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1. 삼정의 문란
  • 2) 군역제의 해이
  • (3) 군역제의 문란

(3) 군역제의 문란

 균역법 시행 이후에도 군역의 폐단은 여전하였다. 철종 13년(1862) 국왕의 책문에 답한 李象秀의 언급에 의하면 우선 군역의 폐단으로 軍籍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그는 군적이 텅비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그 원인으로 교활한 무리들이 도망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요인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고 병사를 키우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지만, 병사들에게 돈을 내게 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이며, 또한 전대에 없던 白骨徵布·黃口充丁 즉 이미 땅속에 묻혀서 죽어 버린 귀신들이 군역을 지거나,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束伍로 편입되는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총액제의 원리에 의하여 1丁이 빠졌을 때 이를 채워야 하는데, 오히려 재상들의 墓村이라든지, 校院의 齋生들이거나, 권세가들의 佃村, 혹은 사대부의 奴屬들은 그 안에서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군역제의 폐단이 나타난 것이라 하였다. 게다가 서리들은 이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으며, 수령들은 단지 빈 군적만 쥐고 있는 상태라고 지적하였다.422)李象秀,≪止吾堂集≫권 18, 雜著, 三政策. 반면에 힘이 없는 무리들로서 자신들의 처지를 알릴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한 자들은 이러한 군역을 계속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군역의 부담은 자연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이상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왕은 토지를 나누었어도 백성을 나누지 않았는데, 우리 나라의 사대부들은 이에 국가와 더불어 백성을 나누고 있다. 병기를 잡고 나라를 지키는 선비들로서 여기에서 빠진 자가 10에 6, 7은 되니 이것이 어찌 나라에 常憲이 있다고 하겠는가(李象秀,≪止吾堂集≫권 18, 雜著, 三政策).

 이처럼 군역 부담의 대상자로서 빠져나가는 자가 반을 넘을 정도로 군정의 폐단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국가의 방비가 허술해지고, 군기를 갖추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들은 대체적으로 일반민들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국가의 군정의 운영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군역의 폐해에 대해서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으로는 이보다 앞선 19세기 초반에 농민들이 직접적으로 입은 군역의 폐해를 생생하게 묘사한 다산 정약용의「哀絶陽」을 들 수 있다. 이 시는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군역이 너무 심하게 되자 남자가 된 것조차 원망을 하면서 자신의 성기를 도려내어서 군역을 피하고 싶어하는 한 농부의 애타는 모습을 다산이 실제로 목격하고 군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리고 군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농민들은 생활의 피폐함을 견디지 못하고 단순히 사회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실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이 많아졌다. 따라서 “근년 이래 부역이 많아지고 관리들은 탐학을 하니 民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가 없어서 모두가 난이 일어나기를 생각하고 있다”라고 하듯이,423)丁若鏞,≪牧民心書≫28, 兵典 應變. 군역을 비롯한 부역의 가중은 곧 농민들이 항쟁이 일어나기를 갈망할 정도까지 진전되었으며, 그러한 폐단이 전국 도처에서 일반적인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순조 초의 함경도 端川과 황해도 谷山의 농민항쟁은 군정의 폐단과도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후 철종 연간의 농민항쟁들도 이와 같은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부의 대책은 우선 농정의 문제, 부세문제 및 다른 부문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정조 10년(1786)의≪所懷謄錄≫, 정조 22년의<民隱疏>, 정조 22·23년의<農政疏>, 순조 9년(1811)의<各道民弊冊子>, 순조 11년의<各道陳弊冊子>등은 그러한 결과이다. 이는 求言敎·詢問·民隱에 대한 조사보고서의 형식으로 묶여진 것이다. 암행어사를 자주 파견한 것도 지방에 대한 감찰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군정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으로는 철종조 농민항쟁 기간에 민심 수습을 위한「三政釐正策」을 들 수 있으며, 이로써 정부의 정책은 좀더 구체화되었다.

 삼정이정책은 전정과 군정·환정에 관한 이정책으로서 정부는 이를 통하여 관료 및 지방의 지식인까지도 대책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군역제를 이정하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하지 않았다. 황구첨정·탈역·군역의 불균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으며, 단지 교원보솔이나 각청계방을 혁파하고 탈역을 막으려 하였다. 이 때 군역세를 수납하는 방법으로 口疤와 洞布制를 용인하고 있었다.424)≪壬戌錄≫,<釐正廳謄錄>軍政 윤8월 19일. 그러나 동포제는 전국적인 규모가 아니라 지방의 사정에 따라 편리한 대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나마 이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신분 계층간의 이해관계를 해소시켜야 했다. 특히 동포의 이름으로 양반들이 군포를 내게 하였을 때 시행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다.425)≪備邊司謄錄≫249책, 철종 13년 11월 15일. 그러나 이러한 동포제의 의미는 종래의 군역제의 해체를 초래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삼정이정책은 삼정이정청이 곧 해체되고 철종이 얼마되지 않아 죽자 실현불가능한 정책으로 남게 되었다. 다만 군정의 이정책은 고종의 즉위 후 대원군정권에 의해 변형된 형태이나마 호포제로 실시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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