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1. 삼정의 문란
  • 3) 환곡제의 변질
  • (1) 환곡제 운영

(1) 환곡제 운영

 還穀은 還上 혹은 糶糴 혹은 還餉이라고도 한다. 환곡은 진휼책의 하나로 춘궁기인 봄에 관청에서 농민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기인 가을에는 元穀과 함께 耗穀을 붙여서 거두었다. 이 때에 모곡은 원곡의 1/10(米 1石당 1.5斗)에 해당하는 이자의 형태로서 원곡이 줄어드는 것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환수하였다.426)耗穀이라 함은 쥐나 새들에 의해서 혹은 노적된 상태에서 상실되는 것을 보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환곡은 農糧을 대여하는 것 외에도 군향을 改色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모곡 중의 일부를 會錄하게 되면서 환곡은 단순히 진대를 위한 목적과는 달리 운영되게 되었다. 점차 회록이란 명목하에 호조에서 모곡의 1/10을 사용하게 되었고, 상평청에서도 재정을 확보하는 데 환곡의 모곡을 이용하였다. 이후 비변사·선혜청·균역청·常賑廳 등 서울의 각 아문(京司)과 외아문인 4都·監營 등의 각급 관청을 비롯한 軍營·軍鎭 등 여러 관청들도 회록하게 되었다. 이로써 환곡은 원곡의 耗失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국가의 재정수입에 중요한 항목으로 이용되고, 각 관청들은 환곡의 분급량을 늘려 갔기 때문에 환곡의 총량은 급격히 증가하였다.427)오일주,<朝鮮後期 國家財政과 還穀의 賦稅的 機能의 强化>(延世大 碩士學位論文, 1984).
鄭允炯,≪朝鮮王朝 後期의 財政改革과 還上問題≫(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85).

 軍用을 비롯한 邑用에서부터 營用·國用에까지 재정 부문에서 환곡을 이용한 모곡 수입이 차지하는 바는 매우 컸다. 각급 관아는 환곡의 총량을 늘리면서 모곡의 수입 증대를 꾀하였으므로 환곡의 양은 거의 1,000만 석에 달하였다. 이는 모곡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농민의 부담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추세와 함께 환곡 운영 과정에서 지방관청에서는 고리대적인 수탈을 동원하여 수입을 증대시켰다. 일반적인 이자율은 법제상으로 1/10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長利, 혹은 甲利라 하는 고리대와 다를 바 없는 5/10 이상의 모곡이 적용되기도 하였다. 환곡을 거둘 때 耗條 외에 다른 부세와 마찬가지로 看色米·落庭米·零米 등을 비롯한 다양한 수수료들이 첨가되었다. 이처럼 환곡에서 부가세 명목이 다양하게 설정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높아진 이자율에 의한 이익을 노리는 경우도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환곡을 정해진 기일 내에 갚지 못할 때에는 耗上加耗라 하여 이자율이 복리로 적용되어 고리대로서 작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환곡 운영주체에 의한 加分은 더욱 심해졌고 분급량은 늘어났다.

 환곡의 분급 비율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제한하는 제도로 ‘半留半分’의 원칙, 즉 창고에 전체 곡식의 반은 남겨 두고 반은 나누어 주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점차 무너지면서 창고의 곡식을 전량 분급하는 방식인 盡分을 비롯하여 一留三分·一留二分·二留一分·定式分給 등 다양한 형태의 분급 방식이 이용되었다. 환곡을 이용한 최대한의 수입을 확보하기 위하여 점차 분급 비율을 늘리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환곡은 양적인 측면이나 비율면에서도 전량분급화(盡分化)하는 추세를 보였다.

