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1. 청국과의 관계
  • 1) 호란 후 대청관계의 수립

1) 호란 후 대청관계의 수립

 두 번에 걸친 청의 조선침략(1627·1636)은 조선의 對明事大에 쐐기를 박았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게 하였다. 양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1637. 1. 30)은, 明의 연호를 버리며 국교를 끊고 명에서 받은 誥命冊印을 청에 바치며(2조), 청의 正朔을 받고 聖節·正朔·冬至·千秋·慶弔 등에 貢獻의 禮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 奉表하되 이들 儀節은 명과의 舊例와 같이하고(4조), 청의 征明出兵 요구시 이를 어기지 말 것이며(5조), 明人의 逋逃를 容隱하지 말 것(7조) 등이 주요 내용으로, 이는 조선의 대명관계를 의식하여 명과의 일체의 관계를 끊도록 한 것이었으나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청의 연호인 崇德이 대소문서에 쓰이고 5월 말까지는 曆書에 까지 사용되었지만, 祝辭(1638. 4. 壬子條, 校書博士 李休의 上疏) 중에는 명의 연호가 사용된 예가 있으며, 인조 17년(1639) 정월 원단에는 명을 위한 望厥禮가 행하여졌다. 그리고 이러한 禮는 이후에도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인조는 명에 호란에 대한 보고를 하려고 崔鳴吉 등을 불러(1636. 2. 9) 비밀리에 椵島를 통하여 알리려고 하였으나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의논으로 연기되기도 했다.521)崔韶子,<胡亂과 朝鮮의 對明淸關係의 變遷>(≪梨大史苑≫12, 1975), 53쪽.
4월 15일에 大司憲 金榮祖는 明朝에 빨리 陳奏할 것을 요청하였고, 최명길도 의견을 같이하였다(≪承政院日記≫권 57, 인조 15년 4월 15일).
그 후 조선의 대명관계는 청이 입관하고 명이 완전히 멸망(1662)한 이후 공식적인 관계는 끝났지만 숭명배청 의식은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조선 지도층의 의식 가운데에는 비록 국가는 망했더라도 ‘대의명분’ 즉 의리는 지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명분론이 전개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대명사대의 의식에서가 아니고 중화적인 질서에서 소중화로서의 조선 존재의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가온 대청관계는 표면상 사대의 예로서 군신관계·인질·助兵·被虜 송환·互爾喀人 쇄환·통혼·歲幣·修城·대일무역 등 여러 문제가 제기되어 조선은 많은 어려움에 당면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세폐는 인조 15년(1637;청 태종 2년)·16년에는 면제되었고, 청 태종 연간 두 번 감면이 있었으나 대부분 과중하게 부과되었다.

 인질은 인조 23년에 放還되었고, 조공관계는 역대 어느 시대보다 전형적인 하나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助兵問題는 전쟁 직후(3. 20) 인조가 영의정 金瑬·좌의정 洪瑞鳳·우의정 李聖求 및 이조판서 최명길을 인견한 장소에서 논의되었으나 마땅한 안이 마련되지 못하였고, 인조 17년에 요청이 있었으나 이행하지는 않았다. 인조 18년에는 청이 錦州衛를 공략할 때 戰船과 양곡을 요청하여 林慶業으로 하여금 戰船 120척, 군사 6천으로 助戰케 하였다. 이 때도 조선은 명에 은밀히 알렸고, 이로 인하여 인조 20년 최명길과 임경업이 심양에 압송되었다. 임경업은 호송 도중 명으로 도주하였으나, 북경 함락 때 다시 청군에 잡혔고 조선으로 압송되어 친국 도중에 사망하였다.522)崔韶子, 위의 글, 54쪽.
―――,<中國側에서 본 丁卯·丙子 兩役>(≪梨大論叢≫57, 1990), 139∼140쪽.
田川孝三,<瀋獄問題について>(≪靑丘學叢≫17, 1934).
張存武,<淸韓關係 1636∼1644>下(≪故宮文獻≫4-2).
劉家駒,<淸初徵兵朝鮮始末>上·下(≪食貨月刊≫12-10·11·12, 1983).
洪淳昶,<丙子胡亂 以後의 國內外 情勢>(≪丁仲煥博士還甲紀念論文集≫, 1974), 194쪽 등 참조.

