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2. 세도정치의 전개
  • 1) 순조대의 세도정치
  • (3) 순조 친정 중기(순조 12년∼26년)

(3) 순조 친정 중기(순조 12년∼26년)

 정조에 의해 순조의 보호자로 선택된 김조순의 관직에는 작은 변화가 있기도 했지만 권한에는 별다른 변함이 없었다. 그 친아들로 후에 한동안 김조순 일문의 중심이 되는 金逌根은 순조 12년 5월 司書로 임명된 이후 17년 5월의 이조참의를 거쳐 19년 5월에 비변사 제조가 되었고 27년까지 이조참판·대사성·대사헌 제학·선혜청 제조·판윤·예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그 동생 金左根에 대해서도 순조 25년 8월 김조순의 회갑을 맞아 6품직에 서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밖에 金履喬·金履翼·金履陽·金履度·金羲淳 등의 안동 김씨 일문과 南公轍·李相璜·심상규 등 김조순 계열의 인물들이 정계의 중심에 포진하고 있었다.

 다만 ‘홍경래란’을 거치면서 한때 정국 변화의 가능성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벽파세력 김관주의 손자인 金聖吉이 그 증조부인 金漢祿의 신원을 요구한 일이 순조 12년 10월에 처음 나타난 것도 그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김성길의 상소는 김이교·김희순·김이양의 반격을 받아 무위로 돌아갔다. 한편 순조 11년 이후로는 박준원의 아들이며 벽파세력의 축출에 참여했던 박종경이 점차 세력을 행사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 17년 12월 그가 죽었을 때, 권세와 지위를 바탕으로 친한 사람들을 모아 조정에 갈라짐이 있었다는 사관의 평가가 붙었던 것에서도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380)이 시기 박종경과 김조순의 권력 다툼에 대해서는 鄭奭鍾,<순조 연간의 정국변화와 다산 解配 운동>( 앞의 책, 1994, 517∼529쪽) 참조. 이 때 조득영은 순조 12년 11월 박종경의 권력과 부패를 극렬히 탄핵하다가 자신을 두둔하던 尹致謙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박종경도 이 공격으로 말미암아 훈련대장에서 사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조득영이 김조순 가문과의 협력관계 위에서 박종경 세력의 도태에 나섰던 것이었다고 판단되며, 김조순이 국정에 대한 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381)金澤榮,≪韓史綮≫권 5, 純祖紀. 박종경은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순조 14년과 15년에는 순조가 군문대장직에 특제하기도 하지만, 김조순 가문에 대한 경쟁력은 더 이상 지니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순조 17년에 박종경이 죽자 대사간 申在植을 비롯한 언관들은 물론 남공철·鄭萬錫·李羲甲·김이교·金履載 등과 少論 가문 출신의 朴宗薰까지 조득영을 용서하는 것이 公議라고 내세워, 8월에는 그를 放歸田里시켰고 19년 4월에는 완전히 풀어 주었다. 언관을 그 직분인 언론 행위로 인해 처벌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순조 19년 8월에 들어 세자를 조득영의 8촌인 趙萬永의 딸과 결혼시키기로 결정된 것은 위와 같은 김조순 가문과 조득영 가문의 협력 관계 위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순조 초년 벽파세력에 의해 조정에서 대거 축출되었던 남인은 순조 14년 4월 洪時濟와 18년 9월 영남 유생들이 채제공의 신원을 요청하여 적지 않은 분란을 일으켰으나 그 후 계속된 탄원에 의하여 23년 4월에 채제공이 복관됨으로써 그들의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입지를 인정받았다. 25년 5월에는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이 형조참판으로 재직중임이 확인된다.

 이 시기의 순조는 앞서 잃어버린 국정 주도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국정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순조 11년 홍경래란 이전만 해도 쓸데없는 강과 응제를 너무 많이 한다는 평을 들었던 순조는 고위직, 경연관들을 막론하고 신하들과의 만남도 피하는 상태에 있었다. 15년 9월에 이시수가 임금과 신하들의 사이가 너무 벌어져 경연이 잘 되지 않고 홍문관이 비다시피 한 상황을 지적하고 왕에게 적극적으로 신하들을 접하라고 건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극단적인 상태가 일반적으로 내내 계속된 것은 아니어서, 각종 강이나 응제 등을 통한 하급 관인들과의 만남이 재개되기도 하였지만 전 시기와 같은 민생에 대한 관심 등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일은 이 시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소극적으로 조정의 분란을 조정하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권위를 펴 보이려는 노력을 조금씩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순조는 신하들의 일치된 의견에도 불구하고 조득영을 용서하는 데 크게 반대하였는데 이것은 김조순 가문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22년(1822) 12월에 정조의 후궁이자 자신의 친어머니인 반남 박씨 嘉順宮이 죽었을 때에는 嚴燾·權敦仁을 필두로 한 많은 관인들이 그 장례의 절차가 의례를 넘어선다고 비판하였지만 순조는 홀로 뜻을 굽히지 않고 맞섰다. 19년 6월에는 김조순 가문의 척족정치를 비난했다가 축출당했다고 평가되는 李書九를 형조판서에 임명하여 중앙 정계에 불러들이려 하였으며, 전라감사를 맡겼다가 24년 9월에는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순조가 사람을 쓴 방향은 김재찬의 동향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앞 시기 순조의 정국 주도 노력을 뒷받침하였던 것으로 판단되는 김재찬은 순조 15년 5월, 이조·병조의 관리 의망에 대한 특명이 모두 ‘척신과 연결된 가문의 사람들’이라고 비판하였으며 그 직후 6월에는 서북 지역의 과거 합격자들을 승문원과 선전관에 소속시키는 것을 허락하자고 건의하였고, 7·8월에는 서북 양도의 문무 과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언관과의 분란을 겪고 11월에 사직하여 다음해 5월에 물러났다. 이것은 비록 소극적으로라도 김조순 가문 중심의 정국 구도를 견제하다가 정승직에서 배제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 후 그는 순조 17년 7월에 불려 나왔으나 계속 사직하다가 대사헌 任厚常과 분란을 겪는 등 순조로운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김재찬이 순조의 국정 주도 노력을 뒷받침했으나 끝내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은, 병란과 기근을 극복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조정의 분열을 구할 수 없었다고 그 죽음에 붙인 실록의 사평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金澤榮이 조선의 진정한 재상은 김재찬 父子일 따름이라는 평가를 전한 데에서 나타나듯이 당시의 정치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서도 김재찬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은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순조 19년 4월에는 사간 任火業이 ‘임금이 너무 침묵을 지켜 이해와 公私의 분별이 權柄으로 들어갔으며 결재가 밑에서 처리된다’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기에 대해 순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임선은 조정 신하들을 없애려 한다는 반격을 받아 유배당했다. 순조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찍부터 세자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23년 5월 이후에는 남공철의 건의를 따라 궁중의 공식 행사와 임금이 신하들을 만나는 자리에 세자를 참여시켰다. 21년 10월에 최초로 孝禧殿에 대한 朔祭를 세자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한 이후 23년 겨울부터는 국가의 모든 제례를 세자가 섭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27년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기 위한 의도적인 기초 작업이 되었다.

 순조 12년에서 26년까지의 순조 친정 중기는 국정을 주도하기 위한 앞 시기 순조의 노력이 실패한 상황에서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음으로 양으로 확고한 주도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던 시기였으며, 그것을 위해 경쟁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닌 순조의 외가쪽 인물들을 조득영과의 협력을 통해 억누르는 과정이 선행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