 한편 군현·영진을 단위로 일정한 양의 환곡을 확보하는 방식이 적용된 반면 환곡의 편재는 고르지 못하였다. 농민이 요구하는 양보다 환곡이 적어서 진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환곡이 과다하여 농민들이 필요 이상으로 환곡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환곡이 과다한 지역은 환곡을 효과적으로 분배하기 위하여 강제로 대여하였으며, 결국 부세와 다를 바 없는 환곡 운영이 이루어졌다. 이는 환곡의 성격이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

 환곡 분급 방식도 토지에 분급되는 結還, 호에 분급되는 戶還(作統 단위는 統還)과 마을 단위로 부과된 환곡에 대해 공동으로 마련하는 방식인 里還 등 각기 다른 형태의 분급 방식이 나타났다.428)梁晋碩,<18·19세기 還穀에 관한 硏究>(≪韓國史論≫21, 서울大, 1989). 이는 각 지방의 감사·수령들이 그 고을의 사정에 따라 환곡의 분급을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해당 민들에게 의견을 물어 보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최종적인 결정권은 감사나 수령에게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환곡 분급 방식을 이용하여 필요한 환곡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한편으로 이를 이용하여 이득을 얻는 자도 있었다.

 환곡 운영에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편승한 화폐납의 도입이다. 화폐를 대여하고 곡물을 받는 錢還과 환곡의 代錢納을 허용함으로써 환곡 운영에 화폐가 사용되었다. 이로써 환곡 운영의 융통성은 커진 반면 그로 인한 폐단의 여지는 더욱 커졌다.

 환곡 운영에서 감사·수령들은 지역간의 가격차를 이용하면서 이득을 얻었다. 그 중에서 ‘移貿立本’은 그들이 이용한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환곡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은 매우 다양하였다. 특히 수령·이서들은 온갖 편법을 이용하였다. 정약용은 수령과 이서가 환곡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기 위한 방법들을 열거하였다. 그 때 이용된 편법들로는 反作(臥還)·加分·虛留·立本·增估·加執·暗留·半白·分石·執新·呑停·稅轉·徭合·私混·債勒 등이 있었다고 한다.429)정약용은 수령이나 이서에 의한 불법적인 환곡 이용을 주체에 따라서 각각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러한 행위들의 각 항목에 대한 설명은≪牧民心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자세히 설명한 논문으로 愼鏞廈,<丁若鏞의 還上制度改革思想>(≪社會科學과 政策硏究≫3-2, 1981)이 있다. 이 방법들은 감사·수령·이서들에 의한 포흠을 농민들에게 전가하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었으며, 농민층을 극도로 피폐시켰다. 이로 말미암은 환곡의 총량도 1,000석 가까이 되었던 것이 점차 허류화되었으며, 실제 환곡의 총수를 감소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환곡은 이미 재정수입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수입 감소에 따른 부족분을 환곡 자체의 운영에서 해결해야 했다. 결국 이러한 측면은 농민들에 대한 수탈의 강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환곡 부담자 중에서도 향촌사회의 유력자나 양반지주·토호들은 환곡 부담에서 벗어났으므로 결국 분급대상자가 축소되어, 농민에게 부담이 더욱 편중되었다. 또한 정규적인 부담 외에 부가적인 비용을 요구하여 환곡의 고리대화는 더욱 촉진되었고, 환곡 운영은 극히 문란한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환곡의 폐단은 환곡 운영 과정에서의 문제점들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문제들은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430)이하 金容燮,<朝鮮後期의 賦稅制度釐正策>( 앞의 책, 1984), 337∼350쪽의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우선 ‘取耗補用’하는 과정에서 환곡의 폐단이 발생하였다. 환곡은 진대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곡의 일부를 국가의 경비로 사용하게 되면서 환곡은 재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로써 환곡은 진대만이 아닌 국가 재용의 일부로 사용되었고 없어서는 안될 상태에 이르렀다.431)정약용이 “국가의 재용이 반은 부세에 의지하고 반은 환자에 의지한다”고 했을 만큼 환곡은 국가재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항목이었다. 심지어 국가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환곡을 이용한 영리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환곡 운영을 통한 수입이 없으면 所管穀을 출자한 각급 관아와 군영은 유지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앙과 지방의 각 기관은 모곡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취모보용의 취지는 점차 무너졌고, 환곡은 관리들이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환곡의 총량을 늘리기 위해 加作을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환곡의 폐단은 점차 커졌다.