 이 당시(인조 15년∼17년;1637∼44)가 조선의 대청관계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당시 청은 조선에 매우 위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입관 후 점차 완화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1644년 청의 입관은 현실적으로는 여진족의 중국 지배를 성립시켰고, 명왕조 회복을 시도하는 일부 復明運動者 즉 황실의 후손은 江南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조선과 청 양국관계는 정상화되면서 앞서의 전쟁시기에 비하여 현저하게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물론 상호간의 경계심이나 적대적인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청의 관심의 대상이 중국으로 확대되면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조선에 대한 강요는 다소 감소되었고 일단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청과 조선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교역과 그 밖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使行의 내왕에 의하여 제기되고 처리되는 조공관계였다. 청 황제나 조선 국왕의 의사는 문서로서 구체화되어 사행은 그 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가졌다.523)≪同文彙攷≫에 수록된 문서는 淸代 특히 인조 이후 韓中관계의 중요한 내용을 제시하여 준다. 1787년 初刊 이후 補刊하여 1881년에 이르렀다. 全帙은 10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주로 淸과의 來往文書, 崇德年間來往文書, 對淸使行錄, 詔勅錄, 聞見事件, 日本과의 來往文書, 淸에 대한 西洋事情報告 등이다. 구체적인 것은 全海宗,≪韓中關係史 硏究≫(一潮閣, 1970), 63∼64쪽 및 崔韶子,<淸朝의 對朝鮮政策 -康熙年間을 中心으로->(≪明淸史硏究≫5, 1996), 21∼44쪽 참조. 청은 조공문제를 제도적으로 잘 구비하여 법제적인 면에서나 실제면에서 세부적으로 자세히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역대의 왕이 중국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하여 형식적으로는 종속국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정이나 외교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으며 자주적이었다고 본다.

 청대 조선과의 관계를 조공관계에서 보면 전형적 조공관계와 준조공관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형적인 조공관계는 (1)경제적 관계-공물과 回賜 (2)의례적 관계-封典을 비롯하여 양국간의 의례적, 형식적 관계 (3)군사적 관계-상호 청병 및 출병 (4)정치적 관계-연호·역의 채용·내정간섭·인질 등이며, 준조공관계는 (1)정치적 관계-주로 境界 및 越境 등에 관한 문제 (2)경제적 관계-교역 (3)문화적 관계-사상·종교·문화·기예 등이다.

 청대의 조공의 종류, 임무, 구성, 貢路, 청의 대조선 사행 빈도수, 조공품목 등에 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524)全海宗, 위의 책, 30∼32쪽.

 使行의 종류는 청 태종 2년(인조 15년;1637) 이후 입관까지는 冬至·正朝·聖節·歲幣의 사행이 정기적이었으며 겸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사행은 인조 23년(1645)에 동지사의 일행에 합병되어 청 말까지 동지행은 매년 보내졌고, 이 동지행은 歲幣行 또는 年貢行이라고 불렀다. 합병된 正朝行·聖節行은 사행의 명칭으로는 소멸되었는데 聖節使의 명칭은 정조 7년(1783)·순조 9년(1809)·순조 19년·철종 11년(1860)에 예외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525)全海宗, 위의 책, 61∼62쪽.
金聖七,<燕行小攷>(≪歷史學報≫12, 1966), 8∼9쪽.
그 밖에 청대에 있었던 사행의 명칭은 謝恩使·陳奏使(奏請使)·陳賀使·陳慰使·進香使·辨誣使·告訃使·問安使·參覈使 등이 있고, 또 略使로 賚咨行·曆行·進鷹行의 3가지가 있었다.

