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3. 부세제도 개선의 한계
  • 2) 전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2) 정책 추진의 실상과 한계

(2) 정책 추진의 실상과 한계

 철종 13년 농민항쟁에 직면하여 정부가 내놓은 전정이정책은, 양전을 통해 토지 소유권자와 납세자를 확인하고 전결의 소유에 따른 공평 부세를 실현하는 방향에서의 개혁이 아니었다. 단지 토지로 집중되는 규정 외의 결세 증가를 막고, 중간 수탈 구조를 배제시키며, 권력적 수탈을 방지하는 선에서 현상적 치유를 꾀했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결렴화·금납화 추세에 편승한 전정 폐단은 그대로 재현되었다.

 특히 도결은 1862년 농민봉기 이후에도 전정 운영의 모순과 폐단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즉 조선 정부가 도결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가는 군현 또는 도 단위에서 독자적으로 책정되어 농민으로부터 일괄적으로 징수되고 있었다. 그러나 도결에 의한 결가의 책정은 중앙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결가는 지역적 차별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납세자에게는 결가가 한꺼번에 부과 징수되었으나, 지역에 따라 현물을 상납하는 本色上納과 화폐로 내는 代錢納이 각기 달리 적용되었고, 대전납의 경우에도 시가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상정가로 할 것인지에 따라 부담에 큰 차이가 있었다.486)시가와 상정가의 차이에 의한 군·현별 분쟁은 철종 13년(1862) 농민봉기 이후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결가의 고액책정을 문제삼아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1875년 울산에서는 결가의 고액책정을 문제로 농민항쟁이 일어났으며, 1884∼1885년 여주에서는 금납결가를 현물납세로 돌린 데 대하여 농민층의 봉기가 일어났다(李榮昊,≪1894∼1910년 地稅制度 연구≫,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참조).

 결가가 항목에 따라 화폐 또는 현물로 따로이 상납되거나 지출되었기 때문에 이는 곧 각종의 방납 행위와 중간 농간으로 이어졌다. 지방관과 이서층은 군·현에서는 高價로 執錢하고 漕倉 근처에서 쌀로 바꾸어 상납하였으며487)≪日省錄≫고종 11년 2월 5일., 선주는 미가가 높은 곳에서 내다 판 뒤에 미가가 낮은 곳에서 쌀을 사들여 다시 상납하기도 하였다.488)≪日省錄≫고종 8년 12월 23일. 방납에 의해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고, 서울의 미가가 상승하는가 하면, 상납된 米·木의 품질이 크게 떨어지고, 상납이 지체되는 등 폐단이 발생하였다.489)≪日省錄≫고종 3년 3월 26일, 고종 15년 2월 17일 및 고종 19년 9월 5일 참조. 조선 정부의 이정책에도 불구하고, 도결·방납을 비롯한 전정 운영상의 폐단이 재현되고 일반화된 것이다.

 도결은 한편으로 보면 신분제 붕괴와 화폐경제 발전에 따른 조세 수취제도의 자연스러운 변화 현상이었다. 군포와 환곡의 결렴화는 조세 부과의 신분적 차별성을 극복하는 것이었고, 금납화는 보다 넓은 단위의 지역별 결가 책정으로 지역간 수취 차별성 해소의 전망을 지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정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전제되지 않고는 도결가의 고등화 현상과 상납제도 전반에 걸친 폐단이 시정될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大院君 정권하의 전정 개혁은 이정책의 소변통적 범주에 구애됨으로써 이전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상황은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왕조 재정의 전체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상황을 자연스럽게 조성하고 있었다.490)왕현종,<한말(1894∼1904) 지세제도의 개혁과 성격>(≪韓國史硏究≫77, 1992). 李榮昊, 앞의 책. 그것은 은행 설립과 화폐 유통의 활성화를 기반으로 한 금납조세의 실현 그리고 조세 수취의 지역적·신분적 차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근대 재정 구조의 수립과 조세제도의 실현이었다. 갑오개혁기의 지세제도 개혁은 이와 같은 19세기 전정 개혁의 실제와 한계라는 시대 상황을 통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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