 또한 지방관들은 농민들을 취모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농민에게 환곡을 강제로 대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민에게 강요된 모곡은 환곡의 부세화를 가져왔다. 이 또한 환곡의 폐단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환곡은 군현·영진 단위의 환총제로 운영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폐단이 발생하였다. 환곡은 관청들의 수입과 직결되고 있었으므로, 환총은 한번 정해지면 그 양이 많다 해도 줄이는 것은 힘들었다. 환총제의 실시 결과 지역간의 환곡 부담의 불균현상이 나타났으며, 환곡의 부담이 많은 지역에서는 難捧·隣徵·族徵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지역 혹은 계절적인 곡물가의 차이를 이용하여 환곡을 作錢함으로써 환곡의 불균형이 이루어졌다. 감사·수령·이서들은 이를 이용하여 移貿를 함으로써 지역간 환곡의 편재는 더욱 불균등하게 되었다. 환곡 편재의 불균등 현상으로 지역에 따라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환곡의 양은 각기 달라졌으며, 그로 말미암은 부세불균의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還多民少’한 지방에서의 환곡을 받은 자들이 환곡을 갚지 못하거나 족징·인징 등의 이유로 농민 부담은 수십 석에 이르렀다.

 환곡의 지역간 불균형은, 중요 지역에는 많은 양의 환곡이 설치되었지만 벽지에는 적은 양의 환곡이 설치되면서 나타났다. 그리고 지방에 따른 곡가의 차이가 많았으므로 곡가가 높을 때에는 모곡을 징수하면서 작전하는 경우가 많고 곡가가 낮을 때에는 곡식으로 받았다. 또 대체로 연안지방에서는 환모를 작전하고 있었으며, 산간지방은 곡물을 그대로 쌓아 두고 있었다. 이로써 지역에 따라 환곡의 편재가 불균형하게 되었다. 연안지방은 작전 때문에 곡식이 모자라는 현상을 보이고 산간지방은 환총이 많아지고 있었다.

 또한 농민은 많은 양의 환곡을 강제로 배당받아야 했으며, 고리로 운영되는 모곡을 내야 했으므로 농민층들의 가계 운영은 힘들어지고 환곡의 모곡을 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유망하게 되어 그에 따른 부담이 향촌민들에게 전가되었다. 그 과정에서 吏逋·民逋에 의한 포흠으로 환곡은 이름만 남은 상태였다.432)환곡의 포흠과 관련하여 19세기의 환곡을 다룬 글로 宋讚燮,≪19세기 還穀制 改革의 推移≫(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가 있다.

 셋째, 환곡 배정에서 頉戶로 말미암은 폐단을 들 수 있다. 탈호는 부세화된 환곡을 배정받지 않고 빠져나간 호를 말한다. 환호층은 대부분의 양반층과 진대를 받는 층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대상이었다. 환곡은 이미 부세와 마찬가지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부담으로 인식되었으므로, 환곡을 받지 않으려는 층들이 늘어났다.

 환곡 운영 과정에서 빈농들에 의한 탈호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특권층에 의한 탈호는 심각한 것이었다. 환곡이 많은 지역에서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實戶들이 환곡의 분배 대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컸다. 이는 군현의 환총이 일정하고 戶摠은 일정한데, 환곡 부과시에 면제 혹은 탈면으로 그 대상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곧 환곡의 부과 대상에서 빠져나가는 자들 때문에 남아 있는 호들이 모든 부담을 져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탈호는 다양한 신분층에서 나왔으나 문제가 되는 층은 대부분 지방행정을 담당하거나 혹은 영향력을 미치는 자들이었다. 부유한 양반이나 이속 혹은 상민 중에서도 부민층은 뇌물을 주어 벗어나고, 양반층과 부민층이 짜고 탈면하거나, 양반을 모칭 혹은 관청 기관이나 양반가에 투탁한 자 그리고 왕실 장토의 작인들이 탈면하였다. 심지어 契房을 통하여 집단적으로 면제를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환곡을 부담하는 계층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들과 함께 대부분 빈곤한 상민 혹은 천인을 포함하는 일반 농민층 즉 소민층에게 환곡 부과가 집중되었다. 특히 환곡의 양이 극대화된 지역에서 환곡을 분급받지 않는 탈환층이 늘어날 때, 농민층은 가계 유지가 힘든데다 환곡의 편중된 부과로 말미암아 고통과 피해를 심하게 입었다.

