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3. 부세제도 개선의 한계
  • 2) 전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전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1) 전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19세기 전정 폐단은 토지대장으로서의 量案과 실제 경작지 현실과의 괴리, 그리고 총액제 운영의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양전은 결부제에 의거하여 토지의 경계·등급·陳廢·소유권자 등을 조사하는 전통적인 토지 파악 방식으로서, 이를 통해 작성된 양안은 전결세 수취의 기초 대장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 차원에서 시행된 전국적 규모의 양전은 숙종대 삼남 양전을 끝으로 19세기까지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그 결과 字號와 地番이 뒤섞이고 田等이 서로 바뀌었으며, 부호들은 이를 틈타 토지를 겸병하였다. 경작지와 陳田의 구분이 불가능해지고, 양안상에 등록되지 않은 隱餘結이 구조적으로 생겨나는가 하면, 이서층에 의한 남징·백징·누세·탈세가 만연하였다. 궁방전·아문둔전을 비롯한 각종 면세전의 확대는 수세결수의 감축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양안에 의한 전결세 수취를 더욱 혼란케 하였다. 이에 양전의 필요성은 19세기 전정 개혁론으로서 강하게 제기되었다.474)金容燮,<純祖朝의 量田計劃과 量田釐正問題>(≪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양전을 통한 토지 소유자와 납세자의 확인, 결부 재조정에 의한 부세의 공평 부과가 전정 개혁의 선결 과제로 인식된 것이다.

 한편 19세기에는 각종의 부세가 토지에 부과되는 結斂化 현상과, 화폐경제 발전에 따른 조세금납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었는데, 이는 18세기 이래 전정의 총액제 운영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폐단을 낳고 있었다.475)전정의 총액제 운영은 전세를 비롯한 노비신공, 어염세 등에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李哲成,<18세기 田稅 比摠制의 實施와 그 성격>(≪韓國史硏究≫81, 1993).
全炯澤,≪朝鮮後期 奴婢身分硏究≫( 一潮閣, 1989).
金義煥,<17·18世紀 鹽稅政策의 變動>(國民大 碩士學位論文, 1994).
즉 이 시기 전결세는 이미 大同米, 三手糧米, 결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부가세가 40여 종에 이르렀다.476)丁若鏞,≪牧民心書≫戶典 稅法 참조. 여기에다 같은 수세 대상의 토지라도 실제 경작되고 있는 時起田結에는 각각 出稅出賦·免稅出賦·免賦出稅·免賦免稅의 토지 종류가 있어, 결세의 종류와 부담이 서로 달랐다. 또한 전결세는 상납 수단이 지역에 따라 米·木·錢으로 서로 달랐으며, 상납 시기도 대동과 전세가 서로 달랐다. 특히 대동을 중심으로 화폐 납부가 허용되자 지역에 따라서는 상정가가 아닌 시가로 作錢되면서, 차익을 노린 防納이 성행하고 있었다. 전결세는 상납 관청 및 그 기한에도 서로 차이가 있었다. 전세는 호조, 대동은 선혜청, 결작은 균역청에 납부되었고, 삼수미는 호조의 별영에 귀속되었다.477)徐榮輔·沈象奎,≪萬機要覽≫財用編 참조. 이렇듯 각종 부세의 결렴화와 더불어 결세 종류와 부담의 상이, 상납 수단과 상납 시기의 차이, 그리고 재정 기구의 분산성 등 제반문제는 시기전결에 대한 정부 차원의 총체적인 관리와 재정 기구의 통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정부는 군·현단위의 수취 관행을 그대로 인정함과 동시에 조세금납화의 추세를 받아들여 안정적인 총액 수취를 목표로 하였다. 이에 수취의 기초단위가 守令-吏胥-戶首-結民으로 짜여지면서, 호수와 수령·이서배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었다.478)高錫珪,≪19세기 鄕村支配勢力의 변동과 農民抗爭의 양상≫(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호수는 각 읍의 토지를 일정 단위로 묶어 납세자가 내야 할 조세를 모아서 관에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조세 수납 과정에서 할당액을 채우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차지하여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자연히 토지에 부과되는 부세액 곧 結價는 관이 정한 것보다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尙州에서는 토호대민이 스스로 호수가 되어 관에서 정한 결가 외에 더 거두어 들이고는, 혹 그 중 가난한 농민이 결가를 내지 못하면 돈을 빌려 내주고는 높은 이자를 받았다.479)≪日省錄≫철종 13년 7월 8일. 결가는 星州의 경우 1결당 30냥에 달했는데 이는 농민의 부담 능력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480)망원한국사연구실 19세기농민운동분과,≪1862년 농민항쟁≫(동녘, 1988).