 사은사는 청이 조선에 대해 고마운 처사를 행했을 때 그 인사로 가는 것이고, 진주사는 기별해야 될 일이 있을 때 임시로 보내는 것이다. 진하사는 청황실에 등극이나 또는 皇帝七旬賀儀 같은 경사가 있을 때, 진위사·진향사는 喪故가 있을 때 한 번에 두 가지 명목의 사신을 보내는 것이 전례였다. 辨誣使는 오해나 곡필이 있을 때 사실을 밝히기 위해 파견되는 사신이고, 문안사는 청황제가 자기 선조의 분묘가 있는 조선 국경 부근의 盛京 등지에 행차했을 때 起居問安을 하기 위해 行在所로 보내는 사람이며, 참핵사는 罪人 會査 등의 특별 사건이 있을 때 지정된 현지로 특파하는 사신이다.526)金聖七, 앞의 글, 9∼10쪽. 賚咨行·曆行·進鷹行 등에 관하여는 10쪽 참조.
全海宗, 위의 책, 61∼62쪽.
따라서 조선의 事大使行은 대체로 동지사·別使·咨行·역행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성절사와 역행만은 매년 정기로 파송되었다.

 각 사행의 임무는 복잡하였지만 表咨 등 사대문서의 전달과 조공품의 진상이 주임무였다. 이 때에 사신은 주체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人臣無外交’라는 원칙에서 중국 황제와 조선 국왕의 의사가 표현되고 있는 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만을 가졌다.

 사행의 구성 및 인원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使 2명(正·副)·書狀官 1명·大通官 3명·押物官 24명으로 구성된 正官이 30명이며, 이들을 포함해서 전체 일행은 200∼300명 내외였고, 정사·부사·서장관을 3使라고 한다. 서장관은 매일의 기록을 맡고 귀국 후 국왕에게 견문사건을 보고할 의무를 가지며 일행의 감찰을 겸하며 渡江時 人馬卜䭾을 점검하였다. 대개 사행원은 파견 시기보다 미리 임명되었으며, 사행원 중 상당수는 이미 중국에 내왕한 사람들로 麟坪大君 같은 이는 10여 차례 사행으로 갔었다.527)全海宗, 위의 책, 64쪽. 상세한 내용은 65쪽 도표 ‘遣中使行의 人員構成’ 참조.

 청대의 貢路는 명대와 큰 차이없이 주로 육로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해로에 비하여 편리하고 단거리여서 시일이 훨씬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주요 경유지로는 平壤·義州·鴨綠江·鳳凰城·連山關·遼東·瀋陽·廣寧·沙河·山海關·通州·北京이었다. 총 3,100리로 약 40일의 여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왕로는 50∼60일, 귀로는 50일 정도 소비되었으며, 북경에서의 체류는 5개월 내외였다.

 이들 사행은 의주에서 도강하기 전에 정관 이하 사행의 인원·마필·세폐·여비 기타 물품의 적재량을 국왕에게 보고하는데, 이것을 渡江狀이라고 한다. 또 柵門에 도착하였을 때도 같은 사항을 만주측 지방관에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책문보고이다. 심양 도착 후 방물의 일부는 遼東都司를 통해 북경의 황제에게 전송되었다.528)全海宗, 위의 책, 67∼68쪽.
金聖七, 앞의 글, 15∼20쪽.

 사행은 북경에 입경한 다음 날 예부에 表咨를 전달하고 朝賀時에는 미리 그 演儀를 행한 후 조하하였다. 세폐와 방물은 처음에는 예부에 呈納하였는데, 順治 이후 內務府에 表奏文을 보낸 후 내무부가 査收할 것을 황제에게 상주하여 批下된 후에 수납하여 內帑의 諸庫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국왕에 대한 回賜를 비롯하여 사행의 正官 전원과 從人 30여 명에게 하사품을 주었다. 사행의 임무가 끝나서 북경을 떠나려고 할 때에도 鴻臚寺에 통보하고 예부에 가서 소정의 의식을 행하였는데, 후에는 回咨文을 받는 것으로 그쳤다. 사행원은 이 같은 공적활동 외에 사적으로 중국학자와 접촉하여 학문적 교류도 하였다.