 넷째, 환곡의 운영에 ‘作錢代捧’이 허용됨으로써 곡물만이 아닌 화폐가 이용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은 폐단이 발생하였다. 작전대봉은 모곡을 금납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으나, 각급 관청들이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한 영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편승함으로써 환곡의 운영 과정에서 많은 잉여를 취할 수 있었다. ‘耗穀作錢’은 ‘穀賤邑’보다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穀貴邑’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각급 관아들은 재정수입을 환곡에 의존하는 바가 컸으므로 이러한 현상을 이용하였다. 그 결과 환곡이 편중되는 폐단이 초래되었다.

 환곡의 모곡을 작전하기 위해 국가는 곡물의 일정한 가격을 정함으로써 상정가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지방관들은 상정가를 따르지 않고 ‘高價執錢’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낮은 가격으로 분급하고 높은 가격으로 집전하여 곡물의 시가에 따른 차액을 노렸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상정가에 加捧하거나 添捧한다든지, 혹은 곡물이 많을 때 시세보다 고가로 징수하거나 반대로 곡물이 귀할 때 시가대로 징수하기도 하였다. 관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최대한 이용함으로써 수입을 늘렸다. 반면에 환호들은 작전할 때 수납과정에서의 부담이 늘어났다.

 ‘고가집전’은 잉여가 많았기 때문에 각 관아에서는 원래 작전할 수 있는 것 외에 加作(加數執錢)도 하였다. 이 때 ‘가수집전’한 곡물은 원래의 상태로 채워야 했지만, 이것마저도 곡물의 가격차를 이용하면서 헐가로 계산하여 채워 놓았으며 그 사이에도 잉여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을 ‘加作立’本이라 하였다. 이 방식은 환폐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서 환곡을 계산할 때 다른 곡식을 개입시켜 잉여를 취득할 때 이중의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곡물을 이용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單代이다. 단대는 원래의 곡식 대신에 대체하는 곡물로 채워야 하는 것인데 이를 대상 곡물간의 교환 비율에 의하지 않고 1대 1로 대응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지방관이나 이서들이 효과적으로 잉여를 늘려 나갈 수 있는 방식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가작입본의 방식은 해당 지역 내에만 한정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과도 확대 연계되었다. 이것을 ‘移貿立本’이라 하였다. 이무는 지역간의 환곡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하여 혹은 災年의 구황을 위하여 마련된 것인데 이윤을 늘리기 위한 상행위에 이용되었다. 관이 이를 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농민에게 피해를 주었으며, 이무가 이포를 메우기 위하여 행해질 때 그 폐해는 매우 컸다. 환곡에 화폐를 이용함으로써 발생한 폐단은 이무입본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다섯째, 환곡의 운영이 산만하고 부실하였다. 환곡 수입은 국가 수입의 중요한 재원이고, 환총이 많았을 때는 한때 거의 천만 석에 이르렀다. 따라서 환곡의 대여, 취모 및 관리 등은 합리적이고 조직적이어야 했으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러한 현상은 구관관아가 많아 재정 체계가 여러 계통으로 분산되어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게다가 환곡의 명색이 많아서 그 운영 또한 복잡하였다. 각 기관들은 여러 읍에다 환곡을 배치한 것이었으나, 고을 개개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 종류의 다른 환곡들이 배정된 셈이었다. 게다가 지방 관아도 자체의 경비를 마련하거나 수입을 늘이기 위하여 환곡을 늘리거나 혹은 私還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따라서 환곡을 직접 운영하는 지방 관아는 명색이 복잡할 정도로 각기 다르고 會付하는 내용과 기관이 다르다 해도, 창고를 충분히 갖추지 않은 한 여러 종류의 환곡을 하나의 창고에 보관하여 운영하여야만 했다. 이는 복잡 다양한 명목의 환곡을 혼란하게 만들면서, 환곡 운영 전반을 문란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환곡 운영상의 문제는 책임자인 수령에게도 있었다. 지방의 환곡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자는 지방 관속이었으며, 환곡 운영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자는 수령이었다. 수령들은 지방 관속들의 농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이서층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직접 환곡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리기도 하였다.

