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1. 삼정의 문란
  • 2) 군역제의 해이
  • (1) 군역제의 변화

(1) 군역제의 변화

 軍役은 職役과 마찬가지로 身役이다. 신역은 개별적으로 파악된 人丁에 대하여 특정한 역을 부과하는 것인데, 군역은 그 중 군사 업무와 주로 관련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군역이 요역화되면서 군역을 진 자들은 그 외의 업무로 국가의 토목·농경 혹은 어로 등의 생산 활동 및 운송 등도 담당해야 했다.

 군역은 주로 16세 이하 60세 미만의 양인을 대상으로 부과되었다.409)≪經國大典≫兵典, 免役을 보면 군사로서 면역되는 자는 나이 60세 이상인 자 및 병에 걸린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에 군역은 良役이라고도 하였다. 국가는 양역을 져야 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대장을 작성하여 편입시켰으며, 조선 초에는 양반가의 자제라 하더라도 군역을 지게 하여 해당 관청에 속하도록 하였다. 군역을 진 자들은 正軍과 保人(혹은 奉足이라고 함)으로 구성되었다. 정군들은 중앙과 지방의 각 군영에 입역하도록 하고, 입역된 자들은 番次에 의해 上番내지 留防하였다. 한편 보인들은 정군을 경제적으로 보조하기 위하여 保布를 부담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군사제도의 개정으로 군역제의 운영도 달라졌다. 五衛制를 근간으로 하던 조선 전기의 군역제는 임란 이후에 都城 중심적인 군사 체제인 五軍營體制가 성립하면서 달라졌다. 오위제하의 戶와 保는 오군영제하에서 거의 收布軍化되었으며, 군역제는 병농일치의 개병제에서 병농분리의 용병제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 군역제는 용병제를 추진하여 精兵을 양성하려는 것이었으나, 재정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番上兵과 용병이 함께 편성되기도 하였다. 이 때 병역을 지지 않는 자들은 정해진 액수의 포를 바쳐서 그 의무를 대신하였다. 이러한 군역제의 변화는 사회경제적인 변동과 함께 국가 정책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으며, 군역을 진 양역층들의 대응 또한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편 국가는 군포의 징수와 관련,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군현을 단위로 총액제의 운영 원리를 적용하였다. 이 때의 과제는 군역을 균평하게 부과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군역의 폐단과 관련된 것으로 국가의 군역 부과에 대한 군역 대상자들의 대응과 맞물려 있었다.

 군역제의 운영 과정에서 군역 대상자들은 양인 계층 내에서도 구별되어 지배층인 양반들은 제외되고 있었다. 그들도 처음부터 군역을 면제받은 것은 아니었다. 양반들은 명분상이나마 조선 초에 과전법에 의하여 그들에게 분급된 토지에 상응하는 군역 혹은 직역을 부담하였다. 그러나 과전법 체제가 무너지면서 양반들은 군역에 응하지 않았으며, 국가도 양반들에게 군역을 강요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양반들은 군역의 부담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게다가 군역은 양역이었기 때문에 양반들이 거느리던 천예 등도 군역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때문에 양인 장정들에게 군역이 집중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과중한 군역 부담에 따른 양역의 폐단이 발생하였다.

 良丁인 대부분의 농민들은 과도하고 가혹한 역으로 변해버린 군역을 져야 했으나, 그 중에서 군역을 기피(避役)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정부는 피역자들을 모두 조사하여 군정으로 채움으로써 피역자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군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안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군역제는 양인들에게 군역을 지우는 대신에 군역세로서 포를 걷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6세기경 正軍에게도 직접적인 군역 대신에 포를 걷는 放軍收布制로 전환하면서 기존의 군역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중종 36년(1541)에는 軍籍收布制가 정식화되었다. 이로써 군역의 운영은 ‘停番收布’라 하여, 지방 수령이 군역 부담자로부터 番上을 정지하는 대신 번상가로 포를 징수하였다. 이 때 걷혀진 포를 중앙에 보내면 병조는 군사력이 필요한 각 지방에 일정한 양을 보내어 군인을 고용하거나(雇立), 혹은 상비병제를 채택하도록 하였다. 이 방식은 기존 군역제를 군포제로 운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포제로의 변화는 군제의 운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임란을 거치면서 훈련도감의 설치로 기존의 5위제가 점차 무너지고, 16세기 말에서 17세기 후반에 걸쳐 중앙에는 5군영체제가 성립하였다.410)중앙의 5군영체제에 비하여, 지방에는 束伍軍이 있으며 賤隷계층으로 이루어졌고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도록 하였다. 훈련도감은 이미 부분적인 급료병제를 실시하였고, 5군영제하에서도 급료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411)金鐘洙,<17세기 軍役制의 推移와 改革論>(≪韓國史論≫22, 서울大, 1990)에서는 17세기 5군영이 설립될 때까지 조선 전기의 병농일치제적인 군역제와 군영제의 급료병제적인 군역제의 병존을 살피고 있다. 훈련도감을 설치한 후 국가는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군대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대책으로 良保에게 이를 부담하도록 하였고, 이후에 설치된 어영청·수어청·총융청·금위영 등에서도 징포하기 시작하였다.412)≪均役事實≫ 均役事目.

