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1. 청국과의 관계
  • 5) 조선과 청의 문화적 관계

5) 조선과 청의 문화적 관계

 조선은 중국과 상당히 오랫동안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고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에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런데 중국과 조선 양국 간의 문화적 관계에서 문화의 전달자는 중국이 아닌 조선의 사행들로 이들의 왕래 및 기타 교류에 의하여 문화 전파가 이루어졌다. 이는 일본이나 주변 국가의 경우도 유사하다. 이것은 중국적인 세계질서 속에서 중화와 주변국가 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데, 동아시아 문화권의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의 전파가 주변지역에 이르면 매우 변질된 형태로서 지엽적인 면에 치중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의 높은 수준의 문화를 유입하여 조선적인 특색을 지닌 문화로 발전했으며, 어느 면으로는 이를 더욱 심화시켜 그 수준이 중국을 능가하는 경우도 생겼다.

 조선은 청조가 이민족의 왕조이며, 청 초에 정묘·병자호란의 두 번의 전쟁을 치르자, 明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스스로 小中華로서의 긍지와 명분으로 청 문화를 더욱 더 멸시하고 무시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후 현실적인 중국 지배자로 청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청조가 전통적인 중국 문화의 계승자·발전자로서의 위치를 굳혀 나감에 따라 조선의 지식층도 청조 문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조선과 중국 간을 공적 또는 사적으로 오가면서 문화를 전파한 사람들은 사행과 그 일행으로, 전시대에는 조선에 대한 견문이나 기록을 남긴 중국인들도 있지만, 대부분 주로 조선측 사행들이 중심이다. 사행의 기록만이 당시의 모든 것의 전모를 밝혀 주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청대에는 큰 역할을 하였다. 공적인 보고서로 사행은 의주에 도착한 때나, 도강한 후, 또는 入柵했을 때라든지 수시로 장계를 띄워 일행의 안부를 전하고 또 특수한 견문을 기록하였다. 그 외에도 서장관은 매일의 일을 기록했다가 돌아온 후 승정원에 제출하여야 하고, 또 首譯과 협력하여 따로 견문 別單을 적어서 조정에 속보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로 청나라의 기밀을 탐정하는 것으로 그 재료를 얻기 위해 序班輩(胥吏)에게 뇌물을 쓰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사적인 기록으로는 사신과 그 수행한 사람들의 기행록이 있다. 명대에는 ≪朝天錄≫·≪朝天日記≫·≪赴京日記≫라고 하여 天朝인 중국에 朝覲한 기록이라는 의미였는데, 청대에는 ≪燕行錄≫·≪燕行日記≫ 혹은≪飮氷錄≫(1649, 鄭太和의 使行錄)·≪西行日記≫·≪熱河日記≫(1780, 朴趾源의 일기)·≪薊山紀程≫(1803, 徐長輔일행에 대한 기록) 등이 있는데 燕行은 燕京인 북경에 사행한 기록을 뜻한다. 청대의 257년간(1637∼1893) 매년 정례적 사행이 연 2회 이상으로 총 514회 이상이었고, 기타 別使 賚咨行 등 임시 사행을 고려하면, 사행마다 기행록이 있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수백 종의 연행록이 있었을 것이다. 또 문화 유입에 직접적인 것으로 北京貿書도 있다.580)金聖七, 앞의 글, 46∼48쪽.
黃元九,≪燕行錄選集Ⅰ≫解題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76), 1∼4쪽.
이들의 기록을 통해 조선 지식층의 중국문화에 대한 관심 정도 및 청조의 정치나 문화에의 비판도 엿볼 수 있고, 청조 치하에서의 漢人 사대부의 조선 지식인에 대한 관심과 호의도 엿볼 수 있다.

