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2. 삼정개혁론의 전개
  • 2) 1862년 농민항쟁기의 삼정개혁론
  • (1) 삼정에 대한 책문

(1) 삼정에 대한 책문

 철종 13년(1862)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국왕과 정부는 그에 대한 수습책을 마련하려 하였다.446)이 글의 三政策問과 그에 대한 應旨疏의 내용 분석에 대한 기술은 金容燮,<哲宗朝의 應旨三政疏와「三政釐正策」>(≪增補版 韓國近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84)에 의존하였으며, 이용되지 않은 자료만 부분적으로 더하였다. 철종은 같은 해 6월 12일 삼정책문을 내려 대책을 강구토록 하였다. 위정자와 지식인들은 그에 답하는 應旨上疏의 형식으로 三政疏를 작성하여 같은 해 6월에서 윤8월까지 제출하였다. 국가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지배층의 견해를 광범하게 수렴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임금이 대책을 묻는 것에 대한 대답 형식의 글이 응지상소이다. 철종은 말년에 유례가 없는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항쟁이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求言敎를 내렸으며, 사대부층은 그에 대한 수습 방안을 진언하였다.

 농민항쟁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철종 13년 2월 4일 경상도 丹城을 필두로 晋州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으며, 2월 18일에서 23일 사이에는 대규모의 농민 봉기가 이어졌다. 이어서 가을에는 중부지방과 북부지방에서도 농민들의 항쟁이 발생하였다.447)망원한국사연구실 19세기농민운동분과,≪1862년 농민항쟁≫(동녘, 1988)에 따르면, 농민전쟁이 발발한 지역은 72개 지역으로 확인되고 있다.

 관아를 습격하고 官長을 축출하거나, 印符를 빼앗고 鄕權을 탈취하거나 혹은 문서를 불지르고 옥을 부수고 죄수들을 풀어 주었으며, 朝官 및 양반들에 대하여 구타를 하거나 혹은 향리들을 박살내거나, 혹은 부민들의 가옥을 부수고 재물을 탈취하는 사건들이 벌어졌다. 지방에 따라서 농민항쟁의 양상은 달랐으나, 농민들은 자신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때 시정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행동을 취하였다. 처음에는 관의 잘못으로 민들이 억울하게 당하게 되자, 농민들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적어 소장을 올려 해당 관청이나 혹은 상급 관청에 대하여 잘못된 부분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일련의 절차를 거친 그들의 요구를 수령이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농민들은 관에서 처리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마침내 항쟁을 전개하였다.448)賦稅運營과 관련 呈訴, 農民抗爭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高東煥,<19세기 賦稅運營의 변화와 呈訴運動>(≪國史館論叢≫43, 國史編纂委員會, 1993)을 참조.

 지방관들은 농민항쟁이 일어났음을 중앙 정부에 보고하였고, 정부는 진상과 원인을 파악하여 대책을 세우려 하였다. 경상감사 李敦榮은 우병사 白樂莘의 보고에 의거하여 진주농민항쟁은 統還과 都結에 대한 영읍의 逋弊矯捄에서 발생하였다고 정부에 보고하였으며, 전라감사 金始淵도 益山농민항쟁의 원인을 조사한 후 도결의 폐단을 들었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농민항쟁의 원인으로 보고된 것들도 이러한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부도 이것으로 농민항쟁의 전모가 밝혀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정부는 按覈使를 파견하여 그들의 보고를 받음으로써 농민항쟁의 실상에 접근하려 하였다. 진주안핵사 朴珪壽는 按覈狀啓와 査逋狀啓를 통하여 농민항쟁의 실상과 지방 관리들의 還穀逋欠 문제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였다. 그는 연이은 再啓를 통하여 우병사 백낙신의 탐학한 모습을 나열하고, 그것이 농민항쟁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이는 진주농민항쟁이 발생한 지 한달 반이 지난 4월 4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여러 차례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아직 농민항쟁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고, 그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내리지 못하여 농민항쟁에 따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 대신들은 여러 곳에서 올라온 보고를 토대로 환곡을 매개로 한 농민 수탈과 탐관오리들의 농민침학 때문에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고 보아 이를 시정하려고 하는 정도였다.

