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1. 청국과의 관계
  • 4) 백두산 정계비 문제

4) 백두산 정계비 문제

 영토란 국가와 국민 사이를 연결하여 주는 주요 요소로 국가 권력의 기초가 되며, 그 관할권은 국경을 경계로 이루어진다. 또 국경선이란 역사적으로 볼 때 영구 고정성의 개념보다는 이동적 개념이 컸다. 경계획정을 위한 전쟁도 적지 않았으며 이런 경우 전승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자국에 유리하게 영토 확대 확보를 위한 국경선을 수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 경계선이 불분명할 때는 상대국과의 상호 교섭에 의한 조약과 같은 협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런 경우 자연·지리적 조건, 역사적 영유권과 실질적 거주민의 현황들이 참작된다.567)柳炳華,<國際法上 영토의 개념 및 그 권한>(≪영토문제연구≫창간호,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83), 73∼100쪽 참조.

 조선의 변경은 백두산 동쪽의 동북지방과 압록강 연안지방을 지칭하는데 조선과 청국 간의 국경획정론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에서 비롯된다. 호란의 결과 체결한 강화조약에서 “조선국은 金國과 더불어 서약한다. 우리 두 나라는 이미 화평과 우호를 강구하였으니 이후 두 나라는 이 서약에 준하여 각기 경계를 封하여 지킨다”568)≪仁祖實錄≫권 15, 인조 15년 2월 신유.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서약을 하였으며, 두만강과 압록강 對岸에 封禁지대를 설정하고 양국인의 거주를 금하여 무인지대의 국경지역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서 강역 엄수는 영토 확보 관할의 의미보다는 월경을 엄금한다는 의미였다.569)金聲均,<朝金間犯越刷贖還問題酬略考>(≪史學硏究≫18, 1969) 참조.
崔韶子,<中國側에서 본 丁卯丙子兩役>(≪梨大論叢≫57, 1990), 131쪽.
그런데 1644년 청조의 입관 이후 본연의 근거지인 만주는 점차 空曠해져 갔으며 선조 발생의 성지라는 명목으로 인적을 용납하지 않는 봉금지대로 묶였다. 청이 이 지역에 봉금 國境帶를 설치한 중요 원인은 한인이나 조선인이 이입하여 청을 위협하는 세력이 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6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 조정은 삼번의 난을 진압(1681)하고 대만을 평정(1683)하여 중국 지배의 기틀을 완성시켜 가면서 주변 지역에의 진출, 정리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흔히 백두산 정계비의 건립배경으로 1710년 渭原人 李萬技가 월경하여 採蔘한 후 淸官을 살해한 사건을 들고 있다. 그러나 청으로서는 초기부터 백두산(長白山)을 신성시570)백두산을 신성시한 것은 여진의 시조 布庫里雍順의 전설에 기인한다. 그 전설의 내용은 劉鳳榮,<白頭山定界碑建立과 간도문제>(≪백산학보≫13, 1972), 77쪽 참조.하였으며 강희제 역시 같은 관심을 보였다. 강희제는 1677년 內大臣 覺羅武黙納과 侍衛 費耀色들을 불러 장백산은 祖宗 발상의 땅인데 지금 이곳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으니 烏喇장군에게 명하여 도로를 자세히 아는 사람을 앞세우고 현지를 답사하고 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묵납 등이 다녀온 후인 1678년 정월 장백산의 神을 封하고 동시에 五嶽과 동일하게 제사지내게 되었다. 1684년 11월에는 內閣學士 范承勳을 장백산에 보내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그 등산로를 조선 경내에서 찾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1691년에는 북경에 갔던 우리 사신의 장계 중에는 “청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영고탑 경유로 장백산에 갔던 대신 5명을 조선으로 보내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장백산을 다시 살피게 하였는데 조선 지방관은 이 지역 지리를 잘 모르고 있었으므로 淸人이 이곳을 답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국방상 중요한 국내 요지, 즉 교통로를 알려 주게 되는 것이므로 그 목적이≪大淸一統志≫를 편찬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에 협조할 수 없다는 조선 조정의 반발이 있었고, 1692년 2월 취소되었다.571)≪同文彙考≫ 原編 48, 疆界.
≪康熙實錄≫ 권 152, 康熙 30년 7월 기축.

