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1. 청국과의 관계
  • 3) 1650년대 이후 북벌론과 나선정벌에의 출병

3) 1650년대 이후 북벌론과 나선정벌에의 출병

 청의 현실을 파악하고 조선의 대청관계를 누구보다도 유화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었던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인조는 ‘國有長君論’을 내세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가 바로 1649년 즉위한 孝宗(1649∼59)이다.

 효종은 즉위 후 곧 강경책인 대청 무력정벌을 시도하는 북벌론을 결의하고 그 계획과 준비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청 조정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청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대단하여, 인조의 배청숭명정책을 실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을 함께 심양에서 보냈는데 무엇이 이 두 사람의 대청정책에 차이를 가져왔을까. 두 사람의 당시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각각 유화책과 강경책을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성격에 기인한 것인지는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청 조정의 실력과 내부 사정 및 군사력을 감안한다면 강경한 대청 무력정벌은 사실상 현실성이 희박한 것이었다.

 효종 통치연간의 북벌론은 4기로 나눌 수 있는데 ① 즉위년 5월부터 1651년까지 모색기, ②1652년부터 57년까지 추진기, ③1658년부터 59년 3월까지 침체기, ④1659년 3월부터 5월까지는 재추진기이다.548)李京燦,<朝鮮 孝宗朝의 北伐運動>(≪淸溪史學≫5,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8, 195∼241쪽 참조.
禹仁秀,<朝鮮 孝宗代 北伐政策과 山林>(≪역사교육논집≫15, 역사교육학회, 1990).
車文燮,<孝宗朝의 軍備擴充>(≪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 1977).
李離和,<北伐論의 思想史적 검토>(≪창작과 비평≫10∼4, 1975).
심민식,<효종조 북벌론의 성립과정에 대한 연구>(高麗大 碩士學位論文, 1987).
李迎春,<尤庵 宋時烈의 宗主思想>(≪淸溪史學≫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5).
효종은 10만의 정예 포병을 양성하여 기회가 오면 중원으로 쳐들어갈 것을 구상하였는데, 북벌을 담당할 인물로 척화파를 심중에 두었다. 그리하여 효종은 산림인 金集·宋時烈·宋浚吉 등을 중용하고 영의정이었던 金自點 일파를 축출하였다. 김자점은 李聲長을 사주하여 새 임금이 훈신들을 몰아내고 신진사류를 중용하여 장차 병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쳐들어 가려 하고 있다고 청나라에 밀고하였다가 축출되어549)李肯翊,≪燃藜室記述≫권 30, 孝宗朝 故事本末, 金自點獄 淸使査問. 훈구세력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당시 북벌론의 대표는 효종과 송시열인데, 이들 두 사람은 북벌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되었지만 그 배경과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효종 즉위년에 송시열은 己丑封事 상소를 올려 북벌을 위한 방법으로 正君心·安民을 먼저 수행해야 할 과제로 보았다. 반면에 효종은 직접적인 군비 확충을 통해 북벌을 이루려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그 나름의 급박한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도 컸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북벌론과 관련하여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논하기도 한다.550)禹仁秀, 앞의 글, 100∼101쪽.

 또 治人의 문제에서 효종은 修身으로부터 치인으로 이행하는 유교의 통치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효종은 치인의 상대적 독자성을 강조하고 상황 인식이 매개되므로써 치인을 보다 중시하였다. 자신은 수신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치인이 가능하고 북벌은 치인의 실천적 과정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송시열은 치인이란 단지 後末일 뿐 수신이 모든 일의 先本적인 것이라 보았다. 즉 수신이 치인의 선결과제이며 북벌은 단지 治者 즉 효종의 수신의 자연적인 결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또 효종의 복수는 인조의 치욕을 갚고자 함이고 호란에서 당한 국가적 굴욕과 민족적 치욕에 대한 국왕으로서의 복수와 설욕이며 인질생활에서 받은 수모와 박해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였다. 따라서 명을 위한 복수의 뜻은 없었으며 그 허구성이나 존재마저 부정하였다. 반면 송시열은 명나라를 위한 복수이고, 설욕은 三田渡의 치욕을 씻고자 함이었다.