 우선 영의정 金左根의 계언에 따라 대책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외읍의 吏額은 줄이고, 錢 400냥을 축낸 逋吏는 皇律에 의하여 다스리며, 貪墨한 長吏도 황률로써 치죄하며, 환곡의 운영에는 폐단이 있으나 還耗는 지방관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므로 없앨 수는 없다고 하여, 이러한 폐단에 대한 처리 방안과 그 대책을 널리 물을 것을 결정하였으며, 이 밖에도 장시·포구의 무명잡세, 제언·전답에서 늑탈하는 폐단 등을 혁파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도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각지에서의 농민항쟁은 지속되었다. 5월에는 懷德을 비롯하여 公州ㆍ恩津ㆍ連山ㆍ扶安ㆍ金溝ㆍ淸州ㆍ懷仁ㆍ文義 등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정부는 농민항쟁이 확산되는 상황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박규수도 지방의 실정을 관찰하고 난민의 동태를 목도한 안핵사로서 제언하였다. 그는 자신의 보고서 외에 지방의 보고서를 토대로 삼남에서 발생한 농민항쟁의 원인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려 하였고, 그 결과 5월 22일 상소문에서 ‘삼정문란’이라고 하여 막연하지만 포괄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還餉의 폐단이 그 중에서 으뜸이다”라고 하여,449)≪承政院日記≫ 2651책, 철종 13년 5월 22일.
朴珪壽,≪瓛齋集≫권 6, 請設局整釐還餉疏.
삼정 중에서 특히 환곡의 폐단을 우선으로 꼽았다. 그러나 그가 환곡을 비롯한 전정·군정 등의 문제와 관련시켜 언급한 것은 사태의 일 측면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철종 6년(1855)에 암행어사로서 농민들의 실태를 파악하면서 당시 폐정의 원인으로 삼정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번 농민항쟁의 배경으로 삼정문란을 지적한 것도 이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 각 지방에 파견된 선무사나 암행어사 등의 복명서에서 제시된 원인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450)각 지역에 파견된 선무사·안핵사·암행어사의 명단은 鄭元容,≪袖香編≫6, 釐整廳設始에 자세하다. 농민항쟁의 원인에 대한 정부의 공론은 ‘삼정문란’으로 귀결되었으며, 그러한 차원에서 대책이 마련되었다.

 한편 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파악한 박규수는 그 수습책을 삼정이정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는 삼정 중에서 문란이 가장 심한 것은 환향이므로 삼정을 이정하기 위해서 환곡을 중심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혹 司나 局을 설치하여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많은 대책을 채집하여 논의를 거쳐 지당한 것을 구하여야 한다”451)≪承政院日記≫2651책, 철종 13년 5월 22일.
朴珪壽,≪瓛齋集≫권 6, 請設局整釐還餉疏.
라고 한다든지, 혹은 “따로 一局을 열어서 (인재를) 골라 (일을) 맡겨서 모든 것에 이치를 갖추도록 한다. 혹 옛 것으로 인하여 修飾하거나 혹은 옛 것을 본받아서 더하거나 빼고 윤색하고 두루 자세하게 한 후에 먼저 1개의 道에 시험을 해보고 다음에 널리 행하도록 한다”452)≪哲宗實錄≫권 14, 철종 13년 5월 계해.라고 하여 구체적인 방법을 건의하였다. 특별 기구를 만들어 문제를 연구하고 중론을 모아서 수습책을 마련하자는 그의 건의는 즉각 채택되었다. 정부는 박규수의 건의를 삼정 전반에 걸치는 문제로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에 삼정을 이정하기 위한 敎가 내려졌으며,453)≪承政院日記≫2651책, 철종 13년 5월 25일.
≪哲宗實錄≫권 14, 철종 13년 5월 병오.
이어서 三政釐正廳이 설치되었다.454)≪哲宗實錄≫권 14, 철종 13년 5월 정미. 위원으로는 鄭元容·金興根·金左根·趙斗淳 등을 이정청 總裁官, 金炳翊·金炳國 등의 정부대신들을 이정청 당상관으로 임명하였다. 삼정문란을 초래한 당시의 정부대신들이 그것을 개혁할 위원으로 선임되었는데, 이는 이후 삼정이정청의 한계로 작용하였다.