 총액제하에서 각 지방관은 중앙에 책납해야 할 부세액과 더불어 자신의 소용 경비를 마련하고, 또한 미처 거두지 못하거나 관리의 逋欠(조세 포탈)으로 부족된 물자를 채워넣어야 했다. 이 때 가장 빈번히 활용된 것이 환곡 운영을 통해 이자 수입을 얻어, 그것을 각종 경비에 보태어 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관리와 이서배들의 포흠이 심각해지자, 환곡 운영을 통한 이자 수입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에 각 도의 監·兵·水營은 포흠분을 농지에 부과하여 결렴화하였다. 晋州에서는 환곡의 포흠분을 결렴하여 철종 6년(1855)부터 10년까지 4년간에 걸쳐 1결당 2냥씩 183,900여 냥을 농민으로부터 수탈하였다.481)≪備邊司謄錄≫25책, 철종 10년 6월 19일. 군포도 ‘軍多民少’의 현상으로 책정액을 채워 낼 수 없게 되자 부족분을 토지에 부과하기도 하였다.

 都結은 이렇게 환곡과 군포의 포흠분을 토지에다 부과하여 거두려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도결은 점차 지방의 수령이 전세·대동세 외의 제반 結役까지를 일괄적으로 징수하는 것으로 변화하면서, 결세가 지나치게 높게 매겨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철종 13년 晋州牧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도결과 결렴의 문제였으며, 開寧에서도 현감 金厚根이 부임한 지 3년 만에 도결의 잉여분 11,485냥과 도결 문서상의 1,773냥 5전을 착복하여 문제가 될 만큼 도결의 폐해는 컸다.482)≪日省錄≫철종 13년 7월 8일.

 결국 도결은 호수가 차지하던 몫이나 방납 과정에서 얻어지는 잉여분으로 조세 부족분을 충당하려는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 수령들이 직접 도결제를 운영하면서 잉여분을 늘리는 방안으로 변하고 있었다.483)安秉旭,<19세기 賦稅의 都結化와 封建的 收取體制의 해체>(≪國史館論叢≫7, 國史編纂委員會, 1989).
김선경,<‘1862년 농민항쟁’의 도결혁파요구에 관한 연구>(≪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
鄭善男,<18·19세기 田結稅의 收取制度와 그 運營>(≪韓國史論≫22, 서울大, 1990).
고동환,<19세기 부세운영의 변화와 그 성격>(≪1894년 농민전쟁연구≫1, 역사비평사, 1991) 참조.
이 때문에 결가는 계속 증가했고 향촌 제세력의 불만은 높아 갔다.

 우선 향반과 이서·토호층의 불만이 높아 갔다. 이들은 도결의 시행으로 호수가 되어 부세 수납 과정에서 누릴 수 있었던 이익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도결은 토지를 기준으로 부세가 과세됨으로써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호남·영남과 같이 결세를 농민이 부담하는 지역은 결세 증가를 농민이 떠맡음으로써 오히려 조세 부담을 증가시켰다.

 이상과 같은 전정 운영의 구조적 모순은 급기야 농민봉기로 터져 나오게 되었다. 철종 13년(1862) 전국적 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모두 13조에 달하는 田政捄弊策을 제시하고 수습에 들어갔다.484)金容燮,<哲宗朝의 應旨三政疏와 ‘三政釐整策’>(≪韓國史硏究≫10, 1974) 참조.

 기존 전결세 수취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 농민봉기의 근본 원인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응당 양전을 통한 전결의 총체적 관리와 수취 관행에 대한 근본적 개혁 방안이 포함되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전정의 ‘目下急務’가 양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양전은 졸지에 시행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결국 조선 정부가 제시한 이정책은 전정 운영의 개선책에 머물렀다. 이정책으로 제시된 주요 내용도 첫째, 田三稅 외에 科外로 결세화한 각종 명목의 부세를 혁파한다. 둘째, 간민과 이서배에 의한 전세와 대동세의 방납과 도결을 금한다. 셋째, 兩稅의 作錢邑은 호조와 선혜청의 상정가에 의하고 시가에 따르지 않는다. 넷째, 각 궁방의 면세결에서는 규정 외의 加徵을 금한다. 다섯째, 수세 과정상의 각종 역가 및 비용은 규정 외 남징이 없도록 한다는 등 수취 과정상의 현상적 문제의 치유책에 그치고 있었다.485)≪壬戌錄≫,<釐整廳謄錄>윤8月 19日 참조. 田政捄弊策은 대변통이 아닌 소변통의 방향에서 자리잡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정의 구조적 문제는 19세기 후반에도 극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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