 그러나 백두산 정계비 설치와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封禁 국경 지역이 산삼의 다수확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인삼 채취를 위하여 월경하여 양국간 외교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청조는 1664년 議政王 貝勒·貝子과 大臣들의 회의에서 조선인이 越界해서 채삼이나 벌목을 하지 못하도록 조선 국왕에게 이첩해서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고 결정한 바가 있고 우리 조정에서도 이를 준수해 처벌하였다.572)劉鳳榮, 앞의 글, 79쪽. 그런데 숙종 때 이르면 월경사건이 너무 많아 조선과 청국 간에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1680년∼1712년까지 33년 동안 18번의 월경사건이 있었는데 숙종 6년(1680)·11년·16년의 경우는 청국으로부터 죄인을 심판할 칙사가 와서 숙종과 동석하며 월경사건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특히 숙종 11년의 三道溝 월경사건은 首犯 韓得完 등 25명이 월계하여 청국관원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것인데, 조선 조정에서는 사건의 중대함을 감안하여 범인의 체포는 물론 관계 지방관까지 구금하자 자살자가 속출하였으며 조선의 국왕에게도 벌금 2만냥이 부과되었다. 이 때 북경에 갔던 陳奏使 鄭載崙는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辯解書를 예부에 제출하였다가 분노를 사서 양국관계가 악화되기도 하였다. 숙종 16년의 厚春事件, 20년의 慶源사건, 37년의 渭原사건은 칙사가 오가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사실 조선인의 만주로의 월경도 문제지만 청인의 조선으로의 월경도 많았는데 그 경우는 대개 수십 명씩 집단 월경하여 조선측 파수병 또는 관원을 납치해 갔지만 조선으로서는 그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한편 청조는 국내 안정 및 영토 확대 등이 이루어지면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측지 기술을 이용해서 중국의 전영토를 실측하여 지도 작성을 구상하고 있었다.573)康熙帝의 勅命에 의하여 중국에 머무는 선교사들의 각 지역 측량은 1708년에 시작되어 1717년에<皇輿全覽圖>가 완성되었다. 만주와 내몽고 일대의 실측은 1709년 레지스(Regis), 자르뚜(Jartoux), 후리델리(Frideli)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런데 만주지역의 측량과 지도 작성에는 두 나라가 확정한 국경선을 그려 넣어야 하므로 청은 조선에 지리학자를 파견하여 조선 조정이 보관중인 지도를 복사하여 가지고 가서 두 나라의 국경을 작성하였다574)이 때 청은 測地審判部 관리를 조선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1735년 듀알트(Du Halde)의≪中國帝國全誌≫(Description de L`Empire de la Chine et Tartarie Chinoise)에 첨부된 레지스의 비망록 중 ‘조선에 관한 지리적 고찰’에서는 당시 국경선은 봉황성 동쪽에 있는 柵門임을 표시하고 서북쪽의 국경은 봉황성의 동편이고 동북쪽 국경은 흑산산맥으로 이어지는 영역이라고 하였다
梁泰鎭,≪韓國 邊境史硏究≫(법경출판사, 1990), 15∼17쪽.
金得榥,<조선의 북방강계에 관하여>(≪백산학보≫41, 1993), 138∼139쪽.
고 한다. 그 구체적인 진행 과정이나 내용에 관하여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만주지역의 실측이 백두산 정계비 설치에 있어서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어 강희제는 1711년 5월 대학사에게 유시하여, 장백산의 서쪽은 중국과 조선이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토문강은 장백산 동쪽 변방으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의 서남쪽은 조선에 속하고 동북쪽은 중국에 속하여 역시 이 강으로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의 지역은 어디에 속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므로 穆克登(烏喇總管)을 파견하여 국경을 조사하게 하였다.575)≪康熙實錄≫권 246, 康熙 50년 5월 계사·8월 신축.
≪淸史稿列傳≫朝鮮, 康熙 50년 5월.

