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1) 왜란 이후 조일 통교의 회복
  • (1) 17세기 초 국교 회복 교섭과 대일본정책

가. 17세기 초 국교 회복 교섭

 임진왜란 이후 조일 간의 국교 회복을 위한 노력은 일본군이 철수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단계에서는 대마도가 일방적으로 사자를 파견해 왔으며, 명군의 조선 잔류, 대일감정의 악화와 정국 혼란 등으로 대일정책이 구체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대마도는 선조 32년(1599) 6월 源智實(미나모토 도모미)로 하여금 柳川調信(야나가와 시게노부) 명의의 書契를 부산첨사 李宗誠 앞으로 가져와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을 제기하고 조선의 피로인을 송환해 옴으로써 일본측의 강화 의사를 알려 왔다.593)≪宣祖實錄≫권 115, 선조 32년 7월 신유. 이 때 원지실은 조선인 피로인과 함께 명의 포로도 데려왔는데, 이들의 송환문제가 있었으므로 종전 협상은 조선 주둔 명군과 일본측 사이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대일본교섭에서 조선의 독자적 정책 결정이 명군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자, 조선 정부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가시지도 않은 단계에서 강화문제가 제기되게 된 책임을 임란시 정국운영의 핵심이었던 柳成龍에게 물었다. 유성룡에 대한 책임 추궁은 북인들이 남인세력을 제거하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당시 정국은 전란 후 강화 교섭에 대한 대처보다는 정권 쟁탈이 되풀이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선조 33년 4월에는 대마도가 調次(石田深右衛門)를 파견하여 대마도주 宗義智(소오 요시토시)·柳川調信 및 小西行長(코니시 유키나가)·寺澤正成(테라사와 마사나리)이 각각 연서한 서계를 가져와 조선측 사절의 파견을 재촉하는 한편 강화를 요청하였다. 이 때의 서계에는 講和가 德川家康(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의지라는 것이 표현되어 있었다. 조선은 바로 다음 달인 5월에 회답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6월에는 金達을 대마도로 보내 예조참의의 회답을 일본측에 전달하였다. 일본의 일방적인 강화 요청에 대한 조선측의 회답은 이것이 처음으로, 강화의 조건으로 被虜人 송환을 전제하는 한편, 일본과의 강화에 대해서는 明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명은 이미 1599년부터 조일관계가 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간여하지 않는다는 불간섭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일본의 강화 요청에 대해 조선의 직접적인 의사 표시를 삼가고, 명의 권위를 빌려 교섭을 지연시키는 ‘借重之計, 遷就之計’를 취하였다.

 조선이 명의 허락이라는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일본과의 강화교섭에 의사 표시를 한 것은, 선조 33년 2월 郭再祐가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일본과 강화함으로써 백성을 안정시키고 자강함으로써 일본의 재침을 막아보자는 자강론이 배경이 되었다. 이어 8월에는 李德馨이 대마도에 대한 기미정책과 차중지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594)홍성덕, 앞의 글. 이렇게 대일정책이 모색되는 가운데 조선은 9월 대마도에 보내는 답서에 조선인 피로인의 쇄환에 진력하여 성의를 보이는 것이 許和를 부여받기 위한 조건임을 제시하였다.595)≪宣祖實錄≫권 129, 선조 33년 9월 신축.

 한편, 일본에서는 풍신수길계와 덕천가강계의 싸움인 關原(세키가하라)의 전투로 인해 일본측의 사자 파견이 한동안 두절되었다. 그러다가 선조 34년 4월 일본이 조선인 포로 河東 校正 姜士俊을 송환해옴에 따라 강화 교섭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대마도 사자 橘智正(다치바나 토모마사)가 피로인 250명을 송환하면서 강화를 요청하는 종의지·유천조신·사택정성의 서계를 가져 왔다.

 그러자 7월 조정에서는 2품 이상의 중신들이 모여 대일정책을 논의하였으며, 일본과의 강화보다 대마도에 대한 許和에 비중이 두어졌다.596)≪宣祖實錄≫권 139, 선조 34년 7월 기해. 조선이 막부보다는 허화를 통해 대마도를 먼저 기미권 안에 편입시키기로 한 것은 관원의 전투로 인한 일본 정국의 혼란과 정보의 부재 속에서 대마도가 왜구로 집단화할 가능성이 있었고, 전쟁 직후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반대하는 국민적 정서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명군의 철수로 인한 국방력의 공백, 대마도의 일본 재침 위기 조성, 대마도에 대한 조선 전기 이래의 전통적 인식의 영향 속에서 서인정권은 국력 회복의 한 방법으로 대마도에 대한 허화부터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8월에 예조판서 柳根을 명에 진주사로 파견하여597)≪宣祖實錄≫권 140, 선조 34년 8월 기사. 허화에 대한 허락을 요청하였다. 이는 참전국인 명을 배제한 채 일본과 강화 교섭하는 것에 대한 명의 힐책, 또는 대마도의 무력 도발시 명의 조선에 대한 책임 전가를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 기미의 주체로서 국력 회복을 도모하고 허화 부여가 가능한 시기에 대비하려는 하나의 외교기술이기도 했다.598)閔德基, 앞의 글, 177∼184쪽.