 사행의 빈도수는 청 초 특히 숭덕 연간에는 연평균 7차 이상이었으나 그 후 점차 감소하여 康熙 연간에는 연 2차∼3차 정도로, 평균적으로 보면 연 3차의 사행이 보내졌다. 이렇게 사행의 빈도수는 謝恩行을 제외하고는 시대적으로 그 수가 점차 감소되었고, 각종 사행의 총수도 점차 적어졌지만 입관 전을 제외하면 차이가 많지 않았다. 이는 의례적으로 규정된 경우(進賀·陳慰·進香·告訃 등과 年貢)의 사행은 감소될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529)全海宗, 위의 책, 68∼74쪽. 상세하고 구체적인 자료는<시기별 使行頻度數>(71쪽) 및<淸의 對朝鮮使行의 시기별 빈도수>(75쪽) 참조.

年代
 
1637∼1644
(8년간)
1645∼1722
(78년간)
1723∼1795
(73년간)
1796∼1874
(79년간)
備考
 
使行數
年平均
使行數

使行數
年平均
使行數

使行數
年平均
使行數

使行數
年平均
使行數

兼行
包含

兼行
包含
各種朝鮮使行
朝鮮 謝恩行
朝鮮 陳奏行
36
13
8
4.50
1.62
1.00
243
76
30
3.11
0.97
0.38
185
93
19
2.53
1.27
0.26
175
113
8
2.21
1.43
0.10
淸 勅 使 行 18 2.25 91 1.16 33 0.45 23 0.29

시기별 사행빈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2, 1977, 396쪽 참조)

 반면 청의 대조선 사행은 청의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을 뜻하는 것으로, 연평균 1차 정도의 조칙을 받았는데 2/3는 칙사에 의한 것이며 나머지 1/3은 조선 연행사절에 順付된 것이다. 청 초에는 빈도가 많았지만 乾隆 후기에는 순부의 경우까지 합쳐서 30년간에 6차밖에 없었다. 칙사는 특별한 명칭이 없었으며 그들의 임무는 조선의 연행사행의 그것과 상관된 것이었다. 다만 그 중에서 進賀·陳慰·問安·節使·倭情·洋船情形은 조선의 일방적 임무이고, 그 밖의 것은 대부분 쌍방의 상호적인 것이다. 칙사 일행은 대개 24∼26명이 일반적이며 여기에 약간 추가되는 경우도 있었다. 칙사의 영접은 조선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의 하나였다. 그리고 재정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530)全海宗, 위의 책, 75∼76쪽.

 조공제도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조공사절이 중국에 가서 조공을 바치고, 또 중국의 사절이 조선에 오면 중국이 조선의 국왕에게 回賜하는 일이다. 청대를 통하여 5번이나 재편된 ≪大淸會典≫ 3차의<事例>및<則例>또는 ≪通文館志≫를 보면 조공품의 품목이나 수량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청조에서 요구가 많았던 품목과 수량은 雍正대에 이르면 대폭 감소되어 1728년의 定額이 1894년까지 계속되었다. 건륭 연간 세폐와 방물의 품목은 별 변동이 없었으며, 1795년에는 「皇后方物永行停止」라 하였으나 그대로 실시되지 않아 1801∼3년에 진헌한 예도 보인다.

 조선은 세폐 외에도 황제·황태후·황태자에게 방물을 進呈해야 하는 등의 많은 부담을 진 데 반해, 청의 회사는 그 1/10에도 못미치는 작은 것이었다. 또한 청의 칙사에 대한 조선측의 부담 역시 매우 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행의 내왕과 관련하여 많은 예단이나 경비 부담, 後市나 변경에 있어서의 開市가 국가경제에 미치는 폐단과 손실도 매우 컸다.531)全海宗, 위의 책, 79∼107쪽.
≪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병자.
全海宗,<淸代韓中關係의 一考察>(≪東洋學≫1, 檀國大, 1971) 참조.
그러나 청도 국가재정상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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