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2. 세도정치의 전개
  • 1) 순조대의 세도정치
  • (5) 순조 친정 말기(순조 30년 6월∼34년)

(5) 순조 친정 말기(순조 30년 6월∼34년)

 순조 30년 5월에 대리청정 중이던 세자가 사망하자 내의원 제조를 맡았던 홍기섭과 김노에 대한 책임 추궁을 시작으로 세자의 청정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인물들에 대한 공격이 쏟아졌다. 尹錫永은 임금을 속이고 조정을 위협한 이인부의 상서와 의리를 뒤집으려 한 신의학 상서의 배후 조정자가 바로 그들이며, 세자의 권위를 업고 조정 신하들을 위협했다고 공격하였다. 특히 그들이 士類를 표방한 것은 金漢耈·김한록·김종수·심환지 등의 벽파를 이어받은 것이라 공격하였으며 그것이 신의학의 상소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6월의 홍문관 상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상소들이 순조 초년 순조와 김조순 딸의 결혼을 막으려 한 권유의 상소에 이어지는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김노·홍기섭·이인부는 ‘朋比로서 서로 어울렸다’고 공격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격의 결과 김노·김노경·홍기섭 등이 유배당하고 이인부는 방귀전리되었다. 더 나아가 尹尙度는 박종훈과 申緯, 무신인 柳相亮까지 공격하였다. 이것은 김조순 가문의 金陽淳의 조종에 의한 무고로서, 세자와 국왕의 권위를 능멸했다는 순조의 단호한 태도에 의해 윤상도가 유배당하는 것으로 일단 끝났으나 김조순 가문의 경쟁세력에 대한 견제 활동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정쟁이 일사불란하게 일어난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김조순의 7촌 조카인 金敎根 부자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그가 김노경과 결탁하였다는 비난이 있었는가 하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신윤록·윤상도는 이지연·조병현·박종훈과 같은 인물들까지 김노의 무리라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 때 이지연은 판윤에 임명되는 등 정치적 타격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공격한 인물들이 무고한 인물을 공격한다는 반격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 때 김노 등을 축출하는 데에는 김조순 스스로가 긴밀히 참여하였다. 그는 대사헌 權丕應으로부터 김노를 공격하는 상소 초본을 먼저 받아 보고 있었음이 확인되며, 그 동안 김노 등의 활동을 견제하지 못한 관인들을 직접 나서서 공격하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에 김유근을 공격하여 유배된 상태에서 효명세자의 방송 명령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던 趙璟鎭을 방송하는 데 찬성하고, 김교근을 공격하였던 심영석과 심영석을 두둔한 韓鎭㦿을 풀어 주자고 건의하여 자기 세력의 여유를 과시하고 김노 등에 대한 공격이 정당한 것임을 분식하였다.

 세력을 회복한 김조순 가문은 순조 33년(1832) 4월 김조순이 죽자 그의 아들 김유근이 뒤를 이어 그 정치 집단의 중심을 이루었음이≪헌종실록≫에 공식적으로 언명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김조순 가문은 조만영 가문과의 협력 관계 위에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안정시켜 갔다. 순조 33년 4월 예조판서 조만영이 요청하여 김조순을 정조의 묘정에 배향할 것이 결정되었고, 10월에는 김조순을 위한 사당을 짓게 해달라는 성균관 유생들의 요청을 허락하고 사액하였다. 그것과 짝하여 다음해 4월에는 가문의 요청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려 주는 조치가 조득영에게 내려졌는데, 그것은 김조순 가문 계열의 정승인 심상규의 건의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정치 질서를 개편하려는 노력이 실제로 커다란 변화를 이룩하지는 못하였므로, 이 때에도 김노 등을 중앙 정계에서 축출하는 것 이상의 국정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왕실의 두 외척 가문인 김조순 가문과 조만영 가문의 협력 및 균형 관계가 큰 원인이었지만, 순조의 역할도 크게 작용하였다. 본래 세자의 대리청정과 국정 주도 뒤에는 순조의 뜻이 있었던 만큼 그는 이 시기의 정쟁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조정하였다. 공격의 전면에 나선 宋成龍에 대해 경황이 없는 틈을 타서 분쟁을 키운다는 죄목을 들어 사헌부 관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아주 박탈하고, 특히 이지연과 조병현을 끌어 공격한 신윤록에 대해서는 유배의 처벌을 내렸다. 또한 김노에 대해서 그 가문의 공로를 내세워 신하들의 계속되는 공격을 유배에 그치는 정도로 막았으며, 이인부에 대해서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放歸田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신의학의 상소가 홍기섭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 근거가 되고 있는 포도대장 李惟秀의 행적을 조사하여 무관함을 밝히고 이유수를 풀어주었다. 그런데도 계속되는 공격에 대해서는 30년 11월에 간절한 비답을 내리고 김교근·김병조 부자와 李鶴秀를 放逐鄕里하였는데, 이후에 양사의 김노경 등에 대한 공격이 한두 차례 더 있었으나 대개 그 비답을 계기로 하여 논란은 종식되었다.

 순조는 32년 7월에 세자 대리청정기의 전횡을 이유로 유배당한 김노·이인부와, 그 공격에 앞장선 宋成龍·신윤록, 그리고 김교근·김병조 부자에 대하여 방송 명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대간의 반대로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으나 8월에 양사가 그 주장을 철회하여 김노·이인부·김교근 부자가 풀림으로써 사태는 만 2년만에 일단락되었다. 김노경도 순조 33년 9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효명세자 청정기의 정책이 실패한 대가로 순조는 김조순 계열의 남공철이나 심상규에게 극도로 자기를 낮추고서야 그들의 협력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 순조는 그들에 대해 ‘대대로 친교를 가진 사이’라고, 또는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까지 말하여야 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순조는 “신하들을 만나는 일이 극히 드물고 국무를 상의하는 일을 들어볼 수가 없으며 신하들의 보고 사항에 대해서는 예에 따라 재가를 내릴 뿐 한 마디 문답하는 일도 없다”는 좌의정 洪奭周의 지적이나 “국정의 온갖 손실이 임금의 어질고 용서하는 마음이 너무 심하며 침묵을 지키는 것이 너무 지나친 데에서 나온다”는 교리 柳致明의 상소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더 이상 국정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지니지 못하고 신하들과 정사를 멀리하는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정치적 분란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진행되었다. 즉 조만영 또는 그 세력권의 인물들이 세자 청정기의 정국 개편 움직임에서 적지 않게 중요한 몫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김노 세력에 가담한 김노경을 공격하는 경우에는 그가 조만영 가문과의 국혼에 반대하였다는 점을 죄목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여기에는 우선 가문간의 역학관계가 전제되었겠지만, 김조순 가문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외척으로서의 권위를 조만영 등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을 보여준다. 결국 정쟁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기반을 훼손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만큼 지배계층과 그 안의 집권세력 일부의 일만으로 그쳤던 것이다.

 세자가 죽은 후 다시 순조의 친정이 행해진 이 때는, 가장 강력한 국왕 외척 집단인 김조순 가문이 앞서 익종의 대리청정기에 조성된 새로운 정치세력을 도태하고 자기들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 질서를 재정립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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