 환곡 운영의 부실로 환총을 제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19세기 초에 환총의 감소는 눈에 띨 정도였다. 흉년인 경우 진대를 행한다든지 혹은 耗穀作錢ㆍ元穀賣用 등의 사정으로 환총의 감소가 발생하였으나, 포흠이나 舊還의 탕감 등으로 인한 환총의 감소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환곡은 이미 재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이용되었으므로, 정부로서는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관청의 재용을 줄이는 방법으로 대처할 수도 없었다.

 결국 정부는 모곡 수입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환곡 자체를 이용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는 농민들이 환곡 운영의 부실에 따른 피해를 다시 지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부담의 가중을 의미하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조치로 국가는 포흠 즉 조세를 포탈한 부분 혹은 제대로 거두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포흠곡을 거두어서 채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포흠의 다수를 차지하는 吏逋를 보더라도 일차적으로 犯逋者가 年限 안에 기한을 정하여 除耗排捧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포흠곡을 거두는 것은 거의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流亡戶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러한 포흠은 인징·족징의 형태 혹은 포흠을 전가하는 형태로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포흠을 거둠으로써 환곡의 감소를 보충한다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이렇듯 환곡은 진대의 방식이나 혹은 부세의 방식 모두에서 결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환곡은 운영 과정에서 쉽게 수탈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한 문제의 해결은 곧 환곡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며, 그로 인한 사회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환곡에 대한 당시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이러한 현실을 미리 지적하였다. 정약용은 환곡에 대해 “이것이 賦斂이지 어찌 賑貸라고 하겠는가 이것이 勒貸이지 어찌 부세라고 하겠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환곡의 운영은 악화되었으며,433)茶山硏究會,≪譯註牧民心書≫, 穀簿 上 (創作과批評社, 1985). 결국 환곡은 19세기 농민항쟁의 주요 원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철종 13년(1862) 농민항쟁기에 삼남 지역의 민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문제 중의 하나는 환곡의 폐단이었다. 그 중에서 從時價·移貿·加作 등은 가장 큰 문제였다. 19세기 중반에는 그러한 폐단들이 극도로 심화되어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환곡의 作錢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형태의 문제점들이 나타났으며, 그로 말미암아 환곡의 폐단은 극대화되었다.

 우선 환곡에서 상정가와 시가의 차이를 이용하여 차액을 얻는 방법이 주로 채택되었으며, 영읍에서는 시가를 적용함으로써 지역을 달리하여 執錢과 立本을 거듭하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액을 얻는 移貿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점차 커지자 정해진 이외의 환곡을 이용하는 加作행위가 점차 커졌다. 감사·수령들은 이 방식을 이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취하였으며, 환곡의 포흠은 일상화되었다. 이서들마저도 환곡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횡령하는 것을 크게 거리끼지 않을 정도였다. 환곡은 관이 주관하는 것이었지만 감사·수령·이서들이 주체가 되어 농간을 부릴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실제 철종 13년 晋州에서 우병사인 白樂莘의 탐학으로 보고된 내용을 보면 환곡을 이용하여 私用한 것이 조사된 것만도 19,497냥에 이르고 있다.434)자세한 내용은 철종 12년 겨울에 還穀作錢으로 高價取剩한 것 4,100여 냥, 兵庫錢 3,800여 냥을 作米한 1,266석 10두를 兵庫捄弊米라 하여 總外加分하고 가을에 받을 때 每石 당 5냥 5전씩 執錢하여 立本으로 매석 당 3냥씩을 제외한 나머지 3,166냥, 또 그 해 가을의 取耗色落價錢 가운데 私用한 1,465냥 등이다. 백낙신의 포흠은 엄청난 양에 이르고 있었으나, 진주목사인 洪秉元은 환곡포흠을 도결로 해결하려 하였다. 게다가 舊京邸吏인 梁在洙는 관청의 곡식을 이용하여 사공들이 상납할 때에 채무로 빌려주어 줄어든 것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철종 8년 봄에 移貿米 8,000석의 代錢 24,000냥 중에서 14,000냥을 債錢取去하고 나머지 10,000냥은 右漕倉 屬邑에 나누어 주어 取殖하다가 13년에 그 資金 10,000냥 마저 가져갔는데, 配納하려고 한 항목에 대해서는 해마다 耗를 합산하여 사공 등에게 白徵하는 등 복잡한 형태로 환곡을 최대한 이용하여 횡령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곡의 포흠의 형태는 다른 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62년 尙州와 星州의 逋還이 4만 석이었으며, 그 무렵에 진주 근처의 조그마한 고을인 단성과 적량진의 환곡이 10만 석 정도였고, 군위의 환곡이 8만 석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소위 ‘徒擁虛簿’라고 표현되듯이 실제의 환곡과 장부에 기재된 환곡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즉 환곡을 이용한 관리들의 포흠이 이들 지역에서 극도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포흠의 발생은 환곡을 허류화시켰으며, 환총만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환곡 장부와 환곡의 실제량은 일치하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환곡의 분급과 수납에 따른 폐단은 여전하였으며, 그에 따른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들 포흠곡은 수령과 이서들 자신의 포흠으로 처리되지 않았다. 포흠곡은 거의 민간에 전가되었으며, 향촌민들은 그 부담을 그대로 져야만 했다. 이 때 포흠곡을 처리하는 방식은 환곡 혹은 도결을 이용하였다. 결국 포흠은 戶나 전결에 집중되었고, 포흠을 전가받는 층(還戶)들의 불만은 커졌다. 이 무렵 진주나 단성·상주지역에서 포흠곡을 토지에 전가하여 모자라는 환곡을 채우려는 사건이 있었다. 농민층들은 환곡의 포흠으로 발생한 곡물에 대하여 “포흠곡은 당연히 관리에게서 받아 내야 한다. 어찌 민간에게 옮겨서 징수하려 하는가”라고 하였다.435)≪備邊司謄錄≫226책, 헌종 4년 정월 10일. 이는 환곡의 포흠을 부담하는 문제에 대하여 수령ㆍ이서와 농민 간의 갈등이 표면화한 것이었다.