 명에서는 뜻밖에도 허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명이 조선의 대일외교에 대해 보여 주던 불간섭 원칙에서 본다면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명이 대마도를 일본으로 오해했거나, 또는 조선과 일본의 강화에 대한 명의 책임 회피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599)위와 같음.

 한편 이 당시 기미정책을 바탕으로 한 대마도와의 관계 개선만이 남방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은 중신들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 중앙정권과의 관계도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의 대마도에 대한 기미정책은 일단 수립된 이후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선조 35년(1602) 정월 休靜의 서장을 지참한 全繼信과 孫文彧을 대마도에 파견하여, 허화에 대한 명의 허락을 얻어 내기 위해서는 대마도의 공순함이 필요함을 계속 강조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재침설에 대한 정보와 강화 요청의 진의도 확인해 오도록 하였다. 이에 5월·7월·8월·12월 대마도에서는 강화를 요청하는 사자가 피로인을 데리고 도항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4월에는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이 조선을 거치지 않고 강화 교섭을 요청하는 서한을 명에 직접 보냈다. 이에 명은 조선이 대마도를 통해 추진하는 일본과의 강화 교섭을 불신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강화의 조기 실현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대마도는 선조 36년 3월 橘智正을 파견하여 허화를 요청하고, 가등청정의 서한에 대한 사죄 및 덕천가강의 재침 위험이 있음을 시사하였다.600)≪宣祖實錄≫권 160, 선조 36년 3월 경진. 그리고 6월에는 대마도 사자 橘智久편에 덕천가강의 수압이 찍힌 宗義智의 서계를 보내 대마도가 덕천가강으로부터 조일 양국의 강화교섭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부각시켰다.601)≪宣祖實錄≫권 163, 선조 36년 6월 기해.

 10월에는 薩摩(사츠마)에 억류되었던 피로인 金光이 외교승 玄蘇(겐소)의 강화 요청을 담은 서계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김광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일본의 동향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덕천가강의 집권과 강화 의지를 전달하였다. 그는 일본의 재침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과거 풍신수길의 잔당세력에 대한 배려 때문으로, 덕천가강이 강화를 명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조선의 주장은 핑계이므로 다시 출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는 것도 아울러 전하였다.602)≪宣祖實錄≫권 172, 선조 37년 2월 무신.

 김광의 상소로 대일본정책의 방향을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한 조정은 대마도에 대한 허화를 전제로 한 대일정책으로부터 德川幕府를 의식한 대일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선조 37년 6월 조선의 대일외교에 대한 명의 불간섭 원칙이 재차 확인됨에 따라, 유정 및 일본 사정에 밝은 손문욱을 探賊使로 대마도에 파견하여 김광의 정보를 확인하기로 했다.

 유정이 대마도주 종의지 앞으로 가져 간 예조참의 成以文의 서계에는 대마도에 대한 허화 및 開市(무역)를 허락하는 한편, 일본 정부의 강화요청은 피로인 송환 등의 誠意 표현이 전제되어야만 명나라 황제의 허락에 따라 강화로 연결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603)≪通航一覽≫卷 27, 朝鮮國部 3 修好始末, 慶長 9年夏條, 314쪽. 조선은 ‘明朝借重之計’를 일본 중앙정부에 대해서도 적용하였다. 선조 38년 3월 유정 일행은 京都(쿄토)에 가서 덕천가강을 만나고, 4월에는 피로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데리고 왔다.604)≪宣祖修正實錄≫권 175, 선조 38년 4월. 그러나 조선은 덕천가강이 강화를 요청한다면서 강화에 관해 언급한 書狀 하나도 건네주지 않았음에 주목하고, 그가 강화를 원하고 있다는 대마도의 주장을 불신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강화교섭 요청이 대마도의 자의에 의한 것이라는 판단하에, 선조 39년 2월 대마도를 통하지 않고 직접 막부(加藤淸正)에 사자를 보내어 막부의 강화교섭에 관한 진의와 일본의 국정을 탐색하기로 했다.605)≪宣祖實錄≫권 199, 선조 39년 5월 을유. 조선은 일본에 보낼 서계를 작성하여 발신인은 朝鮮國禮曹判書官衙로, 수신자는 日本國執政大臣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덕천가강이 먼저 國書(先爲致書)를 보내 오고, 성종과 그 왕후 및 중종의 능묘를 파헤친 犯陵賊을 보내 온다면 강화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606)≪宣祖實錄≫권 199, 선조 39년 5월 기묘.

 그러나 이는 대마도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유는 조선이 막부에 직접 차관을 파견한다는 것 자체가 대마도의 강화교섭 행위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차관 파견으로 조선정부와 일본의 중앙정권이 직접 교섭하는 루트가 형성될 경우, 조선과의 독점적 교역 관계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대마도는 조선에 차관 파견계획의 중지를 요구하는 한편, 조선이 제시한 2건의 대행을 조선에 약속하였다. 조선측이 당초 계획을 바꾸어 대마도의 요구를 수용했던 것은, 만약 조선정부가 의도하고 있는 막부정권과의 직접 교섭을 막부가 거부할 경우 외교상 주도권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607)홍성덕,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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