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1. 삼정의 문란
  • 1) 전세제도의 문란
  • (2) 전정의 부실

(2) 전정의 부실

 조선 후기 사적인 토지소유권에 의한 경제적인 관계가 점차 강화되고 竝作半收制를 통하여 소작경영이 이루어지면서 지주전호제는 한층 강화되어 대토지소유가 나타났다. 따라서 농민들은 점차 소토지소유 내지 전호로서 존재하는 길 혹은 유리도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17세기 양란을 거친 후 더욱 촉진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가장 시급한 것으로 지적된 것은 토지를 측량하는 量田事業이었다. 양전에 대한 규정은 이미 국초부터 있었다. ≪經國大典≫戶典 양전조에 의하면 전세를 부과하기 위한 작업으로 20년마다 양전을 실시한 후 토지대장(量案)을 작성하여 호조 외에도 해당 도 및 읍에 보관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었다. 이후 양전을 통하여 파악된 총결수 및 해당 지역의 전결수를 기준으로 그 해의 농사 사정을 반영하여, 실제 경작되고 있는 實結에 전결세를 부과하도록 하는 규정들이 만들어졌다.

 16세기 이후 특히 전쟁 직후인 선조 34년(1601)의 전결수는 약 30만 결 정도였다. 그것은 임란 전의 151만 결에 비하면 1/5 정도에 불과했다. 국가의 수입이 토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현상은 곧 국가재정의 파탄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위기를 극복하고 적어도 국가를 운영할 재정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사업이었다. 국가는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이전의 전결수를 회복하려 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양전을 새로 시행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경지를 확대하기 위한 개간 장려책을 강구하였으며, 그에 따른 면세규정도 마련하였다.

 선조 37년에 전국적인 양전이 시작되었으며, 이어 실시된 광해군 3년(1611)의 양전의 결과 時起田 결수는 54여만 결 정도로 늘어났다. 그리고 인조 12년(1634, 甲戌量田) 삼남의 양전 이후에 전국의 전결수는 점차 임란 전의 상태를 회복하였다. 몇 차례의 전국적인 양전을 거치면서 세원을 마련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결수 확보책은 어느 정도 주효하였다.

 한편 양전의 방식 외에도 경지 개간에 대한 면세규정을 마련함으로써 전결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陳田 개간에 대하여 인조 19년부터 3년을 면세하도록 하였고, 효종 4년(1653)에는 ‘隨起隨稅’ 즉 경작할 때에 한하여 세금을 걷도록 하였다. 그리고 閑廣地 개간은 3년 면세하다가, 인조 25년부터 수기수세하였다. 海澤地 개간에 대해서도 17세기 초 이래 3년의 면세규정을 두었다. 국가는 이로써 경작지를 상당수 확보하였다. 이는 면세되던 토지를 수기수세의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수세지를 늘려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순조대에는 10여만 결이 증가하였고, 시기전도 1만 결 정도 늘어났다.394)金鎭鳳,<田稅制의 改編>(≪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81), 118∼119쪽의 내용과 표를 참조. 이처럼 양전과 면세규정을 통하여 일정한 수준의 전결수가 확보되었다.

 한편 전결세를 수취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인조 12년에 새로운 전결세 수취 방식으로 정해진 永定法이 그것이다. 영정법의 실시로 토지의 등급은 고정되었으며 전세도 일정하게 되었다. 영정법은 이전의 연분9등제를 폐기하고 전세액의 감하를 인정한 것인데, 대체로 연분9등제하에서의 하하(下之下)로 고정시켜 4두로 정액화한 조처였다. 아울러 흉년일 경우 일부 지역에 한하여 전세나 대동세 부담량의 일부를 면제하는 조치도 취하였다.

 영정법은 지주전호제의 전개를 인정한 위에서, 인조 12년(1634) 이전의 양전에서 문제가 되었던 전결의 隱漏현상과 전결에 따른 역 부담의 편중을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대동법의 실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영정법은 조세 부담의 불균형을 시정한 것은 아니었다. 결부법의 존속과 함께 전분법이 여전히 잔존하였고, 연분마저도 완전히 혁파되지 않았으므로 수세 과정에서의 폐단은 여전하였다.

 효종 4년(1653)에 수세제도의 변동과 관련하여 양전법이 개정되었다. 이전에 사용하던 隨等異尺法은 폐지되고, 통일된 기준척으로 1등 田尺을 삼되, 결부의 크기를 달리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즉 면적을 표준으로 삼아 동일 면적에서의 수확량을 계산하고, 1등전은 100負, 6등전을 25부로 정하여 각각의 등급을 나누었다. 그러나 기존의 방식에 비해 양전법이 달라졌으나 전결수 혹은 수세량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전결세의 수취는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허술하게 진행되었다.≪경국대전≫에 20년마다 양전을 실시토록 규정되었으나, 정기적이고 전국적인 양전은 고사하고 삼남을 중심으로 한 양전마저도 선조 37년(1604), 광해군 4년(1612), 인조 12년, 숙종 45년(1719) 등 4차례 실시되는 것에 그쳤다. 이후에도 법규정에 의한 정기적인 양전은 실행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양전이 중단되는 사례가 많았다. 이는 세를 부과하기 위한 기초 자료의 부실을 의미하였다. 게다가 양전을 시행하더라도 임시 변통적이었고, 부분적 내지 소규모로 실시되는 정도에 그쳤다. 게다가 이서들이 전답 등급을 조작하는 등 여러 형태의 농간을 부려 양전의 부실에 따른 폐단들은 더욱 커졌다.

