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2. 세도정치의 전개
  • 1) 순조대의 세도정치
  • (4)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순조 27년∼30년 5월)

(4)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순조 27년∼30년 5월)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힌 국왕의 소망에 따라 순조 27년에 세자가 대리청정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또한 김조순을 비롯한 유력 인사의 암묵적인 승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리청정을 실시하라는 순조의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김조순·이상황·심상규·정원용 등이 이미 그것을 논의하였으며 거기서 대리청정에 찬성하기로 미리 의견이 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자는 일단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적극적으로 국정을 처리하여 나갔다. 청정 사흘만에 형조판서와 한성부 당상에 대한 인사 명령을 내리고 나흘만에 전이조판서 李羲甲을 비롯한 金在昌·김이교 등의 고위 관료에게 감봉의 징계를 내렸다. 또한 전라감사에서 돌아와 민폐를 순조에게는 개진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보고한 曺鳳振을 유배하고 그를 탄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직 홍문관원들을 모두 삭직하는 등 권한을 단호하게 행사하였다. 순조 19년(1819) 권력가문의 농단을 비난하고 임금의 권한을 강조하였다가 유배당한 임선을 4월에 풀어 주었는데, 이 조치도 부왕을 대신해 국왕의 권한을 강력히 행사하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소론 대신으로 영조대에 처벌받은 趙泰億의 관직과 성명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는 죄로 소론 韓植林을 유배하였다. 이 때에는 경종대의 옥사를 중심으로 한 노론과 소론의 주장에 대해 노론 쪽을 정당화했던 영조의 丙申處分을 재확인하고 대신과 언관들이 그를 공격하는 데 게을렀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그 말을 따라 한식림을 공격하는 홍문관원들에게는 이미 처분이 내려진 후에 책임을 막기에 급급해 한다고 하여 不敍의 처분을 내렸다. 한식림의 처벌 또한 노론 의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노론의 의리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신하들에 대한 기선을 제압하려는 노력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자는 김조순 계열의 정승 심상규를, 순조의 대리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하교도 기다리지 않고<聽政節目>을 바쳐 옛 제도와 도리를 어겼다는 죄명을 붙여 중도부처하고, 그 권세와 사치를 공격한 任存常을 이조참의에 특별히 임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력 인사들이 모두 대리청정에 찬성하였으며, 심상규가 세자에게 특별히 처벌을 받아야 할 만한 이유는 따로 없었다. 결국 이 조치도 김조순 가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세자의 노력이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대리청정이 그들의 암묵적인 승인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부정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세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조순은 조정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소외된 상태에 놓였다. 이 때에 처음 쉴 수 있게 되어 여주 玄巖에 가서 지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당시 가문을 주도하고 있던 김유근도 대리청정이 시작된 직후인 3월에 생애 한 차례뿐인 관찰사 임명을 받아 평안도로 나가게 되었으며, 그나마 원한을 진 전직 관인의 기습을 받아 수행인을 살해당하고 돌아온 일로 조정에서도 그 처신을 공격받아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나아가 29년 7월에는 김조순의 7촌 조카인 金敎根과 그 아들 金炳朝의 권세와 탐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부호군 沈英錫에 의하여 제기된 후 李游夏 등에 의해 權奸이라는 공격이 이어져, 김교근은 출사의 명령을 어기다 한때 甕津에 유배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리하여 순조 29년에는 김조순 쪽의 인물인 이상황이 4차의 上書와 10차의 呈辭 끝에 좌의정에서 물러가고, 영의정 남공철 역시 연초부터 사직을 고집하여 6월에 물러나게 되었다. 당시 李存秀가 좌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죽은 상태에서, 비변사에 일이 밀렸으므로 급한 일은 담당 당상관이 원임 대신과 상의하여 직접 세자 자신에게 草記로 올리라는 명령이 10월에 내려지기도 한다. 이것은 당시 권력자가 장악하고 있던 비변사가 세자의 견제로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고, 세자가 현임 정승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국무를 직접 처리하려 하였던 상황임을 짐작하게 한다.

 위와 같이 기성 집권세력을 견제하려는 노력은 다른 편으로 자기 세력의 부식과 짝하여 이루어졌다. 순조가 정국을 주도하려 했을 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자는 청정을 시작하자 각종 응제·강·제술을 급격히 늘렸다. 실록에 의하면 그런 행사는 순조 24년부터 대리청정 이전까지와 세자 사망후 순조 32년까지의 기간을 합하여 순조 26년 2월의 別試講經 한 차례 외에 한번도 실시되지 않았으나, 대리 기간 중에는 순조 27년에 17회, 28년에 17회, 29년에 12회, 세자가 죽는 30년에는 4월까지만 해도 7회 실시하였음이 확인된다. 순조 30년 4월에 세자는 그러한 행사의 목적이 ‘수재를 뽑고 경술을 권장한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으로는 세자가 자신의 국정 운영을 도와줄 관료들을 새로 육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爵賞이 과도하고 科製가 빈번하다’는 순조 28년 8월의 朴綺壽의 비판이나 그에 앞서 27년 8월 같은 내용의 姜泰重 상소는 그러한 정치적 의도에 대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또한 28년 11월에는 남공철과 이상황도 같은 내용을 주장하는 등 신하들의 많은 비판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던 점에서도 세자의 정책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리하여 29년 10월에는 그간 직접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아 문과 합격이 보장된 인물들을 정시문과의 방목 끝에 올렸는데 그 숫자가 27명이나 되었다. 29년 12월, 이상황은 요행으로 진출하는 길이 많아 문제가 초래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막으라고 건의하였다.