 한편 철종 13년 농민항쟁의 과정에서 포흠의 전가와 관련하여 민간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상주의 예처럼 환곡의 포흠을 전가하는 대상에 따라서 부담자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大民과 小民 간의 대립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는 환곡의 포흠을 호환의 형태로 각 민호에 분급할 것인가 혹은 결환의 형태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 부과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부과하는 방식에 따라서 부담자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환곡 포흠의 처리에 계급간의 이해가 달라졌다고 하겠다.

 환곡의 폐단에 대한 대책들은 이미 농민항쟁기 이전에도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환곡제의 이정에 대한 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영리화되고 부세화된 환곡제를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으로 대변통의 방향에서 논의되었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환곡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부분적으로 개선하려는 소변통적인 방향에서 논의되었다.

 조선 후기 환곡의 폐단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효종조 金應祖의 건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환곡의 회록을 둘러싼 논의를 제기하였으나 환곡의 폐단을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그 외에 사창제 및 상평창제가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현재의 환곡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후 영조 45년(1769)에 ‘還多民少’와 ‘還少民多’라는 불균형한 지역간 환곡의 편재를 시정하려 한<各道還穀釐正節目>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도 얼마간의 효과를 얻는 데 그쳤으며, 오히려 이전의 이무를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와 그 폐단을 가중시켰다.

 정조 19년(1795)에는 환곡제의 이정문제를 직접적으로 논의하려 한 還餉策問이 내려졌다. 그 외에도 歲首求言 및 대소 관료들의 所懷疏, 求民隱綸音과 應旨民隱疏 및 勸農政求農書綸音·應旨進農書 등을 통하여 환곡과 관련한 대책들을 구하려 하였다. 이처럼 정부측이 환곡제의 개혁의 절실함을 느끼고 그에 대한 대책을 자주 묻고 있었음을 볼 때, 환곡의 폐단과 불합리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환곡의 폐단과 관련하여 제시된 것은 대변통과 소변통의 방식이었다. 대변통의 방법으로는 平糴制(상평창제)와 사창제가 제기되었다. 그 중에서도 사창제는 주자학의 입장에서 서 있던 당시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일부 지역에서 사창제가 시행된 사례도 있었지만, 사창제는 국가재정과 관련하여 환곡의 기능을 대체할 수 없다고 보아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소변통의 방법은 환곡을 그대로 두고 그 폐단만을 고치려는 것이었다. 이는 환곡제의 세칙을 고치는 수준이었다.