 이처럼 법규정대로 양전이 실시되지 못한 것은 중앙의 양반 관료 혹은 향촌사회의 토호·부민·이서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혹은 수세과정에서 부당하게 취하고 있는 자들로서 양전으로 말미암아 불이익을 지거나 중간 이득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을 겉으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들이 양전을 반대하면서 표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대체로 경작지의 모양이 바뀌거나, 양전때의 부정 협잡의 문제 및 양전에 따른 경비의 과다함 등이었다. 결국 양전은 실시되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세의 부과가 불공정하게 이루어져 농민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농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설사 중앙 정부가 均賦均役을 내세워 양전을 실시하였다 하더라도 지방의 수령이나 혹은 이서들이 양전 과정에서 마음대로 농간을 부려 전답의 등급에 차이를 둠으로써 공정성을 잃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 정부로서는 양전을 행할 경우 전결을 다소 늘릴 수는 있었지만, 오히려 민원은 커지고 인심을 잃었다.395)金容燮,<量案의 硏究>(≪朝鮮後期農業史硏究≫Ⅰ, 一潮閣, 1970).

 한편 토지는 수세를 위한 목적하에서 여러 형태로 구분되었다. 正田·續田·降等田·降續田ㆍ加耕田·火田 등이 그것이다.396)正田은 해마다 항상 경작되는 토지이며, 續田은 경작하기도 하고 휴경하기도 하는 토지로서 경작할 때만 과세되는 토지이다. 降等田은 토질이 저하되어 토지의 등급이 낮아져 세율이 감해진 토지이며, 降續田은 강등전으로서 속전처럼 이용되는 토지로 경작할 때만 과세되는 토지이다. 加耕田은 양전시에 파악되지 않은 토지를 개간하여 장부에 새로이 등재하고 새롭게 세율을 정한 토지를 말하며, 火田은 처녀지나 휴경지를 태워서 새로이 개간한 토지를 말한다. 이러한 구분은 양전과 연관되어 새로이 재분류되었다. 이 때 양전 과정에서 파악된 토지를 元帳付라 하며, 그 중에서 수세 대상인 토지는 實結, 면세를 받을 수 있는 토지는 免稅田·給災田 등으로 구분되었다.

 실결은 수세 대상이었기 때문에 국가재정과 곧바로 연결되었고 국가 수입의 측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실결의 확보가 곧 국가재정의 호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실결에 대하여 전세가 제대로 부과되지 않고, 오히려 실결 중에서도 면세결로 처리되는 것이 증가하게 되어 국가의 재정 부족 현상은 여전하였다.

 면세전인 宮房田·屯田·各樣廟位田 등이 해마다 설치되었고, 이들은 증가하는 추세였다.397)安秉珆,<朝鮮後期の土地所有>(≪朝鮮近代經濟史硏究≫, 日本評論社, 1975). 이외에도 급재전으로서 凶荒·災難 혹은 지배층의 수탈로 농민들이 전토를 경작 혹은 개간하지 않고 遊離 도망하여 발생하는 流來陳荒田이 있었으며, 敬差官이나 都事가 檢田核審하여 결정하는 當年全災田 등 각종 면세 혜택을 받는 토지들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양전시에 토지의 일부를 누락시켜 조세를 착복하기 위한 隱結, 실제의 토지 면적보다 축소하여 양안에 기재한 후 남는 부분에 대해 개별적으로 곡물을 수취하는 餘結(누결) 등 탈세를 위한 지방 관리의 작폐 내지 지주 전호의 불법적인 수단을 통하여 탈세되는 전결들이 많았다. 조선 후기에 전결수가 증가하는 데 비해 실결이 감소한 것은 면세전 외에도 隱漏結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면세전 내지 은루결 등의 탈세전의 증가는 국가재정의 감소 및 양전에 의한 수취의 가혹성을 초래하였다. 또한 급재전 중에서 당년전재전 이외의 재상전 감세 조항을 폐기함으로써 세제는 더욱 가혹하였다.

 때로 이를 완화하기 위해 왕명으로 세목별 감면세와 분수급재를 실시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각 읍의 수령과 향리가 서로 결탁하여 은여결을 만들어 사적인 이익을 챙기는 폐단이 많았다.