 대명·대청관에서 효종은 명이나 청은 이민족 국가로 복수의 대상이지만 우리보다 우수한 문물제도가 있다면 수용해야 된다는 개방적 대외관을 지녔다. 반면 송시열은 명을 中華이며 君父의 나라이고 선진 문명국이라고 했던 것에 비해, 청은 오랑캐로 군부의 원수이며 금수와 같은 미개국이라는 것이다. 즉 효종이 실리주의자라면 송시열을 명분주의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복수의 방법은 효종은 무력적 수단 즉 정벌을 구상하였는데, 송시열은 사상적 수단으로 복수를 바라는 尊中華 攘夷狄의 春秋大義였다.

 軍備觀에서 효종은 降雨之備였고 ‘不可已論’으로 직접 무예를 익혀 준비한 반면, 송시열은 自焚之禍로 인식하였고 忍痛含寃하여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551)李京燦, 앞의 글, 186∼194쪽 참조. 이렇듯 이들은 목적은 같았지만 방법론이나 사상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효종은 자신의 북벌 의지와 계획이 청의 의구심을 자아낼까 염려하여 기밀 유지에 신경을 쓰고 사신 접대나 세폐보내는 것에 만전을 기함으로써 분쟁의 빌미를 사전에 막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호란 이후 조선사회에 반청풍조가 만연하여 청나라 사신이 도착하는 곳마다 척화설이 나돌아 그들의 신경을 자극하였고 금지된 군비를 시행함으로써 청의 감시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650년 3월 청의 칙사가 査問하러 오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지만, 이 일은 영의정 李景奭 등이 義州로 귀양가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그 후 효종의 북벌계획은 한때 주춤하였고 청은 온갖 명목으로 사신을 보내 조선정부를 감시하였다. 효종 원년과 2년에 각각 9회, 7회 청의 사신이 파견되었다는 사실로도 그들의 감시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효종 2년(1651) 청의 실권자인 섭정왕 도루곤의 사후 두 번 세폐를 감면받고 사신의 파견 횟수도 줄었다. 이는 중국 본토 내에서의 질서회복과 더불어 완화된 것이다.

 효종이 본격적인 북벌준비를 한 것은 즉위 후 3년부터인데 북벌 진영을 구축하기 위한 인물로 병조판서 朴遾를 임명하였으나 1년 후 사망함으로써 신임 병조판서 元斗杓와 李浣이 담당하게 되었다. 효종은 특히 武士선발에 힘을 기울여 대신들에게 책임지고 무사를 몇 사람씩 천거토록 하였으며, 효종 4년 9월에 시행된 觀武才에서 최우수자에게 파격적으로 守令을 제수하였다. 효종 5년에는 지방 북벌준비 사업을 전담할 전위대인 營將制度를 부활시켰고, 監司와 兵使에게 각각 전술 전략권과 군사 지휘권을 전담시키고, 유사시에 문무관의 연합작전체제로 전환토록 함으로써 야전전략의 극대화를 도모하였다. 즉 특별히 선발한 무사들을 수령이나 병사·水使·營將 등에 임명하여 지방에서의 북벌준비 사업을 전국적인 규모로 추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효종 6년(1655) 9월 효종은 세자와 원두표·이완 등과 어영신군·지방군 등 1만 3천여 장병을 거느리고 노량 백사장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벌임으로써 북벌 진영의 위용을 과시하였다.552)李京燦, 위의 글, 201·204·205쪽.
≪孝宗實錄≫권 15, 효종 6년 9월 경술.