 조선은 백두산 정계비의 건립(1712년 5월 12일) 직전인 2월 24일 청 예부의 咨文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작년 8월 목극등이 봉황성으로부터 장백산에 가서 변경을 조사하려고 하였으나 도로가 멀고 수로 역시 험난하여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올 봄 해빙기를 기다려 다른 司官과 함께 의주로 가서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갈 터인데 부득이 할 경우 토문강까지 가서 우리 지방을 답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쪽 도로가 요원하고 지방이 험난하여 가는 길에 저해가 있을 때는 조선국에 명령하여 준비케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3일 후인 2월 26일 의주부윤의 牌文이 上送되었는데 목극등이 백두산을 답사하고자 출래한다는 것이었다.576)≪肅宗實錄≫권 51, 숙종 38년 2월 정축.
≪同文彙考≫原編 48, 疆界.
다음 날 숙종은 대신들과 備國諸臣을 인견하고 이 문제를 논의하였는 데 응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戶曹判書 金宗杭, 司直 金錫衍)과, 도로 험난을 이유로 불가하다는 回咨論(右議政 趙相愚, 吏曹參議 李光佐 등 다수)이 있었으나 응하기로 결정하였다.577)≪肅宗實錄≫권 51, 숙종 38년 2월 경진. 목극등 일행은 흥경방면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러 10일간 강을 거슬러 올라가 厚州에서 조선 사신과 만났고, 다시 4일간 올라가 惠山鎭에 이르러 여기에서 육로를 택하였다.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와 청의 일부 종관을 茂山으로 먼저 출발케 한 후, 남은 종관과 조선 접반사·군관·차사관·통관 등과 더불어 백두산 산정에 이르러 그 해 5월 15일 정계비를 세운 후 무산으로 갔다. 당시 접반사 朴權 등은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정계비 설치는 목극등의 조처로 이루어져 국경이 일방적으로 정해진 결과가 되었다. 접반사 박권과 함경 관찰사 李善溥는 백두산에 올라가 정계비를 세우는 데에 동참하지 않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이것은 청측의 저지라기보다는 이들의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태도 때문이었다. 당시 수백 명의 목극등 일행은 천리경·量天尺 등 査境測量 장비 및 정밀 지도제작 기사를 동반하고 필요한 물자를 가지고 와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였다. 반면 조선측은 접반사 박권, 筆生 蘇爾昌을 비롯하여 통역·군관·居山察訪·안내·家奴 등 70명이었으나 박권이나 이선부는 정계비 수립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통역 등의 실무자만 참여시켰다.578)朴容玉,<白頭山定界碑건립의 再檢討와 間島領有權>(≪백산학보≫30·31, 1985), 225∼226쪽.
趙珖,<朝鮮後期의 邊境意識>(≪백산학보≫16, 1974), 164∼165쪽.
梁泰鎭, 앞의 책, 46∼48쪽. 당시 등산하였던 譯官 金慶門의≪白頭山定界碑建立實況記≫(국토통일원, 1978)를 이용하여 조선측 수행원에 관한 것을 밝혔다.
목극등의 의지는 대단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였으며, 일행 중에 정밀 지도제작 기사를 동반하고 지도를 작성하여 자국의 영토 관할지를 고정화시키려고 하였다.

 백두산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강의 두 江原의 중간에 築土立柵하고 세웠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5척, 너비 1.83척으로 비면에 大淸이라고 횡서하고 그 아래에

烏喇總管穆克登奉

旨査邊至此審視西爲鴨綠江

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

石爲記

康熙 五十一年五月五日

 이라고 縱書하고, 이어서 淸의 筆帖式 蘇爾昌 通官二哥, 朝鮮軍官 李義復 趙台相, 差使官 許梁 朴直常, 通官 金應憲 金慶門이라고579)劉鳳榮, 앞의 글, 88∼89쪽.
李瑄根,<白頭山과 間島問題>(≪歷史學報≫17·18, 1962).
새겨 넣었다.

 당시 백두산 정계비 건립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 식자간에는 깊은 우려와 반발이 심했다.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박권의 약 5개월간의 일기인≪북정일기≫가 있는데 이를 보아도 극히 피동적인 자세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수석 역관인 金指南의≪北征錄≫은 약 3개월간(2. 24∼6. 3)의 제반 사정을 기록하였는데 국경획정시 견문한 압록강·두만강의 원류문제와 지리 등 地志 관계를 기록하였고, 그의 아들 金慶門은≪白頭山定界碑實況記≫를 남겼다. 이 백두산 정계비는 그 후 조선 실학자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어느 면으로는 토문에 대한 해석(청은 두만강으로, 조선은 송화강 지류로 보는) 차이에서 간도 영유권의 문제로 발전하여 현재까지 학자들간에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의 설치는 양국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의 청의 일방적인 조처였다. 이 문제는 1670년대 후반부터 제기되었으며 1680년에 사행의 일원이 조선정부에 알려왔다. 청조정은 지도의 작성과 경계 확장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온 데 반해, 조선 정부는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정계비의 설치는 현실적으로는 월경문제가 계기가 되었지만, 청조가 선조의 땅으로 만주를 중시해 왔다는 점과 중국 전토를 실지 측량하여 지도를 작성하는 과업의 일환이었고 경계를 일단 설정한다는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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