 중앙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결세의 확보가 곧 실결의 확보라고 생각하였다. 실결은 전결세의 면제 대상인 災結에 따라 달라졌으므로 중앙 정부는 급재 규정을 마련하였다.≪속대전≫에 의하면, 매년 年分事目에 의거하여 급재 대상이 되는 재해의 종류를 지정하고, 해당 토지의 전결세를 면제토록 하였다. 이 규정에 의하면 실결은 재결을 확정한 후, 전체 전결에서 재결을 제함으로써 확정되었다.

 호조는≪속대전≫의 규정에 의하여 연분사목에 의거, 재해의 종류를 지정하였으며, 지방의 수령들은 현지를 踏驗하여 그 결과를 관찰사를 통하여 호조에 보고하였다.398)≪續大典≫戶典, 收稅. 이후 호조는 관찰사의 보고에 기초하여 경차관이나 도사를 파견하여 답험한 후, 그 결과에 따라 세액을 정하였다. 이로써 수세실결을 확정하는 과정은 종료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특히 답험 과정에는 문제의 소지가 많았다. 경차관이나 도사들이 파견되었으나, 그들은 납세결수를 늘이는 데 급급하였고 답험에 필요한 비용도 해당 고을에서 충당토록 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민들의 부담을 증가시켰다. 정부는 답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없애기 위하여 경차관을 파견하는 대신에, 감사가 답험을 책임지도록 하고 급재의 전과정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比摠制를 실시하는 기초가 되었다.

 비총법은 숙종 20년(1694)을 전후하여 시행되어, 숙종 26년 이후 본격적으로 실시되었고, 영조 36년(1760)에는 법제화되었다.399)≪大典通編≫ 戶典 收稅.
≪萬機要覽≫ 財用編 2, 年分.
李哲成,<18세기 田稅 比摠制의 실시와 그 성격>(≪韓國史硏究≫ 81, 1993), 83쪽에 의하면 비총제는 17세기 말 이후 定限給灾方式과 比年及灾方式 그리고 收捧單子法 등 다양한 방법이 적용되다가 1730년대 관행으로 정착되고 영조 36년(1760)에 법제화되었다 한다.
해마다 호조에서 연분사목을 반포하여 재결수와 실결수를 정하였으며, 수세 총액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총액을 정함으로써 중앙 재정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강한 것이었다. 중앙 정부는 이 때 모든 수세 과정에 간섭하지는 않았다. 급재를 비롯한 향촌사회에서의 수세 과정은 그 지역의 관행에 맡기고 있었다. 단 감사가 답험을 책임졌으며, 이하 향촌사회에서는 行審(답험)과 俵災의 과정을 거쳐서 급재를 실시하였다. 이 때 행심은 재해를 당한 토지와 새로 경작된 토지 등을 파악하는 執災와 집재한 내용을 관에 보고하는 報災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400)李榮薰,<朝鮮後期 八結作夫制에 대한 硏究>(≪韓國史硏究≫29, 1980), 77∼178쪽에서는 수령이 행심의 주체이지만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구조를 간략히 서술하고, 그들이 적당주의에 의하여 처신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때 행심은 향촌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시행되었으며, 시행의 주체는 吏廳의 監官이나 書員輩 혹은 鄕廳의 風憲·約正들이었다. 이후 표재가 실시되어 호조에서 각 도마다 정해진 재결수와 실결수를 나누어 주었다.

 비총법하에서의 각 지방의 재실 상태를 구분하는 농형은 稍實·之次·尤甚으로 3등분되었다.401)最尤甚을 첨가하여 4등급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비총법은 이러한 등급 구분을 토대로 도별 군현별로 전체 급재량의 수량을 상당년의 수량으로 미리 결정하고 나머지를 실결로 하여 전결세를 상납케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면단위에서 리단위까지 적용되었기 때문에 면과 리는 하나의 수세 단위가 되었다.402)鄭善男,<18·19세기 田結稅의 收取制度와 그 運營>(≪韓國史論≫22, 서울大, 1990).

 그런데 호조가 정해 주는 比年은 그 해의 실제 작황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그에 따른 폐단들이 지적되었다. 답험과 급재과정에서 각종 부정이 발생할 뿐 아니라, 토호ㆍ부민ㆍ양반들이 부담해야 할 것들이 빈궁한 농민에게 전가되었고, 게다가 깃기(衿記)를 작성하고 난 후에 考卜 즉 결부의 변동을 실제로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고복채를 받는 등 전결세를 둘러싼 폐단들이 발생하였다.403)鄭善男, 위의 글. 이는 토지소유관계의 모순으로 인해 생긴 계급간의 이해관계의 차이가 심화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한편 비총법하에서도 앞 시기와 마찬가지로 양전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경계의 파악과 전품의 파악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서층의 부정은 여전하여, 전결세를 남징하거나, 백지징세·누세·탈세 등의 행위들이 지적되고 있었다. 게다가 은결의 증가로 結摠도 감소하고 있었다.404)金容燮,<哲宗朝의 應旨三政疏와 「三政釐正策」>(≪增補版韓國近代農業史硏究≫上, 一潮閣, 1984).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