 한편 효종은 북벌사업의 준비로 즉위 후 3년 6월 친위대인 어영군을 증원한 데 이어 제도개혁을 단행하였고 어영청의 구성원 審上·給保 등의 체제를 개편하여 하나의 독립된 군영으로 확장시켰다. 동시에 禁軍제도를 개혁하여 기마병을 600騎에서 1,000기로 증가시켰다. 또 심양체류 중 세 번에 걸쳐 참여했던 征明戰의 종군 체험을 살리고 자신의 대청 군사 지식을 최대로 활용하여 전술과 병기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그 취약점을 개선하려 하였다. 이는 청군의 ①기마전에 필적하기 위한 기존의 기마전법 보강 ②전투에 불편한 견갑과 장갑의 제거 ③평야전에서 유리한 긴 화살 제작과 近射法 연마 ④청군 병기에 대적하기 위해 보병은 長柄劍, 기병은 短柄劍으로 대체 ⑤비바람에 무용지물인 현행 수어청 火炮隊를 射炮參半隊로 전환하여 전천후 군대로 양성 ⑥군병에게 木楯을 무장시켜 청병의 화살 및 돌을 방어케 한 것553)李京燦, 위의 글, 208쪽.
≪孝宗實錄≫권 9, 효종 3년 9월 임신·권 17, 효종 7년 10월 정축 참조.
등이었다.

 효종의 10만 북벌군 양성은 대사헌 金益熙의 養兵論에 근거한 것으로 병농분리를 선결 과제로 30세 이상 귀족자제·충의품관·교생·서얼, 25세 이상의 不科業者 등으로부터 매년 1인당 정포 2필씩 거두면 10만의 군병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료들의 반대로 실행은 보지 못하였다. 또 차선책으로 효종 7년 노비 추쇄사업이 시도되었으나 이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사실 북벌운동의 추진 과정에서 효종은 산림의 등용을 꺼렸고 적지 않은 부작용과 시행착오도 있었다. 조정에서도 문무대신의 대립이 깊어지면서 문치위주의 기존의 전통적 통치체제에서 효종의 무치주의는 간접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효종의 문신 냉대와 형벌 또한 그러했고 그의 전제정치에 대한 비판도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조선내 사정은 북벌론을 실천할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부족하였고 여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여하튼 효종 10년 건강이 회복되면서 송시열과 독대를 하였는데 효종은 불안정한 중원 정세, 청 조정의 기강 해이, 崇文賤武의 풍조 성행과 중국 同化, 북부 중국(요동·심양)의 무방비, 한인과 조선 被擄人의 대응 등의 외적 조건과 그리고 자신의 지모, 양호한 건강, 군사 지식 및 중국 지형의 숙지 등의 내적 조건들이 북벌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554)≪宋書拾道≫권 7, 雜著 幄對說話. 이러한 효종의 제안에 대해 송시열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두 사람의 이견도 좁히지 못하였다. 독대 이후 효종은 친정체제를 강화하면서 북벌 준비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효종 10년 5월 4일 급서함으로써 1650년대의 북벌론은 일단 좌절되고 말았다.