 양국 간의 문화적인 관계는 두 시기, 즉 청의 초기와 중기 이후로 나뉜다. 초기에 비하여 중기 이후로는 조선과 청의 문화적 관계가 깊어지는데, 그것은 청이 經世致用學 및 考證學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는 점과 동시에 조선의 관인 문사들이 비록 청을 이적시하여도 현실적으로 중국 문화의 계승자를 달리 설정할 수 없는 까닭으로 그 태도가 완화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581)全海宗,<胡亂後의 對淸關係>(≪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402∼403쪽. 현실적으로 조선과 청의 관계는 청 초 정묘·병자호란의 두 번의 전쟁, 전쟁 직후의 긴장된 실질관계, 인질문제, 출병문제, 백두산 정계비 문제 등 긴장의 연속이었던 것이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단의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명조에 대한 더 이상의 환상은 사라졌고 청조가 중국의 유일의 왕조로서 중국 문화의 계승자로서 자리를 굳혔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문화를 중국 문화와의 관련에서 살펴볼 때에 네 갈래로 생각할 수 있는데 朱子學·陽明學·西學·경세치용의 학문이 그것이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청 초기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 후기의 그것들은 청 초의 중국 영향의 결과는 아니며 그 이전 시기에 학문적 접촉의 결과가 조선왕조의 중기 또는 후기에 발전한 것이다.582)全海宗, 위의 글(1977), 403쪽. 서학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종군신부였던 세스뻬데스(G. de Céspedes)를 통해 조선왕조가 최초로 접하게 된 것으로 고려할 수도 있지만, 직접 연관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일본에 피랍된 많은 조선인들이 천주교에 귀의하여 천주교 교리서가 조선어로 번역은 되었지만 이 경우도 조선과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이 서양의 학술을 접하게 된 것은 명말에 중국을 통해서였다. 선조 36년(1603) 사신 李光庭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坤輿萬國全圖>를 가져왔을 때, 李睟光이 이를 보고 감탄하였으며 그의≪芝峰類說≫(1614)에서 마테오 리치의≪天主實義≫나≪交友論≫등에 대한 촌평적 소개를 하였다. 그 후 인조 8년(1630) 陳奏使로 청에 간 鄭斗源은 孫元化를 만나기도 하였으며, 마테오 리치의 천문서·遠鏡·천리경 및 알레니(J. Aleni)의≪職方外紀≫·≪西洋國風俗記≫등, 紅夷砲·자명종을 도입하기도 하였지만, 중국이나 조선의 국내외 사정이 복잡하여 큰 영향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 후 인조 23년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아담 샬로부터 천문·算學·聖敎正道書籍·輿地球·天主像 등을 얻어 가지고 입국하였으나 금서로 빛을 보지 못하였고, 그 후로는 18세기에 들어와 1704년에 사행한 李頤命이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수아레츠(Suarez)·괴글러(Köegler) 등에게서 천문·역법이나 曆算·천주교 관계 서적을 도입하였고, 金昌業·李宜顯·洪大容 등도 북경방문시 천문이나 역법에 관한 관심을 표시하였다583)崔韶子,<西學受容에 관한 問題>(≪梨大論叢≫36, 1980 ;≪東西文化交流史硏究≫, 三英社, 1987, 205쪽).고 한다. 이렇듯 청을 통한 서학의 도입은 소현세자에 의하여 신학문으로 시도되었지만 그의 사망으로 실현되지는 못하였고, 연행하는 사행들을 통해 다시 시도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며 점차 실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 종교가 조선인들 사이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청과의 문화적 관계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청 초의 경세치용의 학풍과 그 후 고증학풍이 영·정조대 새로운 학풍의 발흥에 미친 영향이다. 물론 영·정조대의 신학풍의 발흥에는 내재적인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을 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청대 학술의 영향이나 자극 역시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중국에서 청 초에 일어난 학술 사조의 특색은 宋明理學 즉 주자학이나 양명학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하여 空疏無根한 訓詁詞章의 폐습을 타파하고 修己治人의 실학을 수립하는 데 있었다. 명대의 양명학이 도덕 차원의 知行合一의 관념이었다면, 청 초의 경세학은 정치 차원의 政敎合一로서 ‘유교’ ‘실학’ ‘경세학’의 개념도 그 시대적 내용이 변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본 개념은 수기치인을 출발점으로 하여 실학을 목표로 지향하고 있지만, 청대에 와서는 수기(도덕) 중심으로부터 주자학·양명학의 치인(政治)으로 그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실학이란 空(虛)言이 아닌 실사의 학문을 뜻하며, 인식만이 아닌 실천(行)이 요구되고 실사의 실행에도 도덕적 실행과 정치적 실행의 차이가 구별되었다.

 즉 청 초의 개념으로는 실사의 지식과정인 고증은 경세학의 도구는 되지만 그 학문자체는 아니었다. 또 실천주의도 실학의 불가결한 속성이긴 해도 그것이 도덕적 실천인 경우에는 경세학이 아니었다. 이렇듯 명말청초 이후 경세학의 개념은 정치적 실천을 핵심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청 초의 경세치용학은 고증학과는 성격이 다르다. 고증학은 경세학에서는 박학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뒤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함에 따라 그 개념에 몇 가지 독자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고전에서 實事求是를 추구하는 문헌학적 실증 귀납에 몰두하고 학문이 사상 생활과 분리되어 경학이 청 초의 경세적 경사학과는 달리 몰가치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또 고증학은 그 범위를 경학 이외의 여러 분야로 확대시켜 특히 考證史學·諸子學이 발달하게 되었다.584)曺秉漢,<淸代의 思想>(≪강좌 중국사≫Ⅳ, 지식산업사, 1989), 263·266·270쪽.
赤塚忠 金益治 外, 조성을 역,≪中國思想槪論≫(이론과 실천, 1987), 323∼324쪽.
梁啓超,≪淸代學術槪論≫(臺北, 中華書局), 6∼22쪽 참조
全海宗, 앞의 글(1977), 403∼404쪽.
따라서 이러한 배경의 청대 학술은 주자학이나 양명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다. 한편 조선에서의 주자학은 중국보다 더 부동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왜란과 호란 등의 국난 이후 점차 회의가 일기 시작했고, 중국의 명청교체로 기존의 사상체계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으며, 청대 학술이 宋明理學에 대한 반동이었다는 점도 작용한 것이다.585)全海宗, 앞의 글, 405쪽.

