 주도자 자리를 굳혔고, 이후 19세기 ‘세도정치’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최고 권력기관인 비변사에서 실권을 행사하였으며,377)오종록,<비변사의 조직과 직임>(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앞의 책, 1990), 519·520·524쪽. 순조 즉위년(1800)에 奎章閣 제학에 임명되고 4년 이후로는 줄곧 檢校提學으로 있으면서 그 관원의 인사를 주도하는 등 규장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규장각은 당시 실제 기능은 약화되어 있었으나 선왕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였으며 특히 국왕의 近臣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었던 만큼, 그는 규장각을 또 하나의 권력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순조 초년 심환지와 대왕대비에 의해서 장용영이 혁파당함으로써 군사적으로 견제를 당하였지만 순조 2년 10월 이후로 훈련대장을 맡아, 서울을 관할하는 유일한 군문으로 강력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훈련도감을 이끌었다. 나아가 순조 7년 7월에는 그 때까지 처리되지 않은 장용영의 남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훈련도감 군병의 증원을 이루어 냈으며, 8년 4월에는 그 재정을 늘릴 것을 요청하여 윤허받았다. 이러한 조치는 실질적으로 장용영의 내실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기반을 튼튼히 한 김조순은, 친아들인 진사 金逌根이 중전의 형제라는 이유로 京官職을 받기로 결정이 된 순조 9년 3월의 다음달에는 8년째 맡아 온 훈련대장직을 李得濟에게 물려주고 군사력의 직접 장악에서 일단 물러나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한편 순조는 즉위 이후 줄곧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때는 적극적으로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였다. 권유와 김달순을 처형할 때의 적극적인 행동이나, 대왕대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려 할 때 그것을 무시한 사실 등에서 그러한 상황이 드러난다. 순조 7년 6월의 관원에 대한 정기 인사에 즈음해서는 근무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이조판서 李始源과 병조판서 韓晩裕를 수십 차례씩 推考하여 좌의정 이시수로부터 너무 가혹한 대접을 한다고 비판받을 정도였다.
국정을 파악하고 주도하기 위한 순조의 노력은 그가 19세 되던 순조 8년 이후로 확연히 강화된다. 그 해 10월에는 각 관청의 직무, 제도와 신하들의 출신 및 이력에 대하여 알고 싶다는 소망을 표명하였으며 재정과 부세 및 재판 등을 맡은 실무 관서에서 두세 명, 또는 서너 명의 관인을 직접 불러 국정의 실제를 파악하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각 관서의 실무자들을 불러 폐단을 묻는 일이 종종 있게 되었다. 특히 9년 4월에 실무자들을 불러 대화한 자리에서는 실질적인 폐단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이후로는 절실한 문제를 논할 것을 신칙하기도 하였다. 실무 관인을 불러 직접 대화하는 것은 기존 제도이지만, 특히 이 시기에 많이 이루어졌음은 국정을 주도하고자 한 순조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순조 8년에는 유례없이 일시에 전국 각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폐를 보고하게 하였으며, 같은 해 5월에는 국가의 재정, 군제 및 토지에 관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徐英輔·沈象奎로 하여금≪萬機要覽≫을 편찬하도록 하였다.378)편찬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金奎聲,<만기요람 해제>(≪국역만기요람≫, 민족문화추진회, 1967) 참조. 9년 3월에는 전국의 수령·감사·유수들에게 민폐의 내용과 그것을 바로잡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보고하라는 윤음을 내렸고, 11년 3월에는 임금이 항상 참고할 수 있도록 감사·유수들이 항목별로 그것을 정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순조는 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군사력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는 五衛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군문이 설치됨으로써 군정의 폐단이 심해졌다고 하여 군문의 설치를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김조순 또는 그 계열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군문의 상황을 비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인식 위에서 10년 3월에는 궁궐의 호위를 담당하는 武藝廳의 군병을 늘리려 하다가, 김조순 가문의 대사헌 金履度의 반대 상소에 부딪혀 취소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이 때의 계획은 공식적인 논의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순조가 개인적으로 추진하였다. 나아가 11년 3월에는 피폐하여 명목만이 남아 있던 五衛都摠府를 강화할 것을 명령하고, 궁궐 경비 군인들이 위엄을 갖출 수 있도록 의장을 정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각종의 講·應製·製述 등의 시행도 그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漢學文臣講, 專經文武臣講, 吏文製述 및 入直文蔭官 親試 등이 순조 11년(1811)경에 급격히 늘었다. 실록에 의하면 순조 5년(1805)에 4회, 6년에 3회, 7년에 4회, 8년에 4회, 9년에 4회, 10년에 1회 행하여진 이러한 시험들이 순조 11년에만 윤3월부터 12월까지 86회나 실시되었다. 