 효종 재위 10년간의 북벌론은 이민족인 청의 침략으로 겪은 국가적 굴욕과 민족적 치욕에 대한 복수에서 비롯되었지만 유비무환의 국방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사회적 대립이 심화되었던 당시 조선사회에 국론 통일의 명분을 제공했고 왕위 계승의 명분과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의 정치·사회·경제의 현실을 참작할 때 북벌론의 시행은 어려운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효종의 북벌론이 羅禪정벌의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청조가 흑룡강 방면의 나선(羅刹, 羅車, 羅沙, 羅叉, 老察, 羅先, 虜車라고도 쓰며 러시아어의 譯字임) 정벌을 위해 조선에 군사력을 요청한 것은 효종 5년과 9년의 일이다. 2번에 걸친 군사 파견에 앞서 1650년대의 중국내 사정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 흑룡강에서의 청조와의 문제 등에 관하여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청조의 중국 입관시 황제는 順治帝(1644∼1661)로서 통치 초 어린 나이였기에 섭정으로 도루곤과 지르가랑(濟爾哈朗)이 정치를 도왔고 특히 도루곤이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651년 도루곤의 사망으로 吳良輔가 지르가랑과 순치제의 통치를 보좌하게 되었다. 순치제는 학구적이고 의식있는 젊은 황제로 1651년까지도 한자나 중국어를 잘 몰랐으나 몇 년 안되어서 공적인 보고서에 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한자를 읽고 쓰는 실력이 늘었다. 그리고 중국 문학작품이나 禪宗의 불교 서적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과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서양 문물을 습득하였다. 1644년 입관 이후 순치제는 우선 북경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방을 청의 세력권으로 끌어 들였고 李自成 등 반란자들을 진압해 갔다. 그리하여 1년∼2년 후 청은 청에 투항한 명나라 降將들의 도움으로 대략 강남지방까지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復明運動者들 즉 명 황실의 후손들이 南京·福州·肇慶 등지에서 명조 회복을 시도하였고, 그 중 臺灣으로 건너간 鄭成功 일족의 복명운동을 제외하고는 1661년 서남지역에서의 桂王의 복명운동을 마지막으로 일단락된다. 이렇게 청조는 중국내 세력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1642년 청조에의 복속을 인정하는 다라이 라마의 북경 방문, 1653년 유구왕의 조공, 마카오를 중심으로 무역 활동을 하던 포르투갈의 광동 진출, 1655년 러시아 무역 사절의 북경 방문, 1656년 화란 사절(Peter de Coyer, Jacob de Keyzer)의 북경 방문 및 1658년의 1貢 결정 등555)A. Hummel ed.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1943∼44, p.256.이 있었다. 이로써 청조는 중국 지배를 확립했고, 더불어 서양 제국 및 주변국가도 교역을 중심으로 청조와의 관계를 새롭게 시도하였다.