 정약용도 이러한 수준에서 「還餉議」을 제시한 바가 있다. 그는 환곡의 곡종법·환분법·분류법 등을 조정한 위에서 관리 기구를 호조·감영으로 통합하고 곡명을 일원화하며, 환곡의 배정을 호총상의 매호에게 3석으로 한정 균일화하여 환곡의 운영상에서의 불합리와 불균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 제시된 환곡이정책은 어떠한 방법도 채택되지 못하였으며, 현상적인 문제점들에 한하여 대처하는 수준이었다.

 순조대에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면서 순조 11년(1811) 평안도 지방에서 농민항쟁이 폭발하였다. 정부는 이와 관련하여 대책을 세우려 하였다. 求言敎를 통한 時務疏 혹은 陳弊冊子를 작성케 하였다. 이미 순조 초년에 사창제 실시와 관련한 논의 후에 사창절목을 만들어 양남·양서 4개의 도의 몇몇 지방에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창제는 지방관청의 수입원이 상실 내지 감소를 감수해야 하는 계층들에 의하여 실시 초부터 반발을 받았다.

 한편 환곡의 폐단과 관련하여 종전부터 주장되던 환곡제의 부분적인 수정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환곡의 폐가 불균형·불합리한 운영에 있다고 보고 호총과 곡총을 비교하여 조절하되, 京司의 수용은 穀在邑에서 ‘從實作錢’하도록 하고, 곡부의 명색을 간소화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처럼 환곡에 대한 대책은 철종 연간까지 간헐적으로 제기되고 정부에서는 암행어사의 파견 등을 통하여 시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철종 초에 다시 환곡의 폐단을 고치기 위한 방책을 묻는 求言敎가 내려졌으며, 각 지방에서는 糴弊矯捄別單을 마련하여 환호와 탈호를 중심으로 한 환곡의 불균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때 환곡의 폐단과 관련하여 환곡의 減摠이 제기되었으나, 감총의 문제는 정책적인 면에서 주요한 쟁점은 되지 못하고 말았다.

 환곡의 폐단에 따른 구체적인 해결책의 모색은 철종 13년 농민들의 항쟁을 겪으면서 가능하였다. 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에서 찾았으며, 환곡이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진주농민항쟁을 조사하기 위하여 안핵사로 파견된 朴珪壽의 장계 등에서 환곡의 문제가 크게 거론되었고, 특별 기구를 통한 대책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삼정이정청이 세워지고 국왕은 삼정책문을 내리고 의견을 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정청당상이 그 내용을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좌의정 조두순이 정책의 기초를 마련하고 이것이 「삼정이정책」으로 인준되었다.

 趙斗淳은 이 때 환곡에서의 급대방안을 위주로 하여 ‘罷還歸結’의 원칙을 내세우고 모곡 수입을 대체하여 전결에다 대신 부과하려 하였다. 파환귀결의 방식은 환곡을 폐지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불법적인 수탈을 없앨 수 있으며, 토지에 세를 부과하여 전세로 대체함으로써 불합리한 환모를 징수하지 않더라도 재정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단 당시의 관행은 토지에 부과하는 세를 작인들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 또한 농민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었으며, 파환귀결은 환곡의 진대 기능을 폐기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파환귀결의 원칙은 농민항쟁이 진압될 무렵 재검토되었으며, 이전과는 다른 측면에서 재조정되었다. 영부사 鄭元容이<三南還政捄弊節目>을 작성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그 내용은 각 도의 허류곡의 2/3을 탕감하고 환총을 다시 책정하고 열읍의 환총을 戶의 다과에 따라 재조정하여 불균을 시정하고, 환총의 加減移動을 막고 이액도 조정하며 斂散을 盡分으로 하려는 것이었다. 삼남에 대한 조치에 이어 관동지방에 대해서도<關東捄弊節目>이 마련되었고, 고종대에 이르러 관서지방에도<關西還弊捄弊節目>을 마련하여 환곡의 폐단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의 한계 때문에 환곡의 폐단은 여전하였으며 허류곡의 탕감이 문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梁晋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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