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3. 부세제도 개선의 한계
  • 1) 삼정체제의 구조적 모순

1) 삼정체제의 구조적 모순

 조선 전기에는 租庸調制度를 이상적 원형으로 하여, 田·身·戶에 각각 세를 부과하였다.470)≪世宗實錄≫권 32, 세종 8년 4월 신묘. 이것은 조선왕조가 부세를 매개로 하여 토지와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사적인 토지소유권이 성장하고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역제에 변동이 일어나면서, 전결과 호구에 대한 개별적·인신적 수취는 어려워졌다.

 이에 양란을 거친 조선 후기에는 田政·軍政·還政의 삼정체제가 부세 수취제도로 자리잡았다.471)조선 후기 부세체제는 전정·군정·환정과, 이 시기 크게 늘어난 雜役稅 및 荒政도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황정은 전정·군정·환정과 더불어 四政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四政考≫朝鮮民政資料叢書). 삼정체제는 16∼17세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국가적 차원에서의 양안 및 군·호적 작성이 힘들어진 상황을 배경으로 성립된 조선 후기의 부세체제였다. 그러나 삼정체제는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세입을 헤아려 지출을 결정하는 量入爲出이라는 재정 구조상의 특성과, 米·布 납부를 원칙으로 하는 현물성, 그리고 각급 기관이 독자적인 징세·지출권을 갖는 분산성의 특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472)金玉根,≪朝鮮王朝財政史硏究≫(一潮閣, 1984).
方基中,<19세기 前半 租稅收取構造의 特質과 基盤-貨幣收奪 문제를 중심으로->(≪國史館論叢≫17, 國史編纂委員會, 1990).
따라서 현물 납부 및 부세의 상납 시기가 서로 다른 것을 이용하여 시가 차익을 노리는 각종 폐단을 비롯하여 중앙 재정과 지방 재정 간의 상납분과 유치분을 둘러싼 갈등 및 지방 재정 보충책의 편법성에서 기인하는 수탈 등은 여전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삼정체제는 군·현단위의 총액제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473)金容燮,<朝鮮後期의 賦稅制度 釐正策>(≪增補版 韓國近代農業史硏究≫上, 一潮閣, 1984). 총액제는 조선 정부가 토지와 호구에 대한 개별적 파악과 수취가 힘들어지자 삼정에 대한 군·현단위의 조세 납부 책임을 강화함으로써 안정적인 부세 수입을 보장받고자 하는 수취정책이었다. 전정의 比摠制, 군정의 軍摠制, 환정의 還摠制가 그것이다.

 그러나 부세 수취의 전제 조건인 양안과 군·호적 작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총액제 운영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고 있었다. 첫째 총액제는 정부가 확보해야 할 일정 규모의 부세가, 각 군·현별로 확정되고 이를 각 군·현이 완납하는 부세 수취방식이었다. 따라서 군·현 혹은 면·리가 부세책납의 기초 단위가 되면서 지역간 부세불균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둘째 부세제도의 신분적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켰다. 일정액의 부세를 책납하는 한 권세가들은 수취 대상에서 빠지거나 이를 농민에게 전가시킬 수 있었고, 지방관의 포탈도 구조적·항시적으로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結納化·金納化가 촉진되면서 이를 이용한 새로운 폐단이 야기되었다. 19세기 都結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즉 지방 수령들은 조세의 결납화와 금납화 경향을 배경으로 하여, 각종 부세를 토지에 부가하고 그 총액을 채우려는 방편으로 도결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도결은 규정된 액수 이상의 도결가를 거두는 파행적 운영으로 이어짐으로써, 그 이익은 관이나 호수배들이 차지한 반면 부역의 부담은 농민에게 전가되어 사회적 모순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삼정체제의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세도정권기에 접어들면서 극명하게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세도정권은 규정보다 많은 부세를 농민들로부터 거두어 갔지만, 이는 국가재정을 확충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고 있었다. 수탈된 부세가 세도 가문과 그와 결탁된 세력가에게 흡수되거나 중간 수탈구조를 통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당연히 세도정권은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민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민란은 철종 13년(1862) 농민봉기로 절정을 맞았다.

 철종 13년 농민항쟁은 국가 권력과 신분제를 기축으로 하여 구축된 조선의 부세체제가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에 부딪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개혁은 신분제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생산 관계를 형성해 감으로써 부세의 평등 과세와 공평 부담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자리잡아야 했다. 삼정이정책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조선 정부가 체제유지적 자구책으로 내놓은 대안이었다. 즉 삼정이정책은 삼정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농민들의 개혁 요구와 정부 당국자·학자·농촌지식인 등의 각종 개혁론이 집약, 표출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전정·군정·환정의 구조적 모순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삼정이정책에서 제시된 개혁의 방향 그리고 개혁의 정도를 파악함으로써, 19세기 후반 부세제도 개혁의 실상과 한계를 밝히려 한다. 이는 갑오개혁기 근대적 조세제도 성립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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