 러시아가 흑룡강 주변에 등장한 것은 1650년경이었다. 러시아는 유럽 국가 중 가장 후진적이고 발전이 늦었던 나라로 17세기 초 로마노프 왕조가 성립되어 유럽 북동부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지만, 시베리아 진출은 그 이전 이미 1580년대 이후 코자크(Cossack)에 의하여 시작되었었다. 예르마크(T. Yermark)가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한 데 이어 탐험가,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 정치범, 기타 수형자들이 시베리아로 흘러 들어가 러시아인들은 1세기도 못되어 태평양 연안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1643년 야쿠츠크(Yakutsk)의 지사 골로빈(T. A. Golovin)이 여러 원정대를 파견하였는데 그 중 포얄코프(V. Poyarkov)는 興安嶺을 넘어 흑룡강 하구에 도달하였다. 하바로프(E. Khavarov) 등은 흑룡강 탐험을 계획하여 1650년 흑룡강에 도달하여 索倫部를 함락시켰다. 1651년 雅克薩城을 함락시키고 흑룡강 右岸에 알바진(Albazin)城을 건설하여 그들의 군사기지로 삼게 되었는데, 러시아인들에게 흑룡강 연안은 무진장의 금은 광업, 풍부한 가축떼 등 살기 좋은 부유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한편 청조는 만주를 선조의 발상지로 중시하였는데 러시아가 이 지역에 진출하여 축성을 하고 흑룡강 지류인 송화강에서 물자를 약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청조는 1652년 7월 沙爾虎達(사이호달;梅勒章京)·海塔(해탐;甲喇章京)과 尼噶禮(니갈례)에게 영고탑에 주둔하면서 관병을 다스리게 하였다.556)≪淸世祖實錄≫권 66, 順治 9년 7월 정해. 그런데 두달 후 영고탑의 海塞(해삭;駐防寧古塔章宗, 海色으로도 표기)이 布福(포목;捕牲翼長)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흑룡강의 烏札拉村에서 羅刹과 전투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 1653년 5월 沙爾虎達을 영고탑 지방을 지키는 將(昂邦章京鎭守)으로 삼고557)≪淸世祖實錄≫권 68, 順治 9년 9월 병술·권 75, 順治 10년 5월 갑술.
≪平定羅刹方略≫順治 9년 9월 병술·順治 10년 5월 갑술 참조.
다음 해 明安達禮(명안달례;尙書都統)에게 북경수비대를 이끌고 가서 러시아군을 격파시킬 것은 명하였는데 이 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흑룡강 상의 러시아 정벌과 관련하여 조선이 원병의 요청을 받은 것은 禮部差官 韓巨源을 통한 咨文이다. 조선의 접반사들은 청의 차관이 온 목적이 請兵에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러시아와의 충돌에 관한 사실은 몰랐었다. 자문의 내용은 조선은 鳥槍善手 100인을 뽑아 회령부에 보내 昻邦章宗(앙방장경)의 지휘하에 나선정벌을 위하여 3월 10일에 영고탑에 도착하라는 것이었다. 효종이 나선이 어떤 나라인지 물었더니 韓巨源은 영고탑의 곁에 별종이 있는데 이들이 나선이라고 하였고,558)≪孝宗實錄≫권 12, 효종 11년 2월 계해.
申瀏,≪北征日記≫(申基碩 譯, 探究堂, 1980), 16∼20쪽.
Lo∼shu Fu Comp, A documentary chronicle of Sino∼Western relation(1644∼1820), Rainbow Bridge Book Co. 1975, Taipei, pp.14∼15.
특히 鳥銃에 관하여는 李康七,<朝鮮孝宗朝 羅禪征伐과 被我鳥銃에 관한 小考>(≪古文化≫20,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82), 15∼18쪽 참조.
조선과 청조측의 자료에 관하여는 稻葉岩吉,<朝鮮孝宗朝における兩次の滿洲出兵について>(≪靑丘學叢≫15·16, 1934) 참조.
北道의 邊將을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효종은 영의정 鄭太和와 논의하여 渡江 후 군량을 우려하고 北虞候 邊岌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1차 원병은 변급의 인솔로 3월 26일 두만강을 건너서 4월 16일 청병 3천과 함께 영고탑으로 향하여 27일 厚通江(松花江)에 이르렀고 28·29일 러시아군과 접전하게 되었다. 이 때 조선의 군사력은 100명의 조총수, 20명의 火兵, 30명의 隨率로 150여 명의 인원과 마필 및 군량 10일분(회령∼영고탑까지)이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好通(佳木斯)까지 후퇴하였는데 조선측은 사상자가 없었다고 한다. 5월 초에 주위 5里에 土城을 쌓아 놓고 16일 回軍하여 6월 13일에 영고탑에 돌아와 21일 전원 무사히 귀국하였다.