 이같이 중국을 통한 서학의 섭취와 청대 학술 및 학풍의 도입으로 조선에서는 신학풍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특히 18세기 청의 전성기인 강희 말년에서 건륭 연간에 연행한 인사들인 徐命膺·洪良浩·홍대용·朴趾源·朴齊家·李德懋·柳得恭·金正喜 등 쟁쟁한 학자들의 역사·지리·언어·금석·경학 등 학술의 제분야와 경세치용의 학에 대한 업적을 보면 조선 실학에 미친 청대 학술의 영향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실학이 청대 학술의 모방이나 재생이 아니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경세치용의 학과 관련하여 청은 건륭 연간에 경세치용의 학에서 고증학으로 전이하였는데, 조선은 연행 인사의 대부분이 고증학의 팽배시기에 중국을 방문하였으나 실학의 양면인 고증학과 경세치용·利用厚生을 모두 수용하였고 조선에서 두 가지 측면이 동시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국의 실사구시는 經에 기초한 것이고 고증학적 경향이 강하였던 것에 비해, 조선에서는 반드시 고증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경세치용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또한 조선의 실학은 그 특징의 하나를 역사·지리·금석학에 두었는데, 중국에서는 이러한 학문들이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586)全海宗, 위의 글, 407∼408쪽.
―――,<淸代學術과 李朝實學>(≪東亞文化의 比較史的 硏究≫, 一潮閣, 1976).
―――,<淸代學術과 阮堂>(≪韓中關係史硏究≫, 一潮閣, 1970).
藤塚隣,<淸朝文化と李朝の學人>(≪淸朝文化東傳の硏究≫, 國書刊行會, 1975) 등.

 마지막으로 18세기 후반 연행하였던 북학파, 그 중에서도 홍대용·박제가·이덕무·박지원 등은 중국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그것의 조선사회에의 수용, 특히 이용후생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홍대용은 서구과학 중 천문·역법에 관심이 많았으며 지구와 지전설, 인력과 무한우주설을 주장하여 주로 과학적인 측면을 논하였다. 한편 박제가는 구체적인 대안까지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특히 이용후생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수레·船·城·壁·궁실·교량 등 일상생활의 문제들을 비교하고 조선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또한 農·蠶·科擧·軍事 및 사회경제 분야에서는 부국을 강조하고 실용을 내세우면서 보다 적극적인 청 문물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그에 비하여 이덕무는 청의 출판문화의 다양성이나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 및 서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주로 언급하였는데 특히 顧炎武에 심취하였다. 그는 청의 학술이나 문학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지만 청조에 대한 강한 비판정신을 보다 명확히 보여 주었고, 청의 은부함에 대한 충격이나 흠모는 보이지 않았고 경제나 진보한 생산기술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에 비해 박지원은 당시가 청의≪四庫全書≫ 편찬과 관련하여 언론 통제가 심한 시기였음에도 간접적인 표현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양하게 서술하였다. 그는 정확한 관찰력과 박학다식 및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통제를 받지 않을 정도의 정치적인 관심사와 관리등용제 등 건륭 통치의 이모저모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사회경제의 실상과 신기한 풍물, 예를 들면 곡물운송선, 시신 귀향선박, 莊의 형태, 교량, 市肆, 店舍, 전당포, 관혼상례, 전족과 辮髮 등 보고 느낀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또 천주교, 천문, 지전설, 음악, 서양화 등의 서학을 매우 정확하고 세밀하게 기록하였다.587)全相運,<湛軒 洪大容의 科學思想>(≪李乙浩博士停年紀念實學論叢≫, 1975).
朴星來,<洪大容의 科學思想>(≪韓國學報≫23, 1981).
金泰俊,≪洪大容과 그의 時代≫(一志社, 1982).
朴齊家,≪北學義≫(이익성 역, 을유문화사, 1989).
崔博光,<李德懋의 中國體驗과 學問觀>(≪大東文化硏究≫27, 成均館大, 1992).
李慧淳,<李德懋의 入燕記小考>( ≪朝鮮朝 後期文學과 實學思想≫, 정음사, 1987).
崔韶子,<18세기후반 조선 지식인 朴趾源의 對外認識 :≪熱河日記≫에서 본 乾隆年間의 中國>(≪梨大論叢≫61-1, 1992).

 이렇듯 북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들은 연행을 통해 청조의 문화와 신학문으로서의 서학 등 많은 내용을 조선에 전하고 조선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하였는데 이들의 견문은 단순한 견문의 단계를 넘어 그 수용을 주장하여 당시 사회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공헌한 바가 매우 컸다.

<崔韶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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