 그 후 삼정이정청은 윤8월 19일까지 지속되면서 농민항쟁의 수습을 위한 방략을 강구하였고 그것은 마침내 삼정이정책으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방략은 이정청의 위원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중론을 구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앞서 박규수의 의견과 김좌근의 환폐를 교구하는 방략으로 중론을 구하자고 제시한 점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삼정이정책을 작성하기에 앞서 여론을 모으는 작업이 선행되었다. 三政策問과 應旨三政疏가 그것이다.

 삼정책문의 방침이 공포된 것은 6월 10일이었다. 이날 철종은 교를 내려서 이정청에서 삼정 교구의 방략을 강구하는 것은 朝家의 대변통에 속하는 것이므로 여론을 널리 구하여서 반드시 이치에 맞는 타당한 것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전제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의 정치인ㆍ지식인 즉 문음의 당상ㆍ당하ㆍ참하 및 생원ㆍ진사ㆍ유학들로부터 試策의 형식으로 그 의견을 들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때 讀券官은 이정청의 總裁官이 겸임할 것이며, 응시인의 제술은 試場에서는 제목만을 받아서 물러가 10일간을 기한으로 집에서 제술하여 바치도록 하되 試券은 태학에서 모아서 보고케 한다는 것이었다.455)≪日省錄≫철종 13년 6월 10일.
≪哲宗實錄≫권 14, 철종 13년 6월 신유.

 그리고 시책을 실시하는 6월 12일에 시장에 나오지 못한 지방 인사들의 의견을 듣기 위한 방안도 따로 마련하였다. 즉 이정청으로 하여금 서울의 시장에서 제목을 내세웠던 책제를 베껴서 전국의 8도에 내려보내고 각 지방민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 방략을 짓도록 한 다음 읍에서 收券하고 도에서 모두 모아 올려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때 각 지방으로부터 올라오는 시권은 거리의 원근을 고려하여 올려 보내는 기한을 이정청으로부터 공문이 도착한 일자를 기점으로 70일의 여유를 주었다. 더욱이 지방에는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학식이 높은 儒賢들이 있으므로 국왕은 이들이 시책에 응해 줄 것을 바랐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따로 교를 내려서 지방관으로 하여금 이를 傳諭하도록 하고, 평소에 ‘窮經力行’하여 강구하였던 방략을 삼정구폐책으로 진언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456)≪日省錄≫철종 13년 6월 12일.
≪哲宗實錄≫권 14, 철종 13년 6월 계해.

 이리하여 삼정구폐를 위한 구언교는 서울의 시장이나 지방관을 통해서 전국의 정치인 및 지식인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 때 국왕이 하문한 것은 삼정의 근본적인 개혁 즉 경제체제의 혁신 방안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조두순이 代製한 策題에 보이듯이 삼정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개선 방안을 요구한 것이었다. 철종은 삼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법제를 ‘良法美制’라고 자부하였고, 게다가 삼정은 본래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여, 이것이 없으면 나라를 유지할 수 없고, 민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法久弊生’이라고 하여 삼정이 오랜 기간 운영되면서 백성들이 삶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고 나라가 기울게 되었으니, 이를 矯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국왕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국왕의 책문에 대하여 응답한 건수는 6월 22일 본청에서 考試를 보고 收券한 것이 900여 장이나 되었고, 나중에 낸 것이 100장이었다. 이어 25일에는 52장을 취하였다고 한다. 결국 삼정책에 대한 대책으로 제시된 응지상소문은 1,050건을 넘었으며, 이를 編次하여 왕에게 아뢰었다고 한다. 지방의 여러 券도 함께 올려서 편차를 하도록 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규모로 응지상소문들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457)鄭元容,≪袖香編≫권 6, 釐整廳設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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