 1차 출병에 관하여≪淸實錄≫에는 별반 언급이 없고≪孝宗實錄≫이나≪承政院日記≫·≪同文彙考≫ 등만이 참고자료로서 활용될 뿐인데 청조가 어떤 배경에서 요청을 한 것이며 조선군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또 어떤 효과를 거두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그러나 2차 출병(1658)에 관하여는 참여하였던 申瀏 장군의≪北征日記≫와 裵是愰의≪北行日錄≫ 및≪車漢日記≫를 통해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고≪청실록≫이나 魏源의≪聖武記≫(卷 6, 國朝俄羅斯盟聘記)에서 순치 15년에 高麗兵을 조발하여 이들을 쫓았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1658년의 출병을 통해 그 전쟁의 전모와 의의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선과의 전투 다음 해인 1655년 청조는 尙書都統 明安達禮로 하여금 송화강 깊숙이 들어 온 나선을 몰아내고 呼瑪爾河口에 있는 그들 근거지를 추격하게 하였다. 57년에는 沙爾虎達(鎭守 寧古塔 昻邦章京)이 출정하여 尙堅烏黑에서 싸웠다. 그러나 흑룡강에서 나선의 세력을 제압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고 58년에는 재차 조선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은 칙유에서 ‘조선 국왕 李淏는 이제 나선이 우리 변경을 침범하여 生民을 못살게 굴어 토벌하려 하니 만주 군사를 내는 데 앞서 빨리 조총을 잘 쏘는 鳥鎗手 200명을 선발하여 모든 필요한 물자를 완전히 준비하여 적당한 관헌의 통솔하에 5월 초순까지 영고탑에 도착하도록 하라’는 것이었고, 예부의 공문에는 특히 군량의 준비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식량의 현지 조달이 곤란하니 조선군의 식량은 조선국이 스스로 변통하되 왕복 일자를 계산해서 운반함이 좋을 것이라는 사이호달의 의견에 따라 통지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효종은 조선이 자체 부담하라는 칙서와 예부공문에 대해 사정은 딱하지만 응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가 回啓(1658. 3. 7)에서 내용대로 거행하겠음을 말하였다.559)≪淸世祖實錄≫권 115, 順治 15년 2월 병술.
≪同文彙考≫ 原編 76, 軍務.
申瀏,≪北征日記≫(飜譯本, 1980), 18쪽.

 2차 출병에서는 신유(咸北兵馬虞侯)를 총병관으로 조총수 200명과 哨官旗鼓手·火丁 등 60여 명과 필요한 물자를 준비하고 군량은 1차 때의 84일 선례에 따라 3개월 분의 양을 가지고 5월 초 두만강을 건너 영고탑으로 향하였다.560)이 때의 군사력을 영고탑정병 6만, 북경정병 5만, 심양군사 8천, 登州군사 8천, 몽고군사 8천이며 정박해 있는 배는 18여 척이었다고 한 것은 通官을 통해 신유가 알아본 것이다(≪北征日記≫5월 11일조 참조). 그러나 실제 종군한 군사는 5천이고 적군은 천여 명이라고 하였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고 군량은 差官 李一先이 처음 5개월 분을 요구하였었다. 조선군은 6월 5일 庫魯河에서 승선하여 하류를 따라 三姓지방을 거쳐 송화강 본류로 나가 6월 10일에는 흑룡강의 합류천에 이르렀다. 이 때 스테파노프(O. Stepanov)의 함대와 만나 격전을 하였는데, 조선 조총수의 위력을 과시하였고 나선의 지휘관 스테파노프는 전사하였다. 조선군도 8명이 전사하였지만 큰 전과를 세웠다.

 청의 출병 요청은 2차 때 더 분명하지만, 그들이 말한대로 나선이 청나라 변경을 괴롭히는데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북정일기≫에 의하면 曰介·介部漊·愎介 3국은 본래 영고탑의 부용국인데 청의 통일 후 藩邦으로 있었으나 車漢國(러시아)의 진출 후 청과의 관계가 끊어져 曰介 출신의 사이호달을 시켜 이 지역을 평정하게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조선에 출병을 요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리상 영고탑에서 가까운 곳이 함경북도의 회령이라는 점도 작용하였다. 2차 출병시의 군대를 보아도 짐작되지만 참가 군사는 북경의 일부 정병을 제외하고는 만주지역과 가까운 등주나 심양 그리고는 청의 지배하에 있는 몽고군이나 조선군이었다. 출병 요청은 청조로서는 당연한 요구였으며 효종의 대청 북벌의 의지를 꺾고 조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편 조선 출병의 전과는 1차 때에 비하여 2차 때에 더 컸다는 것이 청측 사료에서나 참전 지휘관들의 일기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특히 신유의 작전 성공이 크게 기여하였다. 전투가 본격화된 것은 6월 10일부터인데 처음 청군은 전면전으로 많은 병력을 잃었으나, 그 후 조선군은 적을 유인해 오면서 풍세와 풍향까지 이용하고 敵船의 포의 구조·화력·탄알의 양까지도 추량하여 14일 火攻法으로 나선의 함대를 격파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561)稻葉岩吉, 앞의 글, 54∼55쪽.
申瀏,≪北征日記≫, 95∼105쪽 참조.
이 전투에서 나선군은 일단 흑룡강 상에서 퇴각하였으며 조선군도 송가리 강구에 돌아왔으나(6. 24) 청측은 나선의 재침을 우려해 1659년 봄까지 주둔하면서 이 지역을 지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유와 사이호달 간에 논란이 오갔으나 敦拜(돈배;瀋陽昻邦章京으로 부원수) 등의 도움으로 11월 18일 영고탑을 떠나 12월 12일 회령으로 귀국하였다. 이 나선정벌에의 출병으로, 특히 2차 때 조선군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승전에 기여하였다.