 반면에 세자는≪書經≫하나를 시작한지 5년이 되도록 마치지 못할 정도로 기왕의 서연은 피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존 집권세력의 인물들로부터 견제를 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후에 신하들의 지적을 받은 후 비록 서연의 횟수는 늘어났으나, 별다른 열의를 기울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당시 막강한 김조순 세력이 지니고 있는 노론 시파로서의 명분을 뒤집어엎는 과감한 정국의 전환은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순조 29년(1829) 11월 부호군 愼宜學이 상서하여 이서구를 추키면서 정조가 사망하기 직전 벽파의 논리를 공인하였다는 근거로 주장되는 ‘五晦筵敎’의 명분을 주장하였을 때, 곧바로 국문하라는 명령을 내려 처형하였던 것이다.

 관료세력의 일각에서는 세자의 위와 같은 움직임을 뒷받침하거나 자기 세력 확장의 기회로 이용하려 한 인물들이 있었다. 지평 睦台錫은 대리청정이 시작된 직후인 순조 27년 3월에 上書하여 주위의 가까운 인물을 함부로 신임하지 말 것을 건의하고 송시열의 사대론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 노론의 명분을 위협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세자는 ‘부모의 나라’ 明의 사정을 함부로 인용했다는 죄를 들어 유배하였지만,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곧 그를 풀어주려 한 것을 보면 군왕의 독자적인 귄위를 강조하는 논리에 상당히 동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29년 8월에 대사간 李寅溥는 ‘사람을 쓰는 데 士類와 淸議를 중시하고 임금이 국정의 절대적인 중심을 이루는 會極歸極의 道를 이루라’고 건의하였다. 이 상서는 김교근이 한창 공격받을 때 나왔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世臣도 복을 누릴 수 있다는 표현에 나타나듯이 당시의 권력 가문을 크게 의식하면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시킬 것을 주장한 것이었으며, ‘회극귀극의 도’란 영조나 정조가 추진했던 탕평책의 기본 정신에 해당하는 이념이었다.

 이 시기 새로 결집된 정치세력의 드러난 중심 인물은 金鏴였다. 그는 순조 8년부터 12년까지의 순조의 국정 주도 노력을 뒷받침했으며 민생문제에 대한 공로를 평가받은 김재찬의 조카인 동시에 한용구의 사위로서, 순조로부터도 그 가족 관계에 따른 호의를 받고 있었다. 그는 시강원의 관인으로 세자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으며, 청정이 시작된 직후에 대사성이 된 후 27년 윤5월에는 부제조로 비변사에 들어가고 이조참의·규장각 부제학·이조참판·홍문관 제학·판의금·호판·공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병조판서, 29년 7월에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권 행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등 세자의 권위를 업고 국정에 큰 세력을 행사하였다. 세자가 급서한 후 김노에게 쏟아진 ‘세자의 政事와 명령이 모두 그의 뜻에 의한 것이며, 세자의 뜻을 가장하여 남들을 위협하였다’는 비판이나, ‘언행에 신하의 분수가 없고 임금의 존엄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조정 신하들을 위협하고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여 자기 세력을 모았다’는 공격들에서 그러한 상황이 드러난다. 이 김노가 세자 대리청정기 새 권력집단 결집의 중심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洪起燮이 김노와 정치활동을 같이하였다. 그는 세자가 죽자 가장 먼저 배척을 받기 시작한 인물이며 후에는 김노의 무리로서 벽파세력의 상소를 사주하였다고 공격받았다. 한편 위에서 서술한 대로 군주의 권한을 강조한 상서를 올린 이인부도 그들의 일파이며 이인부의 상서는 김노 세력의 강화를 노린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리고 金魯敬 또한 그들의 일파라고 지목받았다. 그는 세자가 죽은 다음 김노 등에 비해 뒤늦게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고, 김노의 위협을 받아 그들 세력에 가담했다는 내용 등으로 보아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던 듯하나 어느 정도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고 있었음은 틀림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김노·이인부·홍기섭·김노경 등이 세자가 죽은 뒤 이른바 네 간신(四奸)으로 불려졌으며, ‘朋比’라고 공격받았다. 그 외에 李止淵·趙秉鉉 등이 그 무리로 한데 묶여 공격받는 것을 보아, 비록 그러한 공격을 한 申允祿이 순조에 의해서 처벌을 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부인되었으나, 이지연·조병현 등도 김노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거나 적어도 김조순 가문 세력에 맞서는 부분이 상당히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지연·이기연 형제가 헌종 6년(1840) 10월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에 의하여 숙청당할 때, ‘세자 대리청정기에 조정 일을 함부로 한 익종의 죄인’이라는 죄명을 쓰게 되는 것도 그러한 사정을 가리킨다. 또한 세자는 정조대의 규장각신을 우대한다는 명분으로, 1806년 벽파세력의 몰락과 함께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徐有榘를 순조 28년 8월에 正卿으로 뽑아 올리기도 하였다.382)서유구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유봉학, 앞의 글, 28쪽 참조.