그 뒤 홍경래란의 와중에서는 실시되지 않다가 13년에 5회, 14년에 8회, 15년에 1회 실시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현상은 그 시기에 순조가 하급관료들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정에 몰두하던 순조가 자신의 노력을 뒷받침할 관인세력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문무신들과의 각종 활쏘기 모임 등도 순조 8년경에 많이 행하여지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위와 같은 순조의 노력에 대해서는 일부 신료들의 촉구 또는 뒷받침이 있었다. 8년 4월 남인인 持平 柳遠鳴이 상소하여, 영조 이후의 탕평책을 높이고, 당시의 인사를 비판하여 조정에서 소외세력이 늘어가고 있음을 지적한 후 임금이 확고한 중심을 이루어 정사를 주도할 것(建極)을 건의하였다. 대사간 李審度도 그 해 9월에 당대 시파와 벽파의 대립을 비판하고 임금이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국정을 주도하라고 상소하였다. 특히 이심도는 순조 5년의 증광시에 급제하여 빠른 시간에 대사간에 올랐는데 이것은 그가 순조의 특별한 배려를 받았던 인물임을 짐작하게 한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순조가≪만기요람≫을 편찬할 것을 명령한 것과 각 사의 직무 및 신하들의 출신 가문 등을 스스로 자세히 파악하고 싶다는 소망을 진술하고 실무자의 소대를 명령한 것은 이심도의 상소가 있은 지 이레만의 일이었다. 이것은 유원명과 이심도의 상소가 국왕의 노력과 짝하고 있는 것으로서, 당시 순조의 국정 주도 노력이 우연한 것이 아니었으며 미약하나마 그에 호응하는 관인들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순조의 정책은 김재찬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는 순조 5년에 잠깐 동안 우의정으로 있은 뒤 7년에 다시 우의정에 오르고 8년 윤5월 이후로는 영의정이 없는 상태의 좌의정으로 재직하였다. 김재찬은 김조순 중심의 세력과 적대적인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순조의 독자적인 선택에 의하여 처음 정승이 되었으며 늦게까지도 순조로부터 가장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순조와 일부 관인들의 위와 같은 노력은 순조롭게 추진될 수가 없었다. 이심도의 상소에 대해서 언관들은 그가 임금의 권한을 강조하는 ‘總攬’이라는 구실하에 시파와 벽파 모두를 공격함으로써 조정 관인들을 모두 도태하려는 계획을 보였다고 맹렬히 공격하였고, 순조 스스로도 당파를 언급하였다는 죄목으로 그를 처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원명 역시 그 이후 당상관으로의 승진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실록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순조 11년의 하위 관인들에 대한 순조의 정책도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1년 10월 양사에서는 긴요하지도 않고 명분도 뚜렷하지 않은 講製를 너무 많이 실시한다고 순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등 신하들이 임금의 노력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김조순은 훈련도감을 장악하고 있었고 병조판서 金履翼은 순조 8년 4월 禁衛營의 강화를 요구하는 반면, 군문에 비판을 가하고 국왕을 호위할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순조의 노력은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김조순 가문의 인물에 의하여 저지되는 상황이었다.
순조 8년에 전국에 암행어사를 보내 지방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노력은 관료체제 전반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규모의 어사 파견으로 인해 폐단이 커지는 역효과를 자아냈다.379)鄭元容,<暗行御史栍邑之規>(≪袖香編≫, 영인본, 同文社, 1971). 9년 3월 민폐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그 해 여름에는 비변사에 지시하여 그것들을 바로잡도록 하였으나 11년 3월까지 보고가 전혀 없다가, 임금의 채근을 받고서야 부랴부랴 비변사에서 그 시행 상황을 정리하여 보고하였다. 또한 구휼과 죄수 심리 등 국정의 구체적인 면을 주재하려는 노력은, ‘밑의 담당자가 하면 될 일이니 국왕이 나서지 말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초래하였다.
이 밖에 즉위 이후 비교적 순조롭던 농사 상황이 9년에 이르러 극심한 흉년으로 변한 것도 순탄한 국정의 운영에 재정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더욱이 11년 12월에 홍경래란이 일어남으로써 순조의 노력은 결정적으로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순조는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되어 국가운영에 일관성을 잃게 되었고, 11년경에는 결국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후 12년 3월에 회복은 되었으나 정치력의 복구는 이루지 못하여 이전까지의 그의 노력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패의 구체적인 원인은 당시의 권력자들이 비변사를 장악하여 국정의 대부분을 움직이는 상황에서 순조가 그들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할 관료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멀리는 홍경래란으로 나타난 민중의 동향이 지배계층 일부에서 일어난 전통적인 방식에 따른 정치적 재편성의 움직임을 좌절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조 4년(1804)에서 11년까지의 순조 친정 초기는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가문의 여러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고 반남 박씨 박준원 가문과 풍양 조씨 조만영 가문 등이 협력하는 세력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난 후 권력을 집중시켜 가던 시기이다. 순조도 장성함에 따라 국정을 주도하려는 노력을 다각도로 기울였으나 이미 조성된 세력 관계를 재편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