 이 두번의 출병은 조선으로는 예기치 못한 일이었지만, 조선의 군사력 특히 조총수가 흑룡강 유역에까지 진출하여 실력을 발휘하였고, 러시아군과 처음으로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 연간에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상호 모순적인 측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효종의 적극적인 북벌 준비가 없었다면 출병 요청을 거절할 구실도 좀더 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므로 효종의 북벌정책의 평가에서 재고의 여지를 가진다.

 그 후 조선의 북벌론은 1670년대에 가서 재개되지만 1650년대에 비하여 그 규모나 성과는 크지 못하였다. 효종의 북벌 계획은 와해되었지만, 현종(1660∼74)과 숙종(1675∼1720) 연간에도 북벌 논의는 계속되었다.

 1673년 羅碩佐의 북벌 요청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67년 長津別將이 설치되었고 74년에는 茂山에 새로운 鎭을 설치하고 僉使를 북의 三峯坪으로 옮기는 한편 魚面堡를 厚州로 이설하였으며 萬戶를 劍使로 승격시키는 등 북방의 개척과 방어를 위한 시설을 진행시켰다. 북벌론은 숙종 즉위 초(1675) 尹鑴에 의해 논의되었으나 許積의 신중론과 대립되어 구체화되지 못하고 四郡을 復設하여 압록강 방면까지 北擴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고 4군은 그 뒤 폐지되었으나 백두산 정계비 査定 후 다시 복설의 여론이 일어났다.

 특히 1670년대의 조선의 북벌론은 청조의 三藩의 亂(1673∼81)으로 중국내 불안을 틈타 일어난 것이 특징이다. 滅滿興漢의 기치하에 吳三桂(平西王)·尙可喜(平南王)·耿繼茂(靖南王) 등 明의 降將들이 광동·운남·복건 등지에서 일으킨 반란은, 발생 4개월 뒤 청에 入朝하였던 사신에 의해 조정에 알려졌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내 정세 변화를 소상히 알고 있었던 것에 비해 한발 늦은 것이다. 또 반란 7개월 만에 臺灣에서 복명운동을 하던 정씨 일가의 鄭經(조선측 기록에는 鄭錦)이 조선을 칠 것이라는 소식이 대마도 太守 平義眞으로부터 전달되었다.