 김노 등의 인물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정치의 이면에서는 효명세자의 처가인 조만영가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었던 듯하다. 세자는 대리청정하던 해 윤5월에 조만영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였으며, 8월에는 선혜청 제조에 들어가게 하여 대리청정기의 거의 모든 기간 재직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처가에 군사력과 재정의 두 중심 기관에 대한 큰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 선혜청과 훈련도감에 새로 주전한 돈 733,600냥과 利條 20만 냥을 소속시켜 재정을 강화시켰다. 개인간의 관계를 보더라도, 김노와 함께 세력을 모은 홍기섭은 趙曮의 외손자로서 조만영의 고종사촌이었다. 김노 세력의 일원으로 공격받은 이지연도 조만영 집안과 밀접한 입장에 있었고, 뒷날 헌종 연간에 풍양 조씨 가문과 권력의 부침을 함께 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김노를 중심으로 한 이 시기의 권력 집단은 자신들을 ‘士類’, 자신들의 주장을 ‘淸議’라고 하여 기존 집권세력과 구별되는 성격을 강조하면서 세력을 부식하려 하였다. 앞에 소개한 이인부의 상소에서 사류와 청의를 강조하였거니와, 세자 사후의 그들에 대한 공격에서도 ‘사류와 청의를 칭하여 임금을 속이고 조정을 위협하였다’는 점이 중심 죄목으로 지목되었다. 김노경에게도 사류를 칭하였다는 사실 자체를 비판하는 공격이 뒤따랐다. 김노가 본래 ‘淸素한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도 그러한 표방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며, ‘淸素의 가풍을 등졌다’는 홍기섭에 대한 뒷날의 공격 역시 그가 사류와 청의를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반증한다.

 다만 이들도 노론 시파의 논리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서술한 신의학의 상서와 같은 경우는 분명히 순조 초년 벽파의 논리를 답습하고 있으나, 세자 사후 김노 등에 대한 공격에서도 김노 세력의 하나인 이인부의 상소가 신의학의 상소를 초래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의 입장이 벽파세력과 같은 것이라는 논리를 개진하고 있을 뿐, 그들의 주장이 직접 신의학의 상서에 나타난 것으로 주장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순조 초년 김달순과 이경신의 옥사를 통해 경주 김씨 김구주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벽파세력이 거의 완전하게 몰락해 버린 후에 조정에서 정치활동을 해 온 당시의 인물들 사이에서 벽파의 논리는 이미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관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의 동향이 쉽게 나타나는 것은 호조의 장악이었다. 대리청정 일년 만인 순조 28년(1828) 5월 이후 세자가 죽을 때까지 호조판서직은 김교근이 한달간 재직한 것을 제외하면 김노경·김노·조만영이 맡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자 사후 김노경·김노가 호조 또는 선혜청의 재정을 이용하여 사리를 취했다는 공격이 행하여진 것으로 보아, 그들은 호조와 선혜청을 통하여 정치 권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자 대리청정기 김노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력 집단 결집의 움직임은 대리청정이 시작된 직후 매우 급박하게 일어났다. 김노경이 당시에 크게 겁을 내어 그들 세력에 합류했다는 훗날의 공격이 그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력의 확장이 급하게 이루어졌던 것과 같이 이들 세력은 세자가 급서함으로써 일시에 와해되었다. 세자가 죽은 뒤 김노 등을 공격하는 쪽에서는 세자가 순조 29년경에 이미 마음을 돌려 이들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고 함으로써 자기들의 행동을 합리화하였으나, 세자가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이들이 실세하기 시작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다.

 이와 같이 순조 27년부터 30년 5월까지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김조순 가문 중심의 집권자들을 견제하며 자신의 주도권을 강력히 행사하려 한 시기이다. 그러한 세자의 노력은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지 않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권력의 새로운 인적 기반을 조성하려는 방향으로 나타났고, 조정 내에서도 김노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력 집단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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