 그러나 군역은 종류에 따라 부담의 차이가 많았으며, 또한 군포를 내야 하는 양인들조차도 균일한 액수를 내지 않았다. 군역에는 고된 역과 헐한 역이 있었다. 게다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아들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규정 외로 사모속을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사모속은 다른 역보다 헐하였으므로 민호들이 앞을 다투어 편입하려 하였다.

 良丁들은 경제적인 처지가 불안정하였으나, 대체로 1년에 포 2疋을 내는 납포군으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군포를 징수하는 기관은 5군영만이 아니라 중앙의 관청 혹은 지방의 감영·병영 등도 각각 군포를 배당받아 거두었다. 즉 군포의 징수는 일원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다양한 통로로 거두어지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양정들은 때로 규정보다 몇 배의 군역을 부담해야만 했다. 게다가 양정들이 부담하는 군역도 반드시 2필역으로만 고정되지 않아 2필 혹은 3필을 내야 하는 등 일률적이지 못했다.

 한편 정부는 재정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군포의 액수를 증가시켰으며, 군포를 수납하는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한 수령 아전들도 농간과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양역의 피해는 더욱 극심하였다. 17세기 이후의 인징·족징과 함께 백골징포·황구첨정 등의 폐해는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미 양정 중에서도 양반 사대부가의 자제들은 대부분 군역에서 벗어났으나, 농민들은 과도한 군역의 부담과 그에 따른 폐단에 대비하여 자구책을 마련하려 하였다. 농민들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는 신분 변동을 통해 양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 즉 피역의 방법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양역에 苦重과 輕歇의 차등이 있음을 이용하여 보다 歇한 역으로 투속하는 방법, 즉 역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413)鄭演植,<17ㆍ18세기 良役均一化政策의 推移>(≪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우선 신분 변동을 통한 피역의 방법은 일반 농민들 중에서도 경제력을 갖춘 富民이 주로 이용하였다. 그들은 국가에 곡식을 바쳐(納粟) 양역에서 빠져나가거나, 校生ㆍ軍官ㆍ忠義衛로의 冒屬 혹은 ‘冒稱幼學’의 방법을 택하였으며, 조상을 위조하는 방법(換父易祖) 등으로 양반 신분을 칭하여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농민들이 신분 변동을 이용한 또다른 형태는 스스로 奴로 입속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들이 피역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농민들은 군역으로 말미암은 부담이 너무 과중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피하려고 하였다. 군역을 짐으로써 자칫 농민들 중에서 파산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경제적인 측면 외에도 군역을 지는 자에 대한 사회적인 대우와 지위가 열악하였기 때문에 이를 피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군역 자체가 사회적으로도 천시되고 대대로 역을 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가능한 이를 피하려 하였다. 게다가 신분제의 격심한 변동으로 말미암아 양반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지고 있었으므로 군역을 탈피하려는 경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외에 과도한 양역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역의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 있었다. 이는 양역의 종류가 다양하고 그 부담도 각기 달랐으므로 그 중에서 가장 헐한 것을 찾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모속의 형태로 편입되는 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피역 현상과 군역 부과의 편중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로써 군역의 부담은 양인 중에서도 특히 소·빈농층들에게 집중되었고, 농민들의 유망 또한 격증하였다.

 군역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군역세 징수에 군총제를 적용하고 있었다. 정부는 각 기관의 필요 경비에 따라 군액을 정하고, 각 지방의 人丁과 民摠의 多寡와 군역의 緊歇을 고려하여 정액화하고 배정함으로써 군역 부담의 편차를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배정된 군액은 정부의 허락없이 변경할 수 없었고, 배정된 군역세도 지방의 군역민 전체가 공동책임하에 수납하여야 했다. 때문에 농민들은 궐액이 생겨도 세를 그대로 납부해야 했으며, 곳에 따라 공동책납에 대한 새로운 대처 방안이 모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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