 한편 康熙帝(1662∼1722)는 兵部 요청에 의하여 삼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총의 取用을 구상하였는데, 현종이 사망함으로써 연기되었다가, 숙종 즉위년(1674) 入朝한 진위사 겸 진향사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조선에게 축성을 허가하는 대신 화포 50여 포의 급여와 원병 요청562)≪肅宗實錄≫권 1, 숙종 즉위년 11월 병인.
≪備邊司謄錄≫31책, 숙종 원년 3월 20일.
李肯翊,≪燃藜室記述≫권 31.
을 하였던 것이다. 숙종은 관계 대신들을 소집하여 논의하였으나 반대 의견이 중심이 되었다. 그 이유는 毛文龍의 출병 요청시 파병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고 삼번의 난이 명조 재건을 내세웠다는 점과 청이 앞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판단하에 명이 다시 회복될 경우 설득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허적은 청의 요청을 거절할 경우 일어날 사태를 우려하여 파병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해야 될 것이라고 하였다. 예조판서인 權大運도 조선이 자강책이 없이 청병을 거절할 경우, 청의 위협을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우려하였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修撰 任相元은 찬성한다고 파병할 수도 없고, 반대한다고 기존의 관계를 단절할 수도 없는 것이 조선의 입장이지만, 조선의 당면한 어려운 실정을 내세워 현실 정세하에서는 도저히 청병에 응할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전언해야 된다고 하였다.563)≪肅宗實錄≫권 1, 숙종 즉위년 11월 임신.
조선측에서 鄭錦이라고 불리우는 인물은 鄭成功의 아들 經(一名 世藩, 兒名 錦舍)을 이른다. A. Hummel, 앞의 책, p.111쪽 참조.
결국 반대론으로 기울어져 파병하지 않았으며, 청조는 그 후 재차 요구하지 않았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564)≪肅宗實錄≫권 3, 숙종 원년 5월 갑술.

 한편 북경에서는 조선이 鄭錦과 함께 청을 침입할 움직임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 이런 와언은 조선에도 유포되고 있었다. 사실 대만의 정금 선박이 일본을 내왕하는데 제주는 그 통로였기 때문이다. 삼번의 오삼계와 정금은 排淸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윤휴 등은 북벌론을 주장하고 정금과의 통교를 주장하였다. 윤휴는 청에 대한 복수를 주장하면서 정금이 현종 15년에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정금의 조선 침입설을 청에 통보하여 국력 강화의 명분으로 역이용하고 조선이 먼저 정금에게 사신을 보내 성의를 표하면서 그의 침입을 모면하자는 것이었다. 윤휴의 이러한 주장은 청이 반드시 패배할 것이니 정금과 통문하여 사전에 그의 침입을 막자는 것이었다.565)洪鍾必,<三藩亂을 前後한 顯宗∼肅宗年間의 北伐論>(≪史學硏究≫27, 1977).
韓㳓劤,<白湖尹鑴硏究>(≪歷史學報≫19, 1962) 참조.
이러한 의견은 허적의 강한 반대로 철회되었지만 그 여파는 상당한 것이었고 동조하는 여론도 컸다.

 한때 청 조정에서는 조선이 반란세력과 연합할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정금의 海商들이 조선의 笠帽를 사가지고 가서 청군과 對戰할 때 그것을 쓰고 조선의 복색을 차려 입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청으로부터 連兵의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566)≪肅宗實錄≫권 4, 숙종 원년 6월 경신.
청의 조선에 대한 의구심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타나는데 병력이 南征에 투입되어 만주 방비를 아동들에게 맡기면서 조선 침략에 대비해 栢峴(영고탑 남방 일일 정도 거리)방비에 동원하였고 매월 봉황성일대에 군병을 파견하여 압록강 하류를 순찰시켰다. 또 숙종 3년 청의 지도 밀반출사건 등도 그 예이다(≪肅宗實錄≫권 3, 숙종 원년 5월 갑술·권 5, 숙종 2년 12월 신미·권 6, 숙종 3년 5월 임오 및≪備邊司謄錄≫31책, 숙종 원년 5월 19일·33책, 숙종 3년 5월 7일 등 참조).
정금의 이러한 위장 전술은 윤휴의 주장대로 조선에서 먼저 통신사를 파견했다면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같이 1650년대에 이어서 70년대에도 북벌론이 재개되었지만 실천의 가능성은 희박했고 명분론적인 측면도 강하였다. 그러나 청조가 삼번의 난을 진압하여 중국전토에서 세력을 완전히 확립하게 되고, 80년대에 이르러 주변 지역에까지도 통치권을 확립시킴으로써 대조선 정책도 일단 안정되